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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삼상24; 1-7 죄를 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_1
2013.8.11.주. 주일오전. 상담설교- 능력
*개요 {1오경역사서} <4극본> [5은혜]-[7실천]
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쌔
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4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나타나지만 그 능력은 쌓이기 전에 먼저 채우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쌓인다는 것은 밖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채운다는 것은 안으로 스며든다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먼저 안으로 스며들게 되고 그 다음에 밖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집을 지을 때 먼저 터파기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아는 분이 토지에다 주택을 짓는 과정을 설명해 주시는데 제일 먼저 한 것이 기초 토대를 닦는 일이었다고 했습니다.
시멘트로 바닥을 충분히 든든하게 만든 다음에 그 위에 조립식 주택을 올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토대를 닦는 일에 관해 종종 듣는 안타까운 이야기는
그것이 잘 안되어서 문제가 생겼다는 내용입니다.
어떤 주택은 바닥에 대충 토대를 만들고 그 위에 집을 만들었더니, 바닥에 물이 새고 나무뿌리가 방바닥을 뚫고 들어오는 등 집이 완전히 망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토대가 약해서
집이 기울기도 합니다. 이처럼 기초를 세우는 것은 집의 크기가 크면 클 수록 더 어렵고 중요한 일입니다. 높이 세우려고 하면 할 수록 깊게 파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크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 속을 깊이 채우시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비로소 쌓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게 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능력으로 골리앗을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위험한 죄를 피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을 올바르게 모셔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피한 죄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사울은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군사를
이끌고 쫓아가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쌔”
사울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뒤에 승승장구하며 대중적인 인기가 높아져 가고 있음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왕위가 온전해지고 오래 간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울왕이 다윗을 찾아간 그곳은 광야였고 굴이 많이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날씨는 무덥고
태양은 강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시 쉬기 위해서 한 굴을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3절의 내용입니다.
““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여기서 ‘발을 가리우다’라는 말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낮잠을 자면서 쉬다와 용변을 보면서 쉬다의 뜻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정황상 낮잠을 자면서 쉬기 위해서 갔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렇게 쉬고 있을 때에 다윗의 부하들은 옆에서 그를 부추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이기 때문에 여기서 사울을 죽이면 더이상 쫓기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4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정말 여기서
사울을 죽이면 더이상 도망을 다니니는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지금 그에게 원수를 갚으면 지금까지 사울왕으로
인해 겪었던 모든 수모를 갚을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도 처음에는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인가 하였습니다.
우리 삶속에서도
이러한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과거의 모든 어려움을 다 갚을 수 있는 기회처럼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어느날 누군가가 많은 돈을 주면서 부탁을 해 온다고 해 보십시오. 그럴 때 이 돈으로 지금까지 어려움을 다 갚을
수가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돈이라고 생각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친구에게 상의를 해 보았더니
친구도 그건 좋은 기회라고 당장 그 돈을 받고 부탁을 들어주라고 해준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은 당연히 받아야 하는 좋은 선의의
선물이 되어
버립니다. 사실은 그것이 뇌물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또 다른 예로
나와 경쟁관계에 있는 누군가에 대해서 그를 쓰러뜨릴 수 있는 결정적인 정보를 입수했다고 한번 해보십시오. 이 정보를
신고하기만 하면 그는 도저히 재기할 수 없이 완전히 망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일로 인해 자신이 받는 반사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 이야기를
퍼트리는 것은 공익에 부합된 행동을 하는 것 뿐입니다. 정의를 실천하는 일입니다. 사실은 음해성 인신공격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사소한 방식으로 이러한 원수갚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마음이 상한 일이 있을 때 소심하게 보복합니다.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동일한 일로 소심하게 보복합니다. 밥을 안차려
주고 나가서 사먹으라고 말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소심하게 보복합니다. 이제 너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말도 하지 않을테다라고 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소심하게 보복합니다. 앞으로는 엄마, 아빠랑은 안놀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항상 하는 생각은 ‘나는 옳아,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야,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정의를 이룰 수 있게 도와주시는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윗도
사울왕이 쉬고 있을 때 그의 겉옷자락을 베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막상 사울왕의 옷자락을 베고 난
다음에 그는 마음에 찔림이 있었습니다. 사실 옷자락을 벤다는 것도 생각해보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종종 겁만 주어야 겠다고 시작한 일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일을 저지르고 난 다음에 다윗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5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이 상황을 자신의
원수 갚는 것과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 것에서 그는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기만의 생각으로 일을 시작하려고 했지만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옳지 않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의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억울함과 자유롭게 되는 것만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스스로 자책감을 느끼고 있는 하나님의
금하시는 일을 오히려 하나님이 행하라고 하는 일로 오해해 버렸을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기 상황만을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맞도록 해석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과연 내 생각이 나만의 관점인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의 관점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다윗이 자기자신의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으로 생각했던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바로 이말입니다.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을 더욱 강화시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 인해 내 자신이 적어진다는 것이 있어야만 합니다. 내 속에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점차 적어지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이 나에게 들어오셨다는 뜻입니다. 그 능력이 바로 나에게 주어진 것이고 그 능력을 내가 받아들였다는 의미입니다.
혼자 살던 사람이
결혼을 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혼자 살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비좁은 영역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혼자 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은 제약들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 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충만함을 느낍니다. 혼자 살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열매들이 생깁니다.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은 자신을 중심으로 사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는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면 자신의 세계의 기준에서는 줄어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세계 만큼이나 더 넓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셔들였기 때문에 하나님 만큼 넓어지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금하시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사울은 그냥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너뜨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낮추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기 때문에 그 스스로 하나님의 금하시는 일을 행하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사울왕에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사울왕은 하나님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으면 몰라도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분명히 있었다면 그 하나님의 권세를 따라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세우신 어떤 사람을 인간이 무너뜨리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돌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주님의
뜻은 명확합니다.
다윗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금지를 따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으심과 세우심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함으로서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도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자임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근거로 해서 살아갈 때에 우리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에
비로소 하나님
안에 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선글라스를 꼈다는 증거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이 좀 달라보일 때 선글라스를 낀 것입니다.
하나님의 금하시는 것이
있고 그것을 중시 여길 때 비로소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이 믿음의 토대가 분명히 세워진 것을
보여줍니다. 그 위에
놀라운 신앙의 발전이 한단계 한단계 세워질 수 있습니다.
이제 그가 하나님을
이렇게 바라볼 때에 새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사소하게 겉옷자락을
하나 베었던 일이 다윗에게는 커다란 깨달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왕을 해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가 자기만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죄를 짓지 않게 만드는 의를 행하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사울왕이
일어나서 길을 가고 있을 때에 다윗은 나타나서 방금 자기에게 있었던 심경의 변화를 말합니다.
“11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찌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다윗이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보복해 주시기를 의지했기 때문에 그 손으로 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중에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에 아주 중요한 표지가 되었습니다.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기를 바랬을 때에 죄악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 의로움이 후에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주시고자 할 때에 그에게 아무런 결격사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을 시해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역모를 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반역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그에게는 어떠한 트집잡을 일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사울왕의 겉옷자락을 벤 일은 오히려 그 후에 적극적으로 사울왕을
보호함으로써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사울왕이 전쟁터에서 전사한 후에 그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유혹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에 그것은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힘입어 죄를 멀리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가 마침내 높이 세워질 수 있도록 하십니다. 아무리 그 능력을 통해 밖으로 새로운 어떤 것이 나타나게
되기를 바란다 하더라도, 속으로 진실한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하고 있음이 없다면 언젠가 그 부실함이 드러나게 됩니다. 물이 새기도 할 것이고, 건물이
흔들리기도 할 것이며, 금이 가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안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을 종종 방송매체를
통해서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소망합시다. 그래서 그 능력이 우리의 판단과 선택의 기준이 되기를
사모합시다.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죄를 피하게 하시는 가장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리게 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