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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스10; 16-22 그 아내를 보내기로 하고_1
2013.6.30.주. 주일오전. 주제설교: 동행
*개요 {2역사서} [7실천]-[8사역]
<B관점>
16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그대로 한지라 제사장 에스라가 그 종족을 따라 각기 지명된 족장
몇 사람을 위임하고 시월 초하루에 앉아 그 일을 조사하여
17 정월 초하루에 이르러 이방 여인을 취한 자의 일 조사하기를 마치니라
18 제사장의 무리 중에 이방 여인을 취한 자는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 그 형제 마아세야와
엘리에셀과 야립과 그달랴라
19 저희가 다 손을 잡아 맹세하여 그 아내를 보내기로 하고 또 그 죄를 인하여 수양 하나를
속건제로 드렸으며
20 또 임멜 자손 중에는 하나니와 스바댜요
21 하림 자손 중에는 마아세야와 엘리야와 스마야와 여히엘과 웃시야요
22 바스훌 자손 중에는 엘료에내와 마아세야와 이스마엘과 느다넬과 요사밧과 엘라사였더라
우리 몸에는 있어야 할 것이 있고 없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건강은
있어야 하고 질병은 없어야 합니다. 영양소는 있어야 하고 바이러스는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질병없이 건강하게만 살 수 있다면 무병장수가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서 우리는 많은 없어야 할 것들 때문에 괴로움 당하고 있습니다. 있어야 할 것들은 있고 없어야 할 것들은
없어야 하지만 반대로 있어야 할 것들이 없고 없어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슬프거나 괴롭게 됩니다.
그런데 인생에서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있어야 하는 것이 어느 순간 없어져야 하는 존재가 될 때입니다. 그럴 때 상황이 좀 복잡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최근 교인 한 분이 맹장염으로 수술을 받고
퇴원하셨습니다. 급성은 아니어서 입원준비를 다 하고 병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저녁때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의 목적은 맹장을 떼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담당의사 선생님은 잘라낸 맹장을 남편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맹장이 바로 며칠 전부터 있었던 통증의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맹장은 몸의 한 부분이었고 중요한 기관이었습니다. 또한
인체에 유익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로 인해 통증이 일어날 때에 그 기관을 떼어버려야만 했습니다.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더 큰 위험성 때문에 그 기관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이제 성경에서 보려고 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점을 이해하면서
성경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은 이방여인들을 떼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죄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다시 돌려보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내였고 며느리였습니다. 이러한 문제의 성격이 사실 이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죄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느새
삶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대적인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과연 누가 이방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하였는가를 살펴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16,17절입니다.
“16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그대로 한지라 제사장 에스라가 그 종족을 따라 각기 지명된 족장
몇 사람을 위임하고 시월 초하루에 앉아 그 일을 조사하여
17 정월 초하루에 이르러 이방 여인을 취한 자의 일 조사하기를 마치니라”
그들의 구체적인 행위가 시작될 수 있었던 문제의식이 여기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라는 단어 속에서 나타납니다. ‘הַגֹּולָה בְּנֵי’ 라는 히브리
단어는 영어로 ‘the children of the exiles, 사로잡혔던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이 단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사로잡혔던 자들로 명시한 것은 그들이
과거에 어떠한 일을 겪었는지를 상기하기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속에서 분명히 이 죄를 구체적으로 자백하고 회개하기 위한 결심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족장 몇 사람을 위임하여 이 일을 조사하였습니다. 그래서 10월 1일에 시작해서 12월 1일에 끝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음력을 지켰기 때문에 우리와 달력이 비슷했습니다.
이렇게 이방여인을
취한 일을 조사하다보면 여러가지 사연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성경은 이방여인들 자체를
배타시 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윗의 조상이 되었던 여리고의 라합도 가나안 여인이었으며, 나오미의 자부였던 룻도 모압여인이었습니다. 정말
출신이 문제가 되었다면 그런 여인들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출신이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이 문제였습니다. 그 여인들은 전부 유대인으로 귀화하였습니다.
그래서 출신이 어떠하였든지 정식 유대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유대인이
되지 않으려고 할 때에 그들은 여전히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의 종교와 문화와 관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바로 그러한 자들을 조사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우리가 이러한 문제로 조사를 하기 시작한다면 어떨까요? 이방여인들과의 혼인은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죄가
되었기 때문에 문제시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죄가 되는 문제들을 다 조사하기 시작한다면 어떨까요?
한국 기독교에는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여러 주제들이 있습니다. 재정비리와 부자세습과 내연관계와 교회내의 폭행과 고소고발,
교역자 및 신자들의 범법행위 등이 바로 그 문제들입니다. 술, 담배, 제사문제, 혹은 구원관과 같은 신앙의 원칙에 대해서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세속적인 일들로 인해서 비난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런 비난들은 우리 스스로를 무안하게 만듭니다. 제사나 구원관에 대한
비난은 오히려 믿음을 굳건히 만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지만, 우리가 세상에서 받는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에 대한 비난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견디기 어렵게 만듭니다.
신도 수가 전체
국민의 4분의 1정도가 되었을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다른 나라에서는 어땠을까요? 어떻게 다른 나라는 전국민이
성도가 되어서 국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다른 나라는 그렇게 해서 몇 백년을 지날 수 있었을까요? 정확히 모르기는 몰라도 존경과 사랑이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때에는 그랬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 기독교 역사 130여년 만에 성도 수는 어느 정도 늘어났을지
몰라도 비난과 오명은 더욱 커졌습니다. 현재 우리는 그 모든 기독교의 악평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우리가 씨름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모든 죄악들입니다.
정말 순수하게
다시 복음을 전파하려고 하면 아예 기독교에 대해서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도 낙도나 오지 등으로 전도활동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오명이 아직 퍼지지 않은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귀한 일이지만 그렇지 못한 대도시에 있는 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복음을 받아들였으나 아직 떼어내지 못한 이 죄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요? 비기독교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폄하와 비난이 때로는 그저 견뎌야만 하는 신학적인 것도 있지만, 때로는 정말 외면할
수 없는, 우리 자신도 진짜 문제라고 생각되는 일들에 대한 지적을 우리는 어떻게 감당해야만 할까요?
에스라는 바로
그 점에 안타까와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만연해버린 죄에 대해 좌절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들에게도 신앙적 양심이 남아있어서
그 통회와 자백에 동참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그 죄악을 떨쳐 내기로 결심했습니다. 말그대로 다시 사로잡히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이시대를 사는 우리도 이 죄를 떼어버리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 몸의 일부였지만, 또한 우리를
지탱해주는 중요한 기관이기도 했지만, 우리의 문화이자 습관이며 인생의 한 부분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치 맹장을 떼어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에스라에게도 반대세력이 있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15 오직 아사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가 일어나 그 일을 반대하고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저희를 돕더라”
이렇게 이방여인과의
통혼의 죄를 버리려고 할 때에도 방해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도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반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온 회중이 이일을 함께 마음 아파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을
더 두려워하였습니다. 지금 당장의 아픔보다도 그것을 그냥 두었을 때의 더 큰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맹장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견딜만 하다고 맹장수술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나중에 맹장이 터지면 더 큰 수술을 해야만
합니다. 더 큰 괴로움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지금 죄를 끊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큰 고통과 아픔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고 있는 죄를 뿌리 뽑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인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신앙생활의 목표인데, 영광을 돌리기는 커녕 더 큰 비난만 만들어낸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의
가장 커다란 죄악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우리를 아끼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어려움에 빠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녀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자녀들에게는 다음 세대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현세대도 제대로 못하는데 어떻게
다음 세대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현세대가 잘 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음세대도 잘 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 세대가 잘 할 수 있는 이유는 현 세대가
잘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가 잘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이전 세대가 잘했기 때문입니다. 콩 심은데서 콩 나고, 팥 심은 데서 팥 납니다. 이러한
원리는 세계 어느 곳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자녀가 어려운 이유는 그들이 잘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말입니다.
이러한 복잡한
고민 속에서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결심을 세웠고 그 다음으로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죄의 실태를 파악했습니다. 그들은 말로만 해결하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문제의 실상을 파악하였다는 것이 진정한 변화의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나타난 실태는 참담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18절입니다.
“18 제사장의 무리 중에 이방 여인을
취한 자는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 그 형제 마아세야와 엘리에셀과 야립과 그달랴라”
제사장 무리에서부터
이방 여인들을 취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이어지는 23절부터 끝절까지는 각기 지파 별로 직무 별로 골고루 포진한
죄의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레위 사람 중에도 있었고, 노래하는 자 중에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 지파 중에 그들을 파악할 때 참으로 다양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아마
한국 기독교인의 죄악의 실태조사를 하면 놀라울 것 같습니다. 목사들 중에 있겠고, 장로들 중에 있겠으며 권사와 집사와
일반 성도들 중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 기준이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는 기준이 아니고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는 그런 도덕적 기준으로 봐도 많이 걸릴
것입니다. 어쩌면 차라리 그런 조사를 하지 않는 편이 더 속편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어디까지 나아갔을까요? 이 모든 일들을 파악한 뒤에 그들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19절입니다.
“19 저희가 다 손을 잡아 맹세하여
그 아내를 보내기로 하고 또 그 죄를 인하여 수양 하나를 속건제로 드렸으며”
그들은 다 손을
잡고 맹세했습니다. 그 아내를 내어 보내기로 말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행동에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우리는
결코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그들을 해내었습니다. 우리는 결코 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그들은 해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체중감량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살을 내어 보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살을 내어보내지
못해서 달고 삽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루에 3-4시간씩 혹은 5~6시간씩 운동을 해서 마침내 살을 내어보냈습니다. 또는 병원에 가서 살을
내어 보냅니다. 그리고 살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부럽습니까? 그들의 그 가벼운 모습이!
만약 우리가
이 모든 일들을 대리만족으로 보고 끝내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역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려고
하기만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사로잡힌 자의 자손들처럼, 실태파악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사용할 수 있는 조사방법이란 죄로 인한 그들의
고민을 들어보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죄를 감추고 있을지 몰라도 한꺼풀 벗겨보면 그 죄로 인한 많은 괴로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을 참고 있을
뿐이지 그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면 많은 이야기가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실태 파악을 할 수 있고 구체적인 행동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내를 내어보낸다는 것은, 결국 죄를 내어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아내가 아니라 불법의 아내를 내어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모든 물질에의 욕심을 내어보낼 수 있습니다. 다툼을 내어보낼 수 있습니다. 음란을 내어보낼 수 있고 악습을
내어보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다 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악을 내보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얻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양 하나를 속건제로
드렸습니다. 속건제는 여호와의 성물에 대한 죄를 지었을 때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전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속건제를 드리며 그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들의 몸이 바로 여호와의 거룩하신 전이 되었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어떻게 성전을 재건하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삶을 정결케 함으로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뒤에 뒤따르는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느헤미야를 통해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재건이 되었기에 그를 둘러싸는 성벽도 재건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을 모셔 들이는 것이었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었으며, 결국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삶의
변화를 세상 사람들이 자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자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때문에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러한 모습은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계속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변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에서 아직도 많은 더 큰 죄를 내어 보내면서 더욱 하나님께 담대해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자유로워지며 주님께 더욱 밀착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