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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스10; 9-12 하나님의 전 앞에서 이루어진 일_1
2013.6.23.주.주일오전. 주제설교- 동행
*개요 {1오경역사서} <4극본> [5은혜]-[7실천]
9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이 삼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니 때는 구월 이십일이라 무리가 하나님의
전앞 광장에 앉아서 이 일과 큰 비를 인하여 떨더니
10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로 아내를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11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12 회 무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지하묘지에 있는 한 성공회 주교 무덤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져 있다고 합니다.
“내가 젊고 자유로운 상상력의 날개를 끝없이 펼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그런 꿈을 가졌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나로 인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로 인해 달라지는
모습을 감지할 수 없었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나는 깨닫는다. 그들이 변하기 전에 만일 나 자신이 먼저 변화했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가 좀 더 좋은 모습으로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을...그리고 또 누가 알겠는가?
온 세상까지 변화되었을지도.”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한 교역자의 소망은 자신을 바꾸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는 열매가 되어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깨달음 조차도 세상이든 다른 사람이든 자기 자신이든 무엇이든지 변화를 시키고자 했던 노력으로 인해 생겨난
것입니다. 무엇이든 바꿔보려고 하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얻게 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란 일어나지 않는다고 체념해버립니다. ‘사람은 안변해’라고
단언해 버립니다. 그리고 정말 그 말대로 아무런 변화는 아무리 시간이 오래 흘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변화의 의지를 가질 때 만이 비로소
변화의 대상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변화의 의지를 갖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변화의
결과가 무엇인가가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가 존재할 때에 변화를 위한 노력이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에스라의 경우에서는 그
변화를 위한 노력의 결과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변화를 위해 감당했던 모든 괴로움과 고통과 절망과 좌절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읽은 본문의
9절을 보십시오.
“9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이 삼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니 때는 구월 이십일이라 무리가 하나님의
전앞 광장에 앉아서 이 일과 큰 비를 인하여 떨더니”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 앞의 광장에 모였습니다. 바로 이방여인들과의 결혼문제때문에 모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인해서
큰 비가 내렸는데 그 비를 통해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두려워하면서 사람들은 떨었습니다. 이제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이방족속과의 통혼의
죄를 자각은 하고 있었으나 괴로워하지는 않았습니다. 죄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로 인한 괴로움은 느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
죄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점차 감각은 시들해지고 남은 것은 이해정도만 있었습니다. 그것이 악한 일이었구나라는 생각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꾼 것은 바로 에스라였습니다. 에스라가 아니었다면 이 모든 죄는 그냥 묻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전 앞에
이 문제때문에 모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편했을 지 모르지만 그 대신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회복
불능의 심판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에스라의 절망과 고통으로 인해 자신들의 무감각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한 커다란
하나님의 심판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변화되었습니다. 에스라의 희생과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 삶속에서도
동일한 변화에의 의지가 있습니다.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대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 변화의 대상이 세상이건, 다른 사람이건, 혹은 자기 자신이건 간에 변화에의 의지가 있습니다. 그 의지가 변화를 위해서 노력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변화에의 절망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사람들도 변하지 않는다고, 우리 자신도 변화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제 버릇 개주겠느냐고, 세살 버릇이 여든 간다는 말을 들어보라고 합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인간은 변화될 수 없다고 자조합니다. 결국
이 변화에의 절망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때문에 항상 모든 것은 동일하게 진행됩니다. 그런 모습으로 인해서
스스로 불편하고 괴로워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의 결과를 바라보지 말고 조금 더 멀리 바라보십시오. 시간이 흐르면 현재의 모습이 나중에는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과 변화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은 지금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흐르면 커다란 차이가 납니다. 왜냐하면 변화를 원한다는 것은 어차피 살게 되어 있는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쪽으로 가는 것과 서쪽으로 가는 것의 방향의 차이가 결국 도착지의 차이를 만드는 것처럼 우리가 변화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은 변화를 포기하며 살아가는
것과의 엄청난 차이를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변화를 추구한 것의 결과란 변화를 추구하며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변화를 추구했을 때
그로 인해 생겨난 그 어떤 것 보다도 변화를 목표로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달라지게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변화를
추구하게 됩니다. 변화를 추구하면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이 됩니다.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10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로 아내를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11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에스라는 그냥
이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들을 끊어버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민족우월주의를 내세우고 영광스러운 선민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자고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범죄하였고 하나님께 죄를 더하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점입니다. 이방여인들과의 결혼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죄가 되는 이유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 뜻대로 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그러한 삶을 돌이키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신앙의 회복과
신앙인으로서 삶을 살자고 하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또한 현실에서의 비리와 죄악을 끊어버리자고 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정말 더 중요한 것은 왜 그렇게 하려고 하는가입니다. 더 큰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더 고결한 삶으로 살아가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분과의 관계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상황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앙의 모든
수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스라가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없을
때의 회복과 변화, 거룩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 그리고 바리새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살인하지도 간음하지도 않았습니다. 십계명을 온전히 지킨
그들이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대신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심각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있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외면의 모습으로 무장한 자기애만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자들이 설사 삶이 거룩했다 하더라도 신앙이 거룩한
것은 아닌 이유는 죄악된 삶을 대치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들어오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삶의
거룩, 정결한 삶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버리고 변화하려는 것이지 단지 그렇게 사는 삶이 좋아보이기 때문이라거나 그래야 더 많은 유익을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는 순간 그때부터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의지하게 됩니다. 그 자체가 바로 우리가 변화하려고 했던 모든 노력의 결실이
됩니다. 목적지가 하나님께 가는 것이면 중간에 내리지 않습니다. 끝까지 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에스라는 애초에
말씀을 가르치고 성전을 재건하려는 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에서 그는 말씀을 가르치는 일 보다는
말씀대로 살게 하는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라기 보다는 성전 앞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삶에 대한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과연 에스라는 엉뚱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원래 하려고 했던 일에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에스라가 원했던 일이 바로 이런
일입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그것을 지키게 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12 회 무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모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큰소리로 대답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들이 단지 율법을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대로 살기로 결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성전을 재건하는 일과는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9장 13,14,15절을 보십시오.
“9:13 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경하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
9:14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일을 행하는 족속들과 연혼하오리이까 그리하오면 주께서 어찌 진노하사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9:1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롭도소이다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인하여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어차피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이미 재건된 성전은 유지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흩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을 갖는 것 그것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를 드릴 때에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가 무엇이라고 하였나요? 미가6:8절입니다.
“믹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공의를
행하고자 하며 인자를 사랑하려고 하며 하나님께 함께 행하려고 하면서 제사를 드릴 때에 그 제사가 의미있는 것이지,
그런 것은 상관없이 열심히 하나님께 제사만 지내려고 하면 그런 제사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제사가 됩니다. 우리도 스스로 열심히 노력은 안하면서
겉으로만 잘보이려고만 하는 자들을 싫어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그렇습니다. 마음은 상관없이 행위로만 보이려고 하는 자들을 거부하십니다.
이제 에스라가
이러한 이유로 이방여인들과의 통혼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을 때 그는 가장 해야할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에스라서는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에스라가 성전재건에 관한 이야기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들의 신앙의 삶이 재건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건축은 아무리 해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다시 무너뜨리실 수도 있습니다. 정말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인간의 삶입니다. 우리 자신이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나, 혹은 이 세상입니다. 그 대상에 관계없이 무엇이든 변화시키려고 할 때에 비로소 신앙인의 삶이 의미있게 되었습니다. 에스라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우리도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하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변화를 이루려고 할 때에 바르게 설 수 있습니다. 또한
귀한 일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변화를 위해 노력하게 만드는 좀더 궁극적인 목표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가치있는 삶의 방향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목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요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아버지 안에서 아버지의 일을 행하고 있다라고 말하십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일을 행할 때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서서히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가운데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변화를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 일을 행하면서 우리는 주님을 닮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변화를 위해 간절히 소망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주님의 사람들이 됩니다.
주님의 형상이 우리 속에 형성됩니다.
혹시 여러분은
자녀가 자신을 닮았다고 느끼는 때가 있습니까? 물론 자녀가 나쁜 일을 했을 때에는 옆에서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당신을
닮아서 저렇다고. 하지만 더 좋은 경우에 자녀가 나를 닮았구나 하는 깨달음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로서 내가 잘하는 것을 자녀도 잘해낼
때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1학년때 부모님이 학교에 오셨던 때가 기억이 납니다. 학부모 면담을 마치고 부모님을 따라서 일찍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겠느냐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그냥 수업을 마치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괜히 그렇게 하는 것이 개운치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저의 딸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집에 일찍 가겠느냐고 물으니까 우리 딸도 그러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대견했습니다. 뭔가를 중간에 그만 두는 일은 역시 우리 딸에게도 어색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닮은 구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일 때 주님을 닮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전을 간절히 사모하고 기대했던 에스라가 감당해야 일은 하나님
전 앞에서의 변화와 발전이었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일어나야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만들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열심과 그분의 형상이 우리 속에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