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 사회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희생으로 인해서 우리는 평안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현대사의 격동기 속에서 희생적으로 나라를 지키신 분들의 노력속에서 그 순국선열들의
존재합니다. 나라를 적들에게 팔아버리는 자들도 있었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애썼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희생적인 사람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다시한번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죽으셨던 예수님의 희생과 고통을 생각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애국자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이렇게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다시한번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비방하고 모욕하며 죽이는
자들에 대해서 저항하며 반격하고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자신의 생명을 취하는 그들에게 그분은 자신의 몸을 맡기셨습니다. 그
당시에 자신을 죽이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주님은 죽으셨습니다. 과거에 주님이 오심을 믿고
죽었던 모든 사람들과, 후대에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될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 주님은 죽으셨습니다. 2012년에 살고 있는 우리가 ‘주님은 바로 내 죄때문에 죽으셨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잠잠히 죄악의 희생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고통받았던 자들은 그 시대에 타협하려고 하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주어지는 강압에 순순히 굴복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어떠한 회유나 설득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인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래서 더욱 탄압받았고 고통받았으며 고문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살아나려고 발버둥치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한순간이라도 더 살기를
바랬다면 애초에 저항하지도 않고 조용히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우리 민족이 얼마나 일제의 강압과 강점에 괴로워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그렇게 우리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죽어간 사람들, 이름도 빛도 없이 죽어간 그들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의 ‘희생’을 너무나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모습은 우리
가까이에서 예수님처럼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예수님의 희생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우리가 있는 교회에 바로 예수님의 희생을 따라서 그 모습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편안히 안정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입니다. 매주 교회를 청소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헌신과 노력을
통해 우리는 예배를 깨끗한 곳에서 드릴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주 식사준비를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서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해서 말없이 그주에 모든 성도들을 먹입니다. 또한 그렇게 우리가 교회를 세우고 지금까지 정성스럽게 음식을 해서 성도들을 먹였던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교사로
간사로 리더로 순장으로 학생들과 청년들과 장년들을 섬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미리
공부하고 준비하고 쉬지 못하고 밤을 지새워가며 말씀준비를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줍니다. 또한 그렇게
교회가 세워진 이후로 조금도 쉬지않고 여러분을 먹이고 말씀으로 가르쳤던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곁길로
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길로 은혜의 그 길로 나가도록 돕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건 그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냐고. 그것이
어떻게 순전히 우리들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이냐고 말합니다. 또한 해도 그것밖에 못하냐고 합니다. 왜 더 잘하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그렇지만 어떠한 혹평과 무시와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꾸준히 끈질기게 그 일을 할 때 그 이유는 오직 그와 같은 입장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예수님에
대해서 그 세대는 생각하기를 그가 곤욕받는 것은 그가 심문받는 것은 그리고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지는 것은 자기 허물 때문이지 자신들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죄목은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그 죄목을 보면서 사람들은 혀를 찬 것입니다. ‘그러게 왜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느냐?’ 그것이 오직 그
세대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희생하는 사람들이 더이상 ‘교사’나 ‘간사’나 ‘리더’나 ‘순장’이 아니고, ‘집사’나 ‘권사’나 ‘장로’나 ‘사모’가 아니고 ‘목사’가 아니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로 사람들을 위한 집사였고 권사였으며 장로였고 사모이자 목사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그들을 부르셨고 그 죄를 대신 감당하도록 그래서 곤욕과 심문과 고통 당하라고 부르셨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직분자들이 이일을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더 가까이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희생의 모습을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교회에서 희생하는 자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어쩌면
아직도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모습은 여러분의 삶과 멀리 있다고 느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주변에서 찾아 보십시오. 주변에서 가장 희생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제일 고통받으며 인내하며 슬픔을 당하지만 가장 인정받지 못하고 가장 무시당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렇게 가장 고통당한 자보다 더욱 더 고통당하신 분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그렇게 나타납니다. 그 희생은 단지 고생하고 힘들고 괴로워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귀한
희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당하였고 비난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그토록 우리를 생각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는데 우리는 예수님을 그렇게 까지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항상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보다 왜 세상의 영광이 세상의 유혹이 더 우리에게 중요하게 보여지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묻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시지만
그분을 살아계시는 분으로 보지 않고 죽으신 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그분은
강포를 행지 않으셨고 궤사도 없으셨지만 우리는 그분을 묻어버렸습니다. 그 무덤을 악인과 함께 두던 부자와
함께 두던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어쨌든 묻어버렸는데! 주님은
살아계시지만 우리에게 주님은 죽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여전히 사랑해주고 계시지만 우리는 단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말입니다. 그것에 대해 내세우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여전히 우리에게 불편함과 괴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신다면 유익을 주시고 편안을 주시고 쾌락을 주셔야 하는데 그런 것을 주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님을 묻어버리고 있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죽으셨습니다.
그토록
괴로운 십자가의 모든 고통과 심문과 모욕과 저주를 받으셨던 예수님이 결국에 이루신 일은 무엇인가요? 그렇게
희생하셨던 예수님이 그 희생을 통해 마침내 이루셨던 일은 무엇인가요?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희생당하신
예수님을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사실 그렇게 예수님이 상함을 받는 것은 예수님이나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그 죄를 감당해야 했기에 누군가는 그 악함을
품어주어야 했기 때문에 누군가는 더 아프고 괴롭고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씨를 보게 됩니다. 자신처럼
그렇게 희생하는 예수님의 사람들을 보게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를 용서하셨고 그 용서하심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자들이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비로소 깨달으며 영원토록
예수님의 은혜를 고마워하며 감사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날은 영원합니다. 그로 인해서 세상을 사랑하사 구원하시려고 하시던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습니다. 그 용서의 은혜는 너무나 큰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깨닫게 될 때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용서받은 자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다시 죄를 짓는 삶이 아니라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삶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로 진정한 용서의 은혜를 누릴 때 우리는 전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한 우리의 변화를 예수님은 기뻐하십니다. 11절을 보십시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하나님은
이것을 예수님께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이루셨습니다. 또한 후대에 태어난 우리에게도 약속해주십니다. 여전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을 만족하게 여기시고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백성들을 위해서 그들을 의롭게 하고
그 죄악을 씻기신 구세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죄로 인해서 우리는 죄값을 치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애초에 구원을 기대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용서하심으로
인해서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를 깨달을 때에 그로 인해 비로소 놀라운 변화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모든
변화는 우리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나타내 보여 주며 가르쳐 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하심’을 기억하며 그 희생을 온전히 실천하여
여러분의 삶 속에 놀라운 의로움과 놀라운 죄사함과 그로 인해 놀라운 기쁨이 넘쳐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