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계획] 52살전 1; 2-7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사람Loading the player... []
52살전 1; 2-7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는 사람_1
2018. 6. 3. 주. 주일오전.
*개요: 그리스도인의 미래, 1적용, 51계획, [살전]1: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살전]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살전]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살전]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살전]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6월부터는 골로새서를 이어서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려고 합니다. 로마서부터 시작되는 서신서의 흐름을 살펴보다 보면 복음이 어떻게 설명되고 발전되며 열매 맺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복음만 강조하다 보면 그 복음이 이루는 더 큰 모습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복음 그 자체의 설명에만 매이게 됩니다. 그것은 복음의 진정한 모습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고 그 복음의 발전과 열매는 그렇게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성도들이 그 열매이지 성도들이 거하는 환경이 그 열매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도시에 있는 교회건물이 복음의 열매가 아닙니다. 농촌에 있는 교회건물이 복음의 열매가 아닙니다. 그와 같은 이유로 작은 교회당이 복음의 열매가 아니고 큰 교회당이 복음의 열매가 아닙니다. 진정한 복음의 열매는 그곳의 성도들입니다. 교회건축물이 그 교회의 성도들보다도 더 유명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의 규모가 그 교회의 성도들보다도 더 유명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은 교회의 위치와 교회의 구성과 교회의 역사적 가치가 그 교회의 성도들보다도 더 유명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경우에 복음의 진정한 결실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성도들 자신입니다. 그 성도들이 당대에서건 미래에서건 과거에서건 중요한 의미를 갖고 중요한 가치를 갖습니다. 그 성도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개인의 일들과 가정의 일들과 학교의 일들과 직장의 일들과 사회의 일들이 결국은 복음의 결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도시의 성도들과 농촌의 성도들과 작은 교회의 성도들과 큰 교회의 성도들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읽는 데살로니가전서는 바로 그러한 성도들의 미래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의 주제가 ‘그리스도의 영광’이었다면 데살로니가전서의 주제는 ‘미래와 재림’입니다. 그 속에 성도들이 과연 미래의 어떤 모습을 갖게 될까, 재림에는 어떤 모습이 될까에 대한 소망과 확신이 있습니다. 이러한 소망은 우리가 골로새서에서 살펴보았던 그리스도의 소망과 계속 연속성을 갖습니다.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그리스도를 권하는 이유는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소망이 있기 때문인데 그 소망의 결과인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되는 것을 이 세상에서 바라보려고 할 때 우리에게 미래와 재림에 대한 확신이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현세에서 다 이루지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게 될 것이고 그 시간에 대해서는 우리 소관이 아니므로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완전한 자를 이룰 것인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시작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들의 신앙의 발전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살전]1: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살전]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살전]1: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니는 편지는 바울 서신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A.D. 52년경 2차 전도여행 중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편을 듣고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미래와 재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목적을 가지고 본서를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록의 목적은 당시에는 그 상황에 해당하는 매우 특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볼 때 데살로니가전서는 복음의 열매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하는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미래와 재림을 바라본다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의 나중 모습이 어떠한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단순히 천국에서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최종 재림시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그 시점은 이미 죽은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하는 시기입니다. 살아있는 자들이나 죽은 자들은 모두 재림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재림을 살아있는 자들은 살아서 준비하는 것이고 죽은 자들은 죽을 때까지의 삶을 통해서 준비합니다. 그 이야기를 시작할 때 사도 바울은 먼저 그들에게 대해서 감사하며 그들을 기억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을 볼 때에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다는 것을 알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있을 때 그들은 선택된 자들이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와 동시에 그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자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있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재림을 말해주어야만 했습니다. 오늘날 재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것은 종말론자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종말에 대한 예상 속에서 더욱 절박하고 간절하며 치열합니다. 종말에 모든 것을 다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재림은 종말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쉽사리 이단에 빠지며 이단적인 사고에 무너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들의 욕심에 더욱 사로잡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재림은 그런 재림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재림은 미래와 재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시고 실행하시는 재림에 대해서 우리는 그저 때가 되면 맞이하면 됩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고 재림을 준비하게 됩니다. 단순히 자신의 모습과 상관없이 무조건 재림이 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루실 재림에 우리의 모습이 예비되고 준비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 재림은 이단적인 생각이 아니라 성경적인 생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미래를 준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는 미래와 재림을 준비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쓴 데살로니가전서를 통해서 바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과거에 사도 바울을 통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해주신 말씀을 바로 우리에게도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살전]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갖게 된 이유는 우리가 전한 복음이 말로만 그들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그렇게 단순한 언어나 지식이나 생각만으로 그들에게 전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은 그들에게 능력을 얻게 하고 성령에 이끌리게 하며 확신을 갖게 하였습니다. 그럴 때 그들이 재림에 대해서 예비된 귀한 하나님의 성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지식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라는 말은 복음을 삶 속에 구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지식을 전하고 지식을 받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그 지식을 실현하고 구체화하며 나타내는 일입니다. 그럴 때 복음은 항상 더 많은 능력을 필요로 하고 더 많은 은혜와 도우심을 필요로 하며 더 많은 확신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돌보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항상 우리는 너희 가운데에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되어가게 됩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자녀에게 있어서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은 미리 정해져 있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부모도 역시 처음에는 부모답지 않은 모습이 있지만 자녀를 위해서 더욱 부모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부모는 자녀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인도자가 더욱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그 신앙의 성도들이 더욱 열매를 맺는 과정이 결국에는 복음의 한 과정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그런 상호작용 속에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모든 시간과 어려움 속에서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며 소망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 시기를 잘 견디어 낼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성도의 미래의 모습과 재림앞에서의 모습은 결코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날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날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은 성령님과 함께 하나 하나 그 모든 수고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함께 뛰고 함께 달리며 함께 걸을 때에 비로소 그 날에 그 곳에 도착합니다. 물론 그것이 부족할 수도 있고 미약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예 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계속 그 일을 해 나갈 때만이 비로소 그 날에 그곳에 도착해 있게 됩니다. 재림과 미래의 모습을 아예 생각하지 않는 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그 어느 곳에 도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그 어느 날 바로 그 일이 찾아올 때 그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재림은 그에게 전혀 무의미한 일이 되고 말았고 성도의 미래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그가 받는 것은 오직 심판 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그래서 완성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이 일을 붙들고 있습니다. 노아의 방주를 만드느라 100년을 보낸 노아와 그 가족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한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100년 동안 그냥 편안하게 자기의 삶을 살았던 당대의 많은 세상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그들의 시간을 보낸 것이고 노아와 그의 가족은 하나님의 시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구원은 세상의 구원이기도 하였습니다. 첫 번째 심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고 역시 두 번째 심판에서 우리가 보게 될 것이지만 그것은 구원은 결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구원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시고 아들을 사랑하심으로 주신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세상을 사랑하셨던 아들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구원을 받는 자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들을 사랑하며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이 됩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듣고 따르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의 변화도 이루어졌습니다. “[창]6: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창]6:19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하게 하되 [창]6:20 새가 그 종류대로, 가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라” 노아가 자신의 아들들과 아내와 며느리들만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혈육있는 모든 생물들을 암수 한 쌍씩 그 생명을 보존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거부하거나 부정하였더라면 그들 자신의 생명도 보존할 수 없었겠지만 그 모든 생명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뜻에 따랐을 때에 그들은 자기 자신도 구원을 받는 놀라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 진정한 구원은 그 시대의 모든 악함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하며 섬기며 돌보는 자가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재림을 기다리는 변화된 삶을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재림을 준비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살전]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그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서 사도 바울의 일행과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환난 가운데서 악하여지거나 환난 가운데서 강퍅하여지지 않고 성령의 기쁨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고 그렇게 기쁨을 알게 하시는 말씀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마게도냐와 아가야 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믿는 자의 본은 바로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들이 바라보던 재림은 바로 우리가 바라보는 재림입니다. 52년에 살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모습이 2018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리의 미래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미래와 재림을 준비하되 결코 이기적으로나 자기 중심적으로 준비하지 않고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을 가지고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하며 애를 쓰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있을 때 우리가 완성을 하던 혹은 완성을 하지 못하던 간에 의미있는 신앙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 속에 그런 마음이 없이 어떻게 해서든지 나 한 사람만 잘 먹고 잘 살려고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미래와 재림을 준비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러한 모습이 모든 믿는 자에게 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에게 펼쳐지는 복음의 미래와 재림을 바라보며 모든 영혼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셨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들이 됩시다. 그래서 그 사랑의 마음으로 새로운 영혼의 방주를 만들면서 그 사랑을 우리 삶 속에서 이루어내는 귀한 삶을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미래와 재림 속에서 주를 닮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주제설교 관련글[더보기]16설교소감 관련글[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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