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교육] 43요 1; 14-18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영광2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pdf]
43요 1; 14-18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영광2_2
2017. 12. 10. 주.주일오후
*개요: 성경비전, 성탄의 의미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요]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것이라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우리가 믿음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이믿는 자들에게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는 근거는 요한복음 1장 12절 말씀입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말씀에서 우리는 믿음이 능동적인 것임을 깨닫습니다. 수동적으로 믿어지는 것, 믿어주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믿어지거나 믿어주면서 시험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시험과 유혹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할 때에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에 반드시 자신의 의지로 능동적인 결정을 내릴 때에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 됩니다. 영접하는 자들이 믿는 자들이고 믿는 자들이 영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능동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의지’를 갖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것이 단순히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 지식이 의지를 갖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식만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식과 의지에 더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감정’입니다. 감정이란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이 있습니다. 좋은 감정이 있을 때 믿음을 더욱 가지게 되고 나쁜 감정이 있을 때 믿음을 더욱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좋은 감정, 예수님께 대한 좋은 감정, 성령님께 대한 좋은 감정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속에 있습니다. 좋은 감정을 갖는 것이 정말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14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 말씀은 지금까지 이루어진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요한복음이 시작해서 지금까지 한 말은 ‘1)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그리스도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에 그의 영광스러움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자극적이거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설명과 이해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딱딱하고 단순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데 ‘2) 우리가 그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있다’ 는 것은 전적으로 지식과 이해에 근거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3)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감정’입니다. 거룩하고 신실한 감정입니다. 이러한 감정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게 됩니다. 이러한 거룩한 감정이 있을 때에 비로소 믿음이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이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없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이 믿음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의지나 지식만으로는 안됩니다. 이러한 거룩한 감정이 없으면 아무리 그의 영광을 봐도 무가치하고 무의미합니다.
어떤 감동을 받는 경험이 있습니다. 케이블 TV를 보다 보면 게임방송이나올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뭐가 뭔지를 잘 모르겠는데 진행자나 참석자들은 환호성을 지릅니다.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를 때에는 전혀 감동이 되지 않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 때 그 내용을 통해서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설명을이해하기 위해서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식이 부족합니까? 그러면 지식을 보완해야 합니다. 의지가 부족합니까? 그러면 의지를 보완해야 합니다. 감정이 부족합니까? 그러면 감정을 보완해야 합니다. 지식을 보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그 모든 일들의 의미에 대해서 배우고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고 의지를 보완하는 것은 그 일의 가치와 그로 인해서 생기게 될 결과에 대해서 이해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고 감정을 보완하는 것은 그것이 주는 기쁨과 감사함과 영광스러움을 깨닫고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감정적으로 이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보면서 그것이 영광스럽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을 느끼려면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을 열어야만 합니다. 그 마음을 닫아 놓지 않고 그 마음을 활짝 열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과 충만함을 감정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영광과 충만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을 닫아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만나는 유명인이 있을 때 그 사람이 누군지 잘 모르면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떤 좋은 감정을 갖게 되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아주 훌륭하고 유명하고 놀라운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면 좋은 감정을 갖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 잘 알고 있다 하더라도 만약 안좋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쉽게 마음이 열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유명한 연예인이 있다고 해보십시오. 내가 그를 싫어한다면 아무리 유명해도 오히려 거부하며 외면할 것입니다.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좋아한다고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속으로 좋지 않게 생각하며 그와 방향이 같지 않고 의견이 다를 때에는 반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 혹은 감정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은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목표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그 문제를 해결할 때에 비로소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15,16절은 왜 믿는 자들이 예수님께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갖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요]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여기서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언하여 외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예수님이 바로 나보다 앞선 자인데 그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보다 먼저 계신 분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그의 증거를 통해서 예수님의 충만하심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커다란 은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한 사도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의 충만하심과 그분의 영광을 알게 됩니다. 또한 세례 요한을 통해서 예수님이 만세 전부터 계신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사도 요한을 따르고 세례 요한을 따르기 때문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이고 그럴 때 우리가 알게 되는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이 나타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은혜 위에 은혜가 됩니다. 많은 증언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방향을 갖게 되는 것이며 그 증언의 끝에 알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비로소 기쁨의 감정을 갖고 영광스러움을 알게 될 때에 비로소 믿음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사도 요한을 좋게 생각한 사람이 있고 세례 요한을 좋게 생각한 사람이 있어서 그들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는 사람이 있을 때 그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분의 은혜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과 은혜로 기뻐할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어떤 사람과 그 사람을 따르는 또 다른 사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가족과 그 가족이 따르는 교회사람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서 예수님과의 독대함으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 경우가 설사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경험을 한 사람은 믿음을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더 큰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입니다. 아무런 경험도 없고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를 알지 못합니다. 지식을 쌓으나 믿음은 커지지 않습니다. 의지를 가져보지만 느낌이 없습니다. 이럴 때에는 감정이 필요합니다. 내가 따르는 사람과 그 사람이 따르는 사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비로소 감정이 시작됩니다.
사회 속에서 그러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가 신뢰하며 따를 수 있는 사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 사회의 여러 곳에 보내셨습니다. 직장에서 그러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먼저 믿는 사람들은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배려하시는 세례요한이나 사도 요한입니다. 교회에서 역시 이러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음을 이상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음을 이해하고 그 믿음을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요한도 요한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가정에도 사도 요한과 세례 요한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아버지가, 믿음의 어머니가, 믿음의 아들 딸들이 전부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돕는 하나님의 일군입니다. 삶 속에서 종종 경험하는 사망에관한 일들은 우리에게 죽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입니다. 죽으면 사라진다는 생각도 얼마나 허무한지 모릅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지만 설사 사실이라고 해도 다 사라져버린다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합니다. 죽으면 다 사라지게 되면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분명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헤어지기 싫어하고 평생 같이 있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서로간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랑을 지켜주고 이룰 수 있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 어디있습니까? 그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살리시고 구원해 주시고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분도 예수님 과 함께 거하게 되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그분과 함께 만날 수 있습니다. 그분을 중심으로 모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이나 중국을 간다 해도 우연히 만나기 어렵습니다. 너무 넓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그를 만날 수 있습니다. 서로 연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좋은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은 관계입니다. 이미 누렸던 좋은 관계를 다시 누리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좋은 감정을 갖게 하고 좋은 마음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그러한 관계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히려 우리에게 그러한 관계를 요구하십니다. 나와 더 연합하자, 내 안에 거하라, 나를 따르라, 내가 너 안에 너가 내 안에 있으면 우리는 하나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관계를 기뻐하고 따르고 소망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이 누리는 영광과 권세를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유명한 연예인을 보며 즐거워한다는 것은 그가 그의 팬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유명한 정치가를 즐거워한다는 것은 그가 같은 정치색을 띠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누굴까요? 그 사람들은 바로 그분의 은혜와 진리를 깨닫고 그분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예수님의 사람들이 추구하고 소망하며 기다리는 그 영광과 권세를 바라보게 되고 기대하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게 됩니다. 그것이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이 그냥 믿는 자들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종교로 시작했으나 마지막은 가족으로 끝이 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하고 감격하게 됩니다. 이제 마지막 구절을 읽어봅시다. “[요]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구약에는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신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은혜와 진리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신약을 통해서 얻은 것은 구약에서 주신 것에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사실 구약에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도 엄청난 영광과 권세가 있는 것이었지만 신약에서는 이보다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영광과 권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얻은 은혜와 진리는 이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놀라운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와 진리를 깨달았다는 것은 이미 그분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믿음이 큰 자들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의 영광을 기뻐하는 자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믿음이 작은 자들은 믿음이라는 것이 지,정,의의 연합으로 이루어짐을 깨닫고 필요한 부분을 보완하여 믿음을 더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감정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에는 관계를 생각해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결국 관계가 이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져서 예수님과의 관계까지 이어질 때 비로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성탄절에 나타납니다. 다가오는 성탄절은 우리 모두에게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심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시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한 시간을 통해 더욱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시간이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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