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양선] 45롬 7; 18-25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양선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pdf]
45롬 7; 18-25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양선_1
2017. 10. 22. 주. 주일오전.
*개요: 양선의 의미, 56충만-66양선, 4극본, 6서신서,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롬]7: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롬]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선을 행하는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동일하게 느끼는 것은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선한 마음을 갖고 선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에 동감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러한 선을 삶 속에서 온전히 이루는 일에는 동일한 어려움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으로서 본질적으로 선보다는 악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는 선보다 악이 더 많이 있습니다. 착하고 선량하고 온순한 모습보다는 착하지 않고 선하지 않고 거칠고 강퍅한 모습이 더 많이 있습니다. 성인으로서 사회생활을 통해서 많이 순화되고 완화된 모습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항상 이러한 모습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은밀한 영역에서 우리의 악함은 그 모습을 여지없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마음 속의 악함은 정말 선을 이루려고 할 때에만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을 이루려는 의지가 없고 본성적인 악함 속에 그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악함을 깨닫지 못하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새 옷을 입었거나 새 신발을 신은 사람만이 더러움을 피할 것입니다. 헌 옷을 입었거나 헌 신발을 신은 사람은 굳이 더러움을 피하기 위해서 애를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더러움이 더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굳이 깨끗함을 이루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와 같이 자신의 악함은 반드시 선함을 추구하려고 할 때에만 자각하고 인식하며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보다도 더 그 악함을 통렬하게 자각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누구보다도 더 선함을 위해서 나아가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그의 탄식을 보면 그가 엄청 악을 행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래서 도대체 사도 바울은 왜 그렇게 악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생각하고 괴로워한 것인가를 의아해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바울이 무엇인가 심각하고 은밀한 악을 행하고 나서 저렇게 괴로워하는 것 아닌가라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괴로움은 본질적으로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선을 행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 24시간, 일주일 168시간 내내 선을 행하려는 의지와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한순간도 그렇게 선을 행하지 못하는 그 순간을 괴로워했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악을 행하는 것은 일상적인 삶입니다. 그가 간절히 바랬던 것은 선을 끊임없이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는 것이 그 자신의 괴로움이었습니다.
저항시인으로 유명한 윤동주 시인의 시를 읽어보면 유사한 간절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그는 일제치하 속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마음 속에는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겼던 것입니다. 만약 그가 시대에 연합하여 적절히 살아가고자 했다면 굳이 부끄러움이 있거나 없거나를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가 그 반대로 그렇게 되지 못하는 연약함을 절감하며 악의 본성을 안타까워하게 됩니다. 우리가 선을 생각하며 선을 위해서 노력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악은 금새 우리 마음속에 퍼져갑니다. 악은 원래부터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악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커져갑니다. 다만 그전까지는 선을 추구하고 선을 위해서 살아가려고 하다 보니까 악이 득세하지 못했던 것이지 선에 대한 의지와 열망이 사라져 버리면 그 다음에는 악이 그 빈자리를 메우게 됩니다. 자신의 삶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시기에 선을 추구하며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면 어떤 시기에는 선을 추구하지 않고 그냥 편하게 살았던 시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 두 시기를 비교해 보면 선을 추구하며 살 때에는 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악에 대해서 생각해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을 더이상 추구하지 않기로 하는 때부터 악을 알게 되고 그 악이 커져가고 마침내 자신을 가득 채우게 되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전에 선을 그렇게 추구하며 살았던 시기가 없었다고 한다면 지금까지의 악에 매여 살아오던 삶에 대한 자각과 반성에서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악에 매여 있었기 때문에 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고 모든 것이 용납되었고 그래서 악에 물들어 살았습니다. 하지만 선을 추구하며 살고자 할 때 허용되지 않는 것이 생기고 용납되지 않는 것이 생겨납니다. 그러한 변화를 거쳐 비로소 선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되고 그럴 때 삶 속에 놀라운 선이 나타나게 됩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가 선을 이루고자 할 때 이전에 행한 악을 깨닫게 됩니다. 그 악을 버리고 선을 이루려는 의지와 열망 속에서 우리는 선을 이루게 됩니다. 악을 여전히 행하면서 선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세상적인 모든 습관과 안좋은 것들을 버리고 성경에서 보여주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따르고자 할 때에 우리는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말투가 달라지고 표정이 달라지며 행동이 달라집니다. 그것은 신앙생활 속에서 선을 이루어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해서 악으로 인한 절망은 극복할 수 있지만 여전히 마음 속에 있는 악의 존재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내 속에 있는 악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선을 추구하다 보면 악의 습관과 본성이 자기 자신을 얽매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때에는 잘되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때에는 전혀 안되는 경우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좌절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바로 이러한 점에서 좌절하였습니다. “[롬]7: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자신은 항상 선을 이루기를 바라지만 어떤 때에는 그러한 선을 이루지 못할 때 죄의 존재와 악의 존재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악을 행하는 자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속에 있는 죄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죄의 본성을 깨닫는 말입니다. 그만큼 자신에게 있는 죄성이 얼마나 크고 강한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가정환경이 얼마나 영향을 주는 지를 실감합니다. 살아온 삶의 모습이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나의 혈액형이나 체질이나 성향, 사회적인 위치, 지역적인 특성 등은 모두 나의 죄성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항상 선을 행하려고 할 때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것이 나 자신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내 속에 있는 악의 영향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한 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은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는 온전한 가치 중립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22, 23절은 이 문제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준을 보여줍니다. “[롬]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내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속에 있는 다른 악한 법이 내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법과 싸워서 죄의 법으로 자신을 사로잡아가는 것을 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하지만 죄의 법은 자신을 죄를 저지를 수 있도록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 속에는 절망 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속에는 분명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완전한 가치중립상태에 있어서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기만 하면 당장에라도 온전한 선을 이룰 수 있는 완전한 인간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죄성이 있고 악한 마음이 있는 인간으로 여전히 죄의 법으로 사로잡혀 가기도 하는 연약함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것이 없었다면 그 죄의 법에서도 결코 빠져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전의 사람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노예로 살았습니다. 형들에게 배신당하고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는 요셉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는 철저히 죄의 법에 의해 얽매일 수 밖에 없는 환경과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전혀 다른 법이 여전히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하는 요셉에게 보디발 장군의 부인은 간음하기를 요청하면서 그 법을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가 있는 상황과 형편은 죄의 법을 따를 수 있는 열악한 수준이었지만 그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그는 끝까지 ‘하나님의 법’을 따랐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보디발 장군의 아내의 요청을 거부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로 인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도 이어졌습니다. 자신이 섬기는 보디발 장군의 아내를 겁탈하려고 했다는 말도 안되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법’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서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부르심과 비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결국에는 애굽의 왕인 바로의 마음에 들어서 애굽의 총리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 죄의 법이 넘쳐날 때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을 지키고자 할 때 비로소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죄의 법이 존재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교회에서도 선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선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하나님의 법을 간절히 사모하고 그 법을 가장 이루기를 원하는 최우선적인 의지와 열망이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법을 따를 수 있습니다. 학교에는 더 많은 유혹이 있습니다. 친구들과 선생님들과 학교 관계자 들 속에서 우리는 죄의 법을 따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할 때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윤동주 시인도 그가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 일제가 신사참배운동을 강요할 때 이에 항의하면서 동맹 퇴학을 하였습니다. 그는 분명히 악에 동참하지 않았고 선을 따르고자 할 때 자신이 해야 할 분명한 일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항상 그런 경우에는 자퇴를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선을 이루고자 하는 노력과 실천을 스스로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직장에서의 악의 유혹은 얼마나 우리를 집요하고 끈질기게 끌어 당기는지 모릅니다. 또한 사회 속에서 세속적인 흐름과 분위기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에 대한 의지를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악에 반대되는 선이란 하나님의 법입니다. 악에 반대되는 선이 또 다른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치적인 대립 속에서 이 당을 지지하건 저 당을 지지하건 그 자체가 악이나 선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이 당이냐 저 당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갈등과 반목과 도전과 응전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그 법을 지키기를 바라고 원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고 그 속에서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망이 우리에게 있을 때 사도 바울은 자신이 결국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를 깨달으면서 소망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4, 25절을 보십시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는 스스로 탄식했습니다. 자신이 곤고한 사람이며 사망의 몸에 있음을 자각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몸을 가져야 합니다. 그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곤고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 가지 영향성에 이끌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면 비로소 그 몸이 변하여 부활체가 되고 그 다음에는 그 모든 영향성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겠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그 모든 사망의 영향력 속에서 살아야만 합니다. 그렇지만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육신으로는 죄의 법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는 감사가 있습니다. 또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결국에는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망망대해에서 바다에 빠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몸은 물속에 잠겨있고 머리만 물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다행히 구명조끼를 입고 있어서 숨은 쉴 수 있다고 해 보십시오. 그럴 때 그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머리가 물 속에 잠겨있지 않습니다. 머리는 물 밖에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조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또한 스스로 움직여서 육지를 향해 헤엄칠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있을 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영적으로 살아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욱 온전한 삶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지금도 이 선을 행하는 마음인 양선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얼마나 살아있는 자인지 모릅니다. 그것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죄악 중에 죽은 자가 될 뿐입니다. 이 마음을 버리지 말고 하나님의 법을 지켜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때가 이를 때 주님은 놀랍게 우리를 건져내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선에 대한 소망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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