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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삼상17; 43-49 네가 모욕하는 이름으로 가노라_1
2013.8.4.주. 주일오전. 주제설교-능력
*개요 {1오경역사서} <3분석> [3감정]-[5은혜]
43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44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자녀를 키우다 보면 그 자녀의 말을 들으면서 웃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의 둘째 딸은 그런 면에서 참 많이 웃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한번은 저에게 뭔가를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아빠는 이거
어떻게 하는지 알아?’ 그래서 제가 안다고 대답해주고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저의 딸은 말했습니다. ‘잘한다~’ 마치 ‘아빠 제법인데’라는
뜻으로 그렇게 대답하는 아이를 보면서 아빠는 말해주었습니다. ‘아빠는 더 많은 것도 다 잘해~’ 하지만 우리 딸은 별로 못미더워하는 눈치였습니다.
때로는 올바르게 가르쳐 줘도 자기 나름의 고집을 부리기도 합니다. 달려라 하니라는 노래가 있는데, 처음에는 첫 가사를 ‘나잖아’로 틀리게 불렀습니다. 그래서 제가 올바르게 가르쳐주었습니다.
‘나 있잖아’라고 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계속 자기는 ‘나잖아’가 맞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옥신각신하다가 엄마가 끼어들었습니다. ‘지인아,
나있잖아가 맞는 거야’ 그러니까 결국 마지못해서 수긍하기는 했지만 우울한 표정으로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그래도 나는 나잖아로 부를래’
부모로서 어린 자녀가 부모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을 보면서,
또한 때로는 자기가 옳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을 보면서 저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과소평가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일도 하실 수 있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능력이 많아요? 몰랐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비록 옳으셔도 ‘그래도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어요’라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사는 것이라고 해도 사람은 이렇게 대하면
안되고 저렇게 대하는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늘 나의 길을 가련다는 초지일관 굽히지 않는 자세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서 나타나지 않을 때가 있고 그 능력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거부하는 바람에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돛을 단 배가 있다고 합시다. 그 배에 아무리 모터를 달았다고 하더라도 바람과 파도를 역행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바람과 파도를 따르려고 할 때에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더 큰 바람과 더 큰 파도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게 됩니다. 우리가 이세상에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한도 내에서 가능한 것이지 그 허락하심을 어기면서 자신의 뜻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이제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로 나의 것으로 만들면서 하나님의 능력에 따라 살았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특히 하나님의 능력에 역행하는 또 다른 한 사람과 더욱
대비가 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은 ‘다윗과 골리앗’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위대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가 어렸을 때에는 그저 여덟 형제중의 막내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어린 시절에 그는 골리앗이라는 블레셋의
위대한 용사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시기적으로 본문의 시대는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온전히 정착한 다음에, 사사시대를 거쳐, 왕정시대로 들어간 다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맨처음 왕은 사울이었는데 그 당시 블레셋이 쳐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군대를 모으고 블레셋을
대적하기 위해서 출동했습니다. 그리고 양쪽은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상호 대치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 무렵 다윗은 아직 나이가 어려 군대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전쟁에 나간 형들의 안부를 알기 위해서 다윗에게 형들과 지휘관에게 줄 음식을 챙겨주어서 그를 전쟁터에
보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나간 전쟁에서 다윗은 모든 사람들에게 겁을 먹게 만들고 있는 거인 골리앗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사람들을 수치스럽게 하고 있는 골리앗에 대해서 자신이 나가 싸우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골리앗이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골리앗은 분통을 터트리면서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43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44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고기를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정식 군인도 아니고 유명한 전사도 아닌 소년 다윗이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 이스라엘 대표로 나왔다는
사실이 골리앗은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다윗에 대해서 이를 갈았고 더 포악하게 대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여기에 대응하여 대답했습니다.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는 말이 흔히 쓰일 정도로 다윗은 작고 왜소하며 골리앗은 크고 강함을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다윗과 골리앗의 말속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골리앗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었고 골리앗은 그냥 자기 힘으로 다윗을 상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하는 다윗과 ‘내가 네
고기를 들짐승에게 주리라’고 말하는 골리앗이 싸우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싸우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가노라하면서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은 내가 이일을 이루겠다고 말하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내가 무엇인가를 이룰 거야라고
말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더 강해보입니다. 또한 더 목표의식도 있고 의지도 강하고 열정도 넘칩니다. 때로는 그런 사람이 성공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결국은 혼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했기 때문에 나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전부입니다.
골리앗이 말한대로 다윗을 이겨서 다윗의 시체를 들짐승에게 주었다고 해 보십시오. 그에게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해서 무엇을 얻게 될까요? 자신의 분노만 폭발한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만 해소한 것입니다.
결국 그 자신이 말한 들짐승처럼 무의미한 존재가 될 뿐입니다.
저의 가정은 수련회를 마친 다음 짬을 내서 ‘아쿠아리움’에 갔다
왔습니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보는 수족관의 모습을 맞이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소 특이했던 것은 처음 그곳에 갈 때는 엄청난 규모에
놀랐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커보이지 않아서 시간의 무상을 느꼈던 점입니다. 여하튼 그곳에 수많은 어류들과 바다생물들을 보는데 그중 ‘매너티’를
보면서 영혼없는 눈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이, 유리벽 밖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없이 그저 자기 있는 그 공간
안에서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삶이라면 그들이 혹시 이 수족관 안에서가 아니라 바다 속을 하염없이 다닌다 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들짐승은 들짐승일 뿐입니다. 물짐승은 물짐승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만 국한되어서 살아가고 그속에서 자신의 원하는 것을 하고 자신의
힘대로 살고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 전부라면 그렇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러다 사는 것이 전부라면 우리는 얼마나 무의미한 삶을 사는 것입니까? 이 세계 너머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이 그저 존재하는 이 세계에만 의미를 두고 산다면 그것은 이 세계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에 다 사라지게 되는 것들일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와는 다른 우리의 세계 너머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삶이 있습니다. 새로운 세계로 더욱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새로운 세계로의 길은 바로 우리가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열립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응해서 우리의 길이 존재하는 것이지 그런 사람들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골리앗이 ‘너를 들짐승에게 주리라’라고 말할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고 하는 말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유리벽 밖에는 아무 것도 없어, 너는 너의 힘으로만 살아야돼’ 라고 말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유리벽 밖에는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계셔’라고
말할 때 그것이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의미를 깨달으면서 골리앗에게 말했습니다.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그가 고백하는 것이 승리에 대한 확신이자 장담이라고 생각한다면 본질을 벗어난 외면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질은 여호와입니다. 다시 한번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붙이시리니,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않음을 알게 하겠으며,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가’ 너희를 우리에게 붙이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속에서 그는 분명히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유리벽 너머에서 돕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이 세계에 대해서 그저 보기만 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손을 내밀어 나를 붙드시며 손을 내밀어 그를 치시며 손을 내밀어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겉보기에는 유리벽 너머에 계신 분 같으나 사실은 유리벽 안쪽에도 계시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아까 그 영혼없는 눈을 하고 있는 매너티를 바라보면서 옆코너에 간식을 팔길래 출출하던 차에 우리는
간식을 사먹었습니다. 먹으면서 이렇게 보고 있는데, 갑자기 천정에서 배추잎이 우수수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보니
사육사가 먹이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내려오는 배추잎을 성큼 물면서 그 영혼없던 눈에 다시 영혼이 찾아오는 듯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먹이를
먹으면서 영혼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영혼이 생기는 바다동물들은 매너티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옆에 있던 거북이들도 냉큼 한조각을
뜯어먹으며 생기를 되찾았고 뭔가 채소를 먹을 수 있는 것들은 다 달라붙어서 영혼의 소생을 맛보았습니다.
영혼이 소생된 것은 좋기는 하지만 그 근거가 먹이를 먹을 때 뿐이라는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때가 밥먹을 때 뿐이라면 얼마나 아쉬운 일입니까? 우리의 눈이 반짝반짝하게
되는 때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게임이나 TV프로그램을 볼 때 뿐이라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을 바라볼 때 새롭게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육체적인 즐거움만이 아닌 정신적인 희락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제 그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게 되는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이 무엇인가 보십시오. 48절입니다.
“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로 마주 그
항오를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골리앗은 그냥 픽 하고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이 던진
돌에 맞아서 쓰러졌습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에게로 힘차게 달려가서 그에게 물맷돌을 던졌던 것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승리를 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능력을 주시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대신 싸우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녀들이 그 능력을 얻게
되기를 원하시 때문입니다. 아까 다윗이 선언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
하나님이 골리앗을 다윗대신 쓰러뜨리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으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하십니다. 그를 칠 수 있게 하십니다. 정말로 다윗은 골리앗에게로 빨리 달렸습니다. 물매로 던져 돌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통으로 골리앗의 이마에 박혔고 그래서 그는 쓰러져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를 통해 나타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골리앗이 저절로 죽었다라고 말하지 않게 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다윗에 의해서 죽었다라고 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자들 속에서 그 능력을 확신할 때에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바로 그러한 믿음을 갖고 있는 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나타나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능력은 나타나면 나타날 수록 오해될 것입니다. 변질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만이 이일을 이루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게 합니다.
그 능력을 의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무시하는 많은 세상 사람들 속에서 여러분들 만큼은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고 그것을 나타내 보이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영광받으십니다. 또한 여러분 각자가 그 영광 속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 은혜 속에서 늘 그 능력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 눈이 열려있는 우리 모두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