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가정] 1창 4; 9-12 형제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동행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
1창 4; 9-12 형제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동행_1
2019. 9. 8. 주. 주일오전.
*개요: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12가정-55동행, 3분석, 1오경 [창]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범죄를 했을 때 비로소 올바르게 이해되었습니다. 그들이 범죄하기 전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실천했다면 생명나무의 의미를 충분히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을 이루어 연합하라고 하신 말씀을 잘 순종했다면 아담의 고백대로 아담과 하와는 서로에게 항상 뼈 중의 뼈가 되고 살 중의 살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선악과를 먹고 범죄하여 죄인이 된 다음에는 자신들이 지켜야 했던 하나님의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고 얼마나 필수적인 선이었는지를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죄를 지은 다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죽기 전까지 우리는 죄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면서 살아야 하고 부부는 둘이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방향과 의미를 찾아갈 수 있습니다. 죄 가운데 있더라도 그것을 깨달을 때 이후의 삶이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의 방향이 생긴다면 더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더 이상 표류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가정 내의 부부관계가 그렇다면 형제관계는 어떨까요? 인류의 첫 번째 사람이 아담과 하와였을 때 그 두 번째 사람은 가인과 아벨이었습니다. 물론 아담과 하와의 자녀가 가인과 아벨이었기 때문에 자녀관계가 있었지만 성경에서 가인과 아벨에 대해서는 자녀관계에 대한 설명보다 형제관계에 대한 설명이 더 자세히 나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인이 아벨에 대해서 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죄를 저지른 모습을 통해서 원래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선이 무엇이었는가를 아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죄를 저지르기 전에 미리 그 선을 알았더라면 좀더 많은 선을 이루고 좀더 적은 악을 저질렀겠지만 아쉽게도 인간은 어리석어서 항상 그 중요한 것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면을 생각하면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나서 형제관계에서 무엇을 깨닫게 되었는지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 말씀은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찾아오신 장면입니다. “[창]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가 어디 있느냐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이 들에 있을 때에 아벨을 죽여서 묻어놓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담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고 자신이 받은 땅에 대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자신이 소득을 얻는 땅에 감추어서 묻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죄도 알고 계셨고 가인의 죄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아벨이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가인은 자신이 아벨을 죽였지만 거짓말하면서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되묻습니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고 거짓말하기 위해서 이러한 말을 하였지만 사실 그 말속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형제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동생에 대해서 형에게 물으셨고 형은 동생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동생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으려면 그는 자기 동생을 말 그대로 지키는 자이어야 했습니다. 동생을 돌보고 사랑하며 지키는 자일 때 비로소 그는 동생에 대해서 물으시는 하나님께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습니다. 그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다’ 등등 동생을 찾으시는 하나님께 동생에 대해서 말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동생의 존재를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동생과 형과 이미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들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다. 그들에게 관심이 있으시고 사랑이 있으십니다. 오직 가인이 아벨과 함께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돌보는 자였어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형제관계는 서로 지켜주고 돌보는 관계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가인과 아벨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인과 아벨에게는 각각의 의미와 가치가 있었습니다. 가인의 이름의 뜻은 ‘얻음’이고 아벨의 이름의 뜻은 ‘호흡하다, 숨쉬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아담과 하와에게 자녀로 허락하셨고 각각 농사를 짓는 사람과 양을 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과 은혜를 주셨기 때문에 이 둘은 하나님께 특별한 존재였고 하나님은 이 둘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가인이 아벨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아벨을 지키는 자임을 거부하고 아벨을 죽였을 때 아벨은 세상을 떠났고 가인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습니다. 만약 가인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올바른 관계의 모습을 잘 나타냈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계속해서 사랑하시고 함께 하셨겠지만 그러한 뜻을 거부하고 악을 행했을 때 자신이 동생에 대해서 얼마나 악을 행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도 하나님께서 인생의 삶에 주시는 모든 형제, 자매 관계 속에서 성도들은 그분이 자신들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같은 가족으로 형제, 자매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에 대해서 지키는 자이고 돌아보는 자이고 함께 있는 자이며 하나님께 그에 대해서 말해야 하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어떤 부모가 언니나 오빠나 누나에게 남동생이나 여동생을 맡겨 놓고 잠깐 밖에 나가면서 동생 잘 돌보게 했는데 그가 자기 노는 일에 바빠서 동생에게 신경쓰지 않고 있다가 동생이 다치거나 잃어버리거나 죽거나 하기라도 하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미어지겠습니까? 또한 그럴 때 ‘내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인가요?’ 라고 반문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하는 악하고 패역한 모습이겠습니까? 이미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아벨에 대해서 조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아벨에 대해서 죄된 마음을 품지 말라고 미리 일러 주셨습니다.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지만 그 죄를 다스리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동생 아벨에 대해서 죄를 참지 못했고 결국은 동생을 때려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랬을 때에 하나님의 심판은 가인에게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내용 속에 형제관계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받는 벌이 무엇인가가 나타납니다. 10, 11절입니다. “[창]4: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하나님은 그가 한 일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라고 하시면서 아벨이 비참하게 죽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죄 많은 인간은 보이는 대로 가해자 중심의 사고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피해자의 고통과 괴로움은 주목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 피해가 눈에 보이는 상태로 존재하지 않을 때에는 중요하게 여겨 지지도 않습니다. 눈에 보여도 무시하고 눈에 안보이면 더더군다나 무시하면서 가해자 중심의 판단과 평가를 할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십니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고통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호소하는 것을 들으십니다. 또한 땅이 그 입을 벌려 가인의 손에서부터 아벨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때려서 아벨의 피가 흘러 땅에 흐르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그 모든 순간 순간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쌓이고 쌓여서 저주가 되었습니다. 그 저주는 그냥 생긴 것이 아닙니다. 가인의 손이 아벨의 피를 흘리게 할 때마다 쌓여서 그렇게 저주가 되었습니다. 형제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소한 일들을 형제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좋았든지 안좋았든지 싸울 때도 있고 재밌게 지낼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의를 이루고 선을 이루는 것이라면 축복이 쌓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악을 이루고 불의를 만들었다면 저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부모님과 함께 하는 시간보다 형제와 함께 하는 시간이 더 많을 것입니다. 더 나이가 들어서 부모님이 돌아가신 다음에라도 형제자매 관계는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그 손으로 행하는 악으로 인해서 형제와 자매의 마음에서 피눈물이 떨어질 때에 그것은 얼마나 자기 스스로에게 저주를 쌓는 일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가인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가인이 스스로 만든 저주가 따로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심판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 저주는 바로 가인 자기 자신이 행한 모든 악이었습니다. 그 악이 저주를 만들고 그 저주가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을 부르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살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가인도 그 가족과의 관계가 파탄이 났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도 파탄이 났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가족과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주가 쌓이게 되고 그 저주로 인해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 말은 자신이 행한 일과 상관없는 저주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정확히 자기가 하는 일이 악할 때 저주가 일어납니다. 가인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가인의 악함에 대해서 저주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저주에 쌓인 가인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것이었습니다. “[창]4: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고 땅은 그의 기업이었으며 그는 제물도 땅의 소산으로 하나님께 드렸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땅에서 아벨의 피를 흘렸고 그로 인해서 땅에서의 저주를 받게 되었으니 더 이상 땅은 그 효력을 그에게 주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이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게 하셨습니다. 아담은 하와와 연합하지 못했던 그 자신의 범죄로 땅의 비옥함이 사라지고 척박함만 남게 되었고 가인은 아벨을 지키지 못했던 그 자신의 범죄로 인해서 땅에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생을 지키지 않으려는 그에게 아무 것도 지킬 수 있는 것이 없게 하셨고 결국은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땅에 거하여 흔들리지 않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지키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잘 지키는 자가 된다면 하나님의 축복을 얻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인생을 보고 가인과 아벨의 인생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인간에게 가정을 주신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결국 한 사람에게 남는 것은 세상에서의 업적이 아니라 가정에서의 삶입니다. 그 속에서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하심을 따르고 형제를 지키는 자로 살아가게 하실 때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과도 연합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도 어떤 식으로든 지키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해오는 일이라서 크게 의미를 못 느꼈지만 이런 일들의 중요성은 그렇게 살지 못할 때 새삼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부부관계에서는 난이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결국은 둘이 한 몸을 이루기 위한 고충과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을 수 밖에 없습니다. 형제관계에서는 형이든 동생이던 형제 자매 관계에서는 누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서로를 지키는 관계임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살면서 학교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을 할 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켜보시는 그 동행하심을 가족들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어렸을 때의 형제 자매가 나이 들어서도 형제 자매인 것처럼 어렸을 때 그 형제관계에 동행하시던 하나님께서 나이 들어서 죽기 전까지 형제관계에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 형제는 어디있느냐? 그 부르심을 외면하는 자가 되어서 또 다른 피와 저주를 부르는 자들이 되지 말고 지금부터 하나님의 뜻을 잘 따라서 그로 인해서 모두를 구원하시고 모두를 하나님 나라에 인도하기를 원하셨던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기억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삶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후회할 것이 없는 자가 되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고자 다짐하시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과 축복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주제설교 관련글[더보기]16설교소감 관련글[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