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충만] 55딤후 1; 7-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과 세우신 것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
55딤후 1; 7-11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과 세우신 것_1
2018. 8. 12. 주. 주일오전.
*개요: 믿음 속에서 성도에게 채우신 것, 56충만, 6서신서, 4극본 [딤후]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딤후]1: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딤후]1: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하나님께서는 놀라우신 그분의 은혜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 은혜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받기를 바라고 또한 은혜 받기를 바라기 때문에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지만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각자 마다 생각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감정의 자극을 은혜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욕구의 충족을 은혜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뭉클한 감정 속에서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을 은혜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자신의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 것을 은혜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은혜는 진짜 은혜가 아닙니다. 진짜 은혜가 아니기 때문에 진짜 열매가 생기지 않습니다. 진짜 씨앗을 심어야 진짜 열매가 나오는데 가짜 씨앗을 심으니까 가짜 열매가 나올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진정한 은혜를 구별해 내야 우리는 진정한 삶의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합니다. 좋은 요리사는 음식만 잘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좋은 재료를 구별할 줄 압니다. 그는 나쁜 재료로는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통기한이 지났거나 상했거나 해로운 재료는 피합니다. 그리고 싱싱하고 건강에 좋고 영양가 있는 재료를 사용합니다. 그럴 때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도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감상에 빠지게 하거나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고착화 시키는 은혜는 사실 은혜가 아니라 자신의 착각이었을 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말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진정한 은혜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딤후]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모든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무엇인가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입니다. 여기서 ‘능력과 사랑과 절제’라는 것은 모두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의지적인 모습입니다. 능력을 행하는 것과 사랑으로 대하는 것, 그리고 모든 유혹에 대해서 절제하는 모습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마음입니다. 진정으로 은혜를 받은 자들은 이렇게 되어져야 하고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대비는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처한 현실과도 동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창조의 명령을 주셨고 그 창조의 명령 속에서 그들은 ‘충만하라, 다스리라, 정복하라’는 말씀에 따른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은 사탄의 유혹도 받았고 사탄의 유혹 속에서 ‘의심, 두려움, 불신’의 상태에도 이르렀습니다. 이 둘 중에서 과연 무엇을 선택했어야 하는가라고 한다면 당연히 창조의 명령을 따랐어야 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항상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며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사탄의 유혹을 따라서 ‘두려움’을 따랐을 때에 그들은 ‘선악나무의 열매’를 먹는 죄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따를 것인가, 혹은 능력과 사랑과 절제를 따를 것인가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 고민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를 따를 때에 우리는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것은 고난을 감당하는 일입니다. “[딤후]1: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은 능력과 사랑과 절제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주를 증언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또한 그 일을 하다가 갇힌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그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디모데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럴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었습니다. 복음과 함께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난이 있을지도 몰라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은 진정한 구원이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을 따라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진 구레넷 사람 시몬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처음에 타의에 의해서 억지로 십자가를 졌습니다. “[막]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구레네 사람 시몬은 군병들에 의해서 처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 시몬을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묘사했겠습니까? 시몬의 아들이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것이 왜 중요하겠습니까? 사실은 그 이후에 그가 복음 안으로 들어와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의 자녀들이 주의 형제들과 함께 있으면서 복음에 연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구레네 사람 시몬을 묘사할 때 더 잘 알려져 있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 묘사한 것입니다. 특별히 루포에 대해서 로마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롬]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지던 경험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고난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자원하였습니다. 그럴 때 그의 아내가 그의 자녀들이 모두 복음 안에서 성도들과 사역자들과 서로 연합하는 귀한 삶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은혜를 받았을 때 깨닫는 것은 ‘복음과 함께 하는 삶의 가치’입니다. 그 은혜로 나아갈 때 얻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은혜로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또한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가려고 합니다. 남편을, 아내를, 아들을, 딸을, 어머니를, 아버지를 데리고 들어옵니다.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귀함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힘들고 어렵고 귀찮고 번거로움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을 감수하고 얻는 것이 더 크고 놀라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아파트 분양 행사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통체증도 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탓에 여러 가지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시세차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러한 기대심리가 불편함을 무릅쓰더라도 분양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아파트 보다도 더욱 영광스럽습니다. 아파트에 당첨되면 고작 시세차익이나 분양 평수 만큼의 유익을 볼 뿐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이익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함께 하게 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9, 10절에 그분의 의미가 나타납니다. “[딤후]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1: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거룩한 소명으로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인해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 은혜의 부르심이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인해서 나타났습니다. 복음을 전파하시고 우리가 그 복음을 받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일에 우리를 부르셔서 복음으로 전하시고 생명과 썩지 아니할 영원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과 존귀를 드러내십니다. 에덴 동산보다 훨씬 더 좋은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펼쳐졌습니다. 이전에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계속 살 것인가 떠날 것인가를 고민했었지만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떠날 것인가 아니면 이 죄악 된 세상에서 계속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는 계속 사는 것이 좋고 떠나는 것이 나쁜 것이었지만 지금은 떠나는 것이 좋고 계속 사는 곳이 나쁜 것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두려움과 불신과 의심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를 떠날 수 있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난 복음을 붙들고 우리가 바라보는 바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의지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이것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그 은혜를 따를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반대로 은혜가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는 은혜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은혜가 아니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혀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생각을 못하고 고난을 감수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여전히 현실유지에만 신경을 쓰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하나님이 주셨던 진정한 은혜는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디모데후서가 옥중에서 쓰여졌지만 다른 옥중서신들인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처럼 옥중서신으로 분류되지 않고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가 따로 목회서신으로 분류되는 것은 다른 서신들은 1차투옥에 쓰여졌지만 이 성경은 2차투옥 기간에 쓰여졌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속에는 목회에 필요한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모든 은혜는 하나님의 사역과 목회의 현장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일하시며 또 다시 은혜를 베푸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이전의 교회모습이 부족했다 하더라도 주님은 여전히 일하시며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이전에 실망하고 상심하며 두려움이 있더라도 다시 그 일에 동참하며 연합하고 힘을 다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지금 우리의 삶 속에도 디모데에게 있던 어려움이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되었고 복음전파자의 삶은 늘 갇히기만 합니다. 교회는 늘 어렵고 힘들며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은 괴롭고 힘든 일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고생은 나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이 고생을 하게 하지 않으려고 교회에 나오지 않게 하고 가족들이 교회 나오게 되는 고난을 가능한 피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신경을 많이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능한 교회 이야기는 하지 않고 기도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 성경 읽는 모습도 숨겨가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배려하고 신경 쓰면서 결국 이루기를 원하는 것은 고난에 참여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냥 이 세상을 살면서 가능한 행복하고 자유롭고 눈치 볼 것도 없고 의식할 것도 없이 살게 되기를 바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그것은 너무나 고난스러운 일입니다. 교회 일에 참여해야 하고 교회에 가족들을 데리고 들어와야 하며 교회를 아는 사람에게 소개해야 하며 교회에 오는 모든 사람들을 감당해 내야 합니다. 또한 교회의 시스템을 받아들여야 하며 교회의 비전에 동참해야 하며 교회의 악순환과 교회의 인적, 물질적, 사역적인 부족함조차도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인근의 고급주택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이런 데 사는 사람들은 교회에는 나가지 않을거야. 그 사람들이 뭐가 부족해서 교회에 나가겠어’ 하지만 그러한 부요함은 단순히 경제적인 부요함에 그치지 않습니다. 정신적인 풍요로움과 확고한 개인적인 신념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이 시대에 교회에 나가며 목회에 동참하는 고난은 감수하지 않으려고 할 공산이 큽니다. 그렇다면 그와 반대로 동일한 이 시대에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왜 나갈까요? 목회에 동참하는 고난은 왜 감당할까요? 저 자신도 생각해 봅니다. 제가 만약 목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저는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하고 있을까요? 아마 어떤 교회에서든지 열심히 교회에 동참하며 목회적인 수고를 감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세우심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되기 그 이전에도 주일학교 교사였고 청년부 회장이었으며 성가대 단원이었고 교회의 일이라면 언제든지 발벗고 나서서 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바로 그러한 이유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고자 하며 지금 이날 이 때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딤후]1: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우심을 입었습니다. 스스로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세우심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의 유명한 성경교사 중의 한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새로운 부르심을 받고 선포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현재 위치에서 교회와 목회사역에 세우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고난이 기쁘고 감사하며 영광스러운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집사나 장년이나 청년이나 학생에 이르기까지 복음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를 복음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런 점을 알기에 복음에 동참하지 않으려고 은혜를 일부러 받지 않으려고 한다면 복음에는 성공적으로 동참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리스도의 가신 길을 따라 나가려는 자들이라면 그 복음에 동참하고자 하는 자들이라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너무나 필요합니다. 그 길을 떠나고 싶지 않은 자들에게는 그 길을 떠나기 위한 차표는 무용지물이겠지만 그 길을 떠나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이 차표는 너무나 요긴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우신 은혜를 의지하여 이 일을 잘 감당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영광과 생명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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