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5: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눅]15: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눅]15: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눅]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눅]15: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눅]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눅]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눅]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눅]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오늘 본문
말씀에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이 나옵니다. 그중 우리가 읽은 부분은 가장 결말적인 부분에
대한 것입니다. 스토리상 가장 마지막 내용으로서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왔고 아버지는 그로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부분입니다.전체
시작은 이렇습니다.
“[눅]15: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눅]15: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어떤 부유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이 앞으로 상속받을 재산을 먼저 달라고 하고 아버지가 그것을 주니까 그것을 받아가지고 멀리
가서 허랑방탕하게 써버렸습니다. 시간이 흘러 가지고 있는 돈이 다 떨어지자 그가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었는데 하도 배가 고파서 그 돼지먹이를 먹으면서 옛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백배사죄를 하고 그곳에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고 그에게 아무런 책망도 없이 다시 원래대로의
아들의 지위를 허락해주고 기뻐하였습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사실 겉으로는 남루해 보여도 그는 주인의 아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옷도 형편없고 가락지도
없고 발에 제대로 된 신도 신고 있지 않았지만 그러나 이제 부터는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원래 이
모든 것을 소유한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애초부터 그 주인은 둘째 아들을 사랑해서
자신의 모든 소유 중에서 반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가 돌아왔을 때
주인은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옷과 가락지와 신발만 준 것이 아닙니다. 주인은 다시 그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주려 합니다. 또한 그를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자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눅]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그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입니다. 우리가
애초에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다면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시지도 않고 온다고 해서 반기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마을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었던 이유는, 남루한 옷차림에 저벅저벅 걸어오는 사람을 단박에 알아보고 뛰어
갔던 것은, 그가 바로 자신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갈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 이유는 새롭게 하나의 자녀를 얻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원래 하나님의 자녀였는데 그 자녀를 다시 찾게 되어서 기쁜 것입니다. 주님은 그 기쁨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눅]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원래 그
아들은 함께 있던 아들이었지만 죽었었으며, 원래 그 아들은 늘 같이 있던 아들이었지만 잃어버렸었습니다. 그랬다가 다시 살아났고 다시 얻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뻐하였습니다. 또한 그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주인의 종들도 함께 즐거워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정말 한 영혼이라도 주님을 믿게 되기를
바라고 그 한 영혼이 주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이유는 그가 원래 하나님의 자녀였으며 하나님 안에 있던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를 다시 찾으셨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는 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종으로서 기뻐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쁨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작은 타락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 둘째 아들이 했던 일은 돼지를 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여정도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15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를
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돈을 다 탕진하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때 죽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든지 가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돈을 잃고
곧바로 아버지에게 오지 않았습니다. 자존심이 있어서 가능한 자립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돼지를 쳤습니다. 하지만 그가 유유자적하면서 스스로
만족하면서 돼지를 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 일을 하면서 괴로웠고 그 일을 하면서도 배가 고팠습니다. 급기야 이 아들은 돼지의 먹이라도 먹고자 했습니다.
“16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그가 먹으려고
했던 쥐엄열매는 말 그대로 돼지들이 먹는 열매였습니다. 그것을 사람이 먹으려고 했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처량합니까?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마저도 배불리 먹을 수
없었으니 지금은 아버지께 돌아왔던 이 아들이 과거에는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는 비참하고 불쌍한 자였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와 자녀의 축복과 자녀의 영광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이 먹는 열매로 그 배를 채우고자 할 때 그 모습은 너무나 처량하고
불쌍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이지만 세상 사람들을 따라하고자 합니다.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을 따라하고자 하고 그들이 취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것을 본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한번 사는 삶이기 때문에 그들의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이세상에서 잘먹고 잘살아야 합니다. 또한
이세상에서 편하고 행복하고 즐거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으면서 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영생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에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얼마나 이해가 됩니까? 세상 사람들이 먹는 열매는 바로 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쥐염열매가 돼지들이 먹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것을 위하며 살아갈 때에 생깁니다.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고 불쌍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결코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을 채울 수 없습니다. 항상
허전하고 항상 부족합니다. 그것을 아주 충분하게 줄 수 있는 세상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것을 원한다는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직 아버지 안에 있을 때에만 그 영광을 누릴 수 있습니다. 원래 세상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자녀 중의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령있게 이 사회에 적응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은 다 잘 적응하는데 왜 적응을 못하느냐고 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먹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먹는 열매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서 삽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진정한 양식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자신의 존재도 깨닫게 됩니다. 탕자도 바로 그것을
깨달았었습니다.
“[눅]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눅]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눅]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비록 아버지께
나아가려고 하면 죄인임을 고백해야 하지만 그것이 당연한 일임을 깨닫고 그래야만 하는 것임을 이해할 때에 그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죄의 고백을 피하려고 하니까 끊임없이 도망다녀야 했지만 죄를 인정하고 그 고백을 하려고 한다면 비로소 도피행각은
끝이나고 죄를 달게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바로
우리도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나의 죄임을 고백할 때에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다 용서해
주시니까요. 다만 자신이 죄인이었음만 고백하면 됩니다.
문제는
그러지 않으려고 할 때에 생겨납니다. 주님은 의인을 위해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죄인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는
죄인임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종으로서의 죄인이건, 아들로서의
죄인이건, 딸로서 죄인이건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죄인입니다. 이 아들은 바로 그것을 깨달을 때 아버지를 향해 걸어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비참한 상태가 되기 전에 이 아들은 어려움과 문제 속에 있었습니다. 애초에 그는 아버지에게서 자신에게
상속되는 재산을 받아서 먼 나라로 떠났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급속하게 망했습니다.
“13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자기 마음대로 즐거움과 쾌락을 쫓아서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단지 먼나라로 간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서 떠난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생각과 기준과 뜻과는 정 반대로 살았습니다. 그렇게
어리석게 살 때 친구들은 더 늘어났을 것이고 그를 떠받들어주는 사람들은 더 많아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도 자기가 재산을 점차 허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결국에는 그 모든 재산이
다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라에 풍년이라도 들었으면 인심좋은 사람들에게 얹혀서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마저도
가능하지 않고 완전히 궁핍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에게도 도움을 얻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실 이
모든 어려움과 환난이 아니었다면 그는 자신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허비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부유한 상태가 아니라 궁핍한 상태임을 자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비로소 아무에게서도
도움을 받지 못했을 때 그 자신이 정말 완전히 망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대개 자기가
완전히 망했음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속에 있는 모든 환난과 어려움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을 정신 차리게 하는 다행스러운 기회와 계기가 됨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그속에서 더욱 좌절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자신에게 있는 고통과 괴로움이 정말 얼마나 절묘한 타이밍인지를 못 깨닫고 있습니다. 건강상의 어려움이, 경제적인 압박감이, 인간관계적인 갈등이 자신의 위치를 돌아보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가를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동기가 될 수 있지만 그 상태에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려고 하고 하나님께로 나아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 더욱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미워하며 하나님께 분노하며 그분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할 때 그 모습은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며 하나님을 슬프게 만드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자신을 배반하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34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께 베드로에게 원하셨던 것은 나를 배반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비록
자신을 배반하더라도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형제들을 굳게 하시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도 죄악을 저지를
때가 있습니다. 악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과 괴로움을 겪습니다. 정신적인 것이기도 하고 육신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 어떤 것이든지 그 속에서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우리의 모든 삶속에 소망이 생깁니다. 결국 베드로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가 자기를 찾아오신 예수님께로
나아왔을 때 비로소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할 때 주어진 모든 환난과 고통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재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받는 것이 아닌
내 것으로 받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기 보다는 하나님과는 떨어진 독립적인 한 개인으로 만듭니다. 그속에 죄성이 생겨나고 사탄이 유혹하여 우리의 형편을 더욱 악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청을 들어서 그에게 자신의 살림을 나누어 주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죄성을 알고 계시지만 그 어리석은 노력을 억지로 제지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주님은 처음부터 우리를 용서할 준비를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용서를 통해 다시 돌아오는 주님의 자녀들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기뻐하십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 자녀들을 그 뜻대로 하게 허락해 주시는 이유는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눌러서 함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스스로 돌아와 함께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받아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가 지금도 앉아있습니다. 그분으로부터 떠나려는 것이 아니라
그분으로 더욱 나아가려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비록 지금은 떠나려 한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돌아오게
될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아예 지금부터 주님께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길을 돌아와
주님께로 나아갈 수도 있지만 지금 이자리에서 더욱 주님께 나아가 주님의 자녀로서의 기쁨과 영광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