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교육] 45롬 1; 13-17 너희에게 가고자 한 이유2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크게보기]
45롬 1; 13-17 너희에게 가고자 한 이유2_2b
2020. 2. 16. 주. 주일오전.
*개요: 로마서 연구 [롬]1: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롬]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롬]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에 대한 이해는 신앙인으로서 우리의 삶에 중요한 지도와 같은 의미를 전해줍니다. 성경에 대한 이해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보는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자신의 삶과 아무 상관없는 지식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을 보는 힘이자 능력입니다. 여행을 가서 지도가 없으면 낭패를 보는 것처럼 인생을 살아갈 때 성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큰 곤경을 겪게 됩니다. 성경에서 비로소 우리는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집,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건강 등이 아닙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러한 것들을 원하게 되는 삶 속에서 더 중요한 다른 것이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마치 예능프로그램에서 게임을 하지만 게임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재미를 주는 것이 더 중요한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알 때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시청자를 재미있게 해야 편집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비로소 가치있는 삶이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 말씀의 중요성을 깨달을 때에 바울이 로마교회에 가고자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자신이 로마에 여러 번 가고자 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의 시민권자였습니다. 길리기아 다소 사람이었습니다. 다소는 로마시대의 주요한 도시중의 하나로서 키케로가 총독으로 지낼만큼 중요한 큰 도시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로마는 반드시 가고자 했던 목적지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 가기를 원했지만 번번히 길이 막혔습니다. 그리고 지금 로마에 보내는 편지를 쓰고 있는 곳은 고린도였습니다. 그는 여전히 로마에 도달하지 못하면서 그 간절한 마음을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롬]1: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그런데 왜 그는 그렇게 로마에 가고 싶었던 것일까요? 그곳에 좋은 휴양지가 있습니까? 그곳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곳에 숨겨놓은 재산이 있습니까? 왜 그는 그곳에 그렇게 가고 싶어 했을까요? 그는 자신이 그렇게 로마에 가고 싶었던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그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열매를 맺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로마에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딘가를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무엇 때문이지 다른 사람의 무엇 때문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곳에 감으로써 이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피하고 싶고 그곳에서 혼자 조용히 지내고 싶어합니다. 더욱 우리 자신의 무엇인가를 추구하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열매를 위해서 그렇게 로마에 가고 싶어 했다고 말합니다. 그가 이러한 것을 추구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왜 그는 그렇게 노력하고 노력했을까요? 그 비밀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 밝혀집니다. “[롬]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아 어리석은 자나 모두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능성이 복음 안에 있었습니다. 그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그는 빚진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빚진 자였고 자신이 받은 성도들의 사랑으로부터도 빚진 자였습니다. 그 빚을 갚고자 했기 때문에 그래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주고 가르쳐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복음은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자세하게 설명되어야만 하는 복음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알려주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 은혜 안에서 그가 깨달은 복음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어 풍성한 삶을 살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롬]1: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열매를 맺게 하기를 원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우리를 통해 열매를 얻은 사람이 있고 그들에게 전해진 복음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갚아야 하는 사랑의 빚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복음은 정말 중요한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맺을 수 있었던 열매는 전부 복음에 기초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아니라면 모든 열매가 무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복음에는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가는 것 이상의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복음은 바로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힘이요, 권능이었습니다.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어느 누구에게든지 적용되는 이 복음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전파자가 혹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할지는 몰라도 복음 자체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전하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복음은 듣는 저희와 그들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 사이에 관계된 것입니다. 믿는 자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였습니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또한 에스겔이 파수꾼의 비유를 통해 전파자의 사명을 확인하였고 요나가 부르심에 따라 니느웨에 구원의 복음을 전하였으며 우리가 여전히 복음을 들고 다른 사람들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능력을 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는 만 달란트 빚의 탕감을 받은 자의 감사하지 못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마]18: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마]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마]18: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마]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만 달란트는 한 달란트가 6천 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일 때 하루 품삯을 5만원으로 계산하면 3조 정도 됩니다. 이렇게 엄청난 혜택을 받은 것이 바로 복음의 가치입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이렇게 놀라운 가치가 있습니다. 그 가치를 만약 알지 못하면 그 놀라운 구원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습니다. 귀한 보물을 고물로 생각하고 팔아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게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시고 바울도 바로 그것을 알게 해주고자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능력의 충만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믿는 결심과 의지를 통해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받아서 구원을 얻는 상태에 이르게 하시는 놀라운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발견해야 합니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일은 이미 구약의 하박국서에서도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합]2: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합]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은 바로 의인의 안타까운 죽음을 슬퍼하셨던 분이고 그들이 결국에는 돌이켜서 살아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의를 더하여 주셨고 마침내 스스로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살아날 수 있게 하셨던 것입니다. 믿음은 바로 그러한 모든 하나님의 의를 따라가는 방법이었습니다. 자신의 행위보다 더 크고 더 진실하며 하나님의 능력에 감사하고 하나님의 공의에 무릎을 끓게 하는 이 놀라운 구원의 원리를 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담대히 복음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주제설교 관련글[더보기]16설교소감 관련글[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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