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를 아십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께서 모르는 자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를 모두 아십니다. 그래서 그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묻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나아오는 자에게 주님은 ‘내가
너를 불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47…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예수님은
딱 보기에 용모가 이스라엘 사람 같아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혹은 듣기 좋으라고
넘겨짚거나 추측하거나 하신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전부터 그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그를 알고 계시다는 것을 그 자신은 알지 못했던 것 뿐입니다.
나다나엘은 자신에 대해서 예수님이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되물었습니다.
“48…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오래 전부터 그를 주목해서 보고 계셨다는 것이었습니다.
“48…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예수님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오기 전부터 나다나엘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부터 그를 보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화과 나무 아래는 산책과 묵상을 하기에 좋은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그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묵상을 하기도 하고 기도를 하기도 했는데, 나다나엘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는 그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자를 간절히 바라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메시야, 그리스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사실 그랬기 때문에 빌립이 예수님이 바로 그 그리스도시다라고 말했을 때부터‘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면서 거부를 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 있었고, 그리스도는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는 예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사실 베들레헴에서 나셨다가 나사렛으로 이주하신 것 뿐인데
그러한 사정을 모르는 나다나엘은 처음부터 거부를 했던 것 뿐입니다. 이러한 나다나엘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과 기다림과 또한 그의 잘못된 오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말입니다.
우리도
어쩌면 주님이 어떻게 나를 알까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를 때, 주님을 찾을 때, 주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우리와
아무 상관없으실 것 같은 예수님이 우리를 알고 계시는 이유는 예수님도 우리의 고민과 괴로움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이러한
무관심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하면, ‘하나님이 나좀 사랑하지 말라고 하세요’라는 대답만 듣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여러가지 시련을 겪고 많은 어려움을 만나고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헤메이다가 다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듣게 되면 그 사랑의 귀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하나님, 저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예전부터 너의 고민을
알고 있었단다.’
나다나엘과
예수님의 관계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전부터 나다나엘을 알고 계셨으면 왜 그를 부르지 않으셨나요? 왜 그에게 찾아가서 ‘사실은 베들레헴이 내 고향이다’라고 말하지 않으셨나요? 그러나 사실 예수님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은 나다나엘 그 자신이었습니다. 항상 예수님에 대해서 들으면서도 ‘그는 나사렛 사람이야 그는 나사렛 사람이야’ 말하면서 예수님에게서
도망친 사람은 바로 나다나엘 그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도‘예수님은 외국인이야’ 하면서 멀어졌고, ‘예수님은
나의 고통을 몰라’라고 하면서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랬던
우리를 예수님께서는 붙드셨습니다. 멀어져 가는 우리를 붙잡아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분의 사람들을 보내서 우리를 붙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도함을 받아 여기까지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자리에 앉아서 예수님이 바로 우리를 알고 계시다는
이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주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이제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다나엘도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깨우치신 빌립을 통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이러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로소 주님을 받아들였습니다.
“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나다나엘은
자기의 의문이 풀려서 예수님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의심이 많았지만 신뢰할 만한 친구인 빌립을 따라가서
예수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야요, 진정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때가 바로 그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나다나엘이 가지고 있던예수님에 대한 오해가 풀리고 예수님이 오랫동안 보시던 나다나엘이 비로소
예수님을 고백하게 된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50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예수님을
믿게 되기 까지의 과정이 무척 흥미롭고 은혜롭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래서 주님을 계속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더 큰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주님을 만나게 되었는가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에 그렇게 주님을 만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도 중요합니다. 과연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더 큰 일’을 본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51절입니다.
“51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기도와 그에 대한 응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기도를
가지고 인자에게 가고 인자에게서 그 응답을 받아서 내려와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의 하늘이
열릴 때 보여집니다. 그리고 그 기도와 응답을 경험할 때에 나타납니다.
나다나엘은 단지 예수님에 대한 오해의 해결이나 예수님의 그에 대한 이미 알고 있으심만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를 때에 나타나는 날마다의 기도와 그 기도의 응답으로 예수님이 살아계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바로
그러한 기도의 응답을 보게 될 것이었습니다.
인자 위에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사다리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야곱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유산을 받으려고 하다가 형 에서 에게 들켜서 집에서 도망나왔습니다. 애초에 어머니 리브가는 아버지가 큰 형 에게 좋은 것을 주고 작은 아들에게는 나쁜 것을 줄 것 같아서 앞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에게 형처럼 하고 가서 축복을 받게 했습니다. 아버지는 형의 행세를 하는 야곱을 진짜
큰 아들로 착각했습니다. 그리고 축복을 주었는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모든 축복을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편애가 너무 심했던 것입니다. 이후에 들어온 형은 동생이 자신을 속인 사실을 알고 그러면 야곱에게 줄 축복이라도 자신에게 달라고 하니까, 아버지는 더이상 줄 축복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눈이
뒤집혀서 야곱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복잡하고 심각한 가정문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집을
떠났던 야곱은 하란으로 가는 길에서 밤중에 돌을 베개삼아 누워 자다가 꿈에 바로 이 사닥다리를 보았습니다.
“창28:12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13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그리고
야곱은 잠에서 깬뒤 자기가 본 그것을 믿고 그때부터 하나님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무사히 다시 돌아오게 해달라고,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나다나엘도
고민과 혼란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의 이름이 바로 ‘바돌로메’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러한 믿음의 기회 속에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고 주님을 만난 그 만남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그 만남의 끝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 있었습니다. 그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영광은 하나님의 나라가 위대하고 큰 만큼 함께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말세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가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말씀의 근거는 항상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 말씀을 믿기 위해서 사탄에게
가서 다시 확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 선하고 올바르시며 의로우시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도
신뢰할 만한 유일한 근거가 되십니다. 그 말씀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알려주셨습니다.
“[계]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계] 21: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계]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계] 21: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계] 21: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계] 21:14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그 영광
속에는 십이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고 그 이름중에는 바로 바돌로매(나다나엘)의 이름도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기둥이 되고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쭉 걸어나가면 하나님의 나라에 도달하게 되는 그길에 우리가 들어선 것입니다.
저의 딸이
읽는 이야기 중에 ‘손오공’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래 저의 딸은 ‘만화 손오공’을
먼저 읽고 나서 그 다음에 진짜 ‘손오공’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손오공 이야기에는 손오공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말썽꾼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저의 딸이 깜짝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아니 손오공이 이렇게
나쁜 애였던 말이야?’ 원래는 그랬지만 삼장법사를 따라가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보다 더 비교할 수 없는 예수님을 따라나가고 있습니다. 그럴 때 더 큰 영광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길에 동참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놀라운 응답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이 놀라운 일이 바로 우리
모두에게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