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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순위] 58히 5; 7-10 그의 눈물과 간구와 소원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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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5; 7-10 그의 눈물과 간구와 소원의 가치_1

 

 2015.3.29.. 주일오전.

 

*개요:    5은혜, 6서신서, 4극본, 4욕구-5은혜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우리는 고난주간이 시작되면서 여러가지 바쁜 삶의 일들을 잠시 내려놓고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모든 절기가 그렇지만 특히 고난주간과 함께 이어지는 부활절은 우리의 삶에 한창 바쁘고 정신없고 분주한 가운데 찾아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헤롯왕과 서기관들이 한창 바쁠 때 이 세상에 오셨고 군중들이 한창 바쁠때 이 세상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한창` 바쁠때 빌라도와 대제사장들에게 심판을 받으셨고 한창 바쁘던 군병들에게 정해진대로 십자가의 형을 받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 중심으로 볼 때에는 모든 사람들과 환경들이 예수님 가는 길의 주변상황이지만 각 사람의 중심으로 볼 때에는 예수님의 모든 고난과 구원을 위한 길은 단지 스쳐 지나가는 해프닝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바로 그렇게 스쳐 지나갈 뿐이었을 예수님의 고난에 주목하고 관심을 갖게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레넷 사람 시몬은 그 좋은 예입니다. 그는 볼일이 있어 예루살렘에 왔다가 엉겁결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계속 더 나아가서 결국에는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주간이나 부활절은 우리의 바쁜 사정을 배려해주지 않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의 우선순위보다도 주님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더 가치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볼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의 모습에 좀더 주목해 보십시오. 오늘 말씀속에서 예수님이 고난속에서 어떤 모습을 나타내셨는가를 보게 됩니다. 7절 말씀입니다.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길을 가시면서 자신을 그 죽음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세상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육체에 거하여 계셨습니다. 바로 우리처럼 말입니다. 원래 본체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지만 육체를 가지신 이상 인간이 되셨고 그 인간되심으로써 스스로 제한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 연약한 상태에서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께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습니다. 예수님의 통곡과 눈물이 의미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와 그 이후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까지의 모든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원함을 따를 것인가, 아버지의 원함을 따를 것인가를 땀이 피가 되도록 고민하고 고민하셨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원함을 따르기 위해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원하신 고난 속에서 주님은 매맞고 채찍질 당하고 희롱당하고 주먹으로 맞았습니다. 이후에 고통으로 탈진하게 된 다음에는 사형이 결정되었고 그 상태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셔야 했습니다. 언덕에 다 올라갔을 때 십자가 형틀에 뉘어졌고 주님의 양손은 못을 박혀서 형틀에 고정되었고 양 발은 한데 모아서 다시 못을 박혀서 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십자가는 들려져서 땅위에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고통을 아무런 진통제도 없이 고스란히 맨정신으로 견디셔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죽을 때까지 매달려 있는 고통을 당하시는 동안의 주님의 상태는 바로  통곡과 눈물이었습니다.

여기서 통곡은 헬라어로 ‘κραυγή (kraugē)라고 하는데 비명, 절규, 아우성이라고 번역됩니다. 주님은 비명을 지르기도 하시고 절규하기도 하셨습니다. 그의 통곡은 몸이 찢어지는 고통으로 인한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그속에서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감당하시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에 대한 괴로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모든 죄를 지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형상이 아니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은 자애롭고 화평하며 온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그냥 군병들에게 거침없이 유린당하며 한없이 버려지고 보호받지 않는 극한 죄인의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왜 주님은 그렇게 인간의 존엄을 잃으시고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가셔야 했을까요? 무엇때문에 주님은 인간다움이 아닌 한마리의 도살당하는 동물처럼 그렇게 안타깝게 죽으셔야 했을까요? 그 모든 일은 바로 우리의 죄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당했어야 하는 그 지옥의 고통을 주님이 대신 그 죽으심을 감당하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꿈에서 아주 끔찍한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이는 곳이었는데 그 앞에서는 어떤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선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동가가 사람들을 인도하더니 어디론가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은 어둡고 침침한 동굴 같은 곳이었는데 그곳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더니 그들이 뱀과 구더기와 지네와 벌레 등 온갖 더러운 것들의 먹이감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희생되는 사람들은 죽지도 못하고 벽에 붙어서 모든 추악한 것들의 먹이가 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더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온몸은 허옇게 변색되어서 자신의 몸이 뜯어먹히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속에서 그들은 살아있었습니다.

잠이 깬 뒤 저는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내가 무얼 본 걸까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제가 본 것은 지옥의 고통이었습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어서 결국은 죄사함을 얻지 못하는 지옥에 빠진 사람들을 제가 보았던 것입니다. 참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 자들의 말로는 얼마나 비참하고 끔찍한 것인지 모릅니다. 구원을 얻지 못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댓가를 지옥의 형벌로 치르게 됩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자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 모든 죄의 댓가를 그 자신이 치르지 않았다면 누가 치렀다는 것입니까? 자기가 멸망당할 죄인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면 그 이유는 그 대신에 형벌 당하신 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주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셨기 때문에 우리 대신에 통곡과 눈물을 흘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날 수 있었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정말로 누리는 자라면 우리는 왜 어떻게 그렇게 살아날 수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대신 예수님이 우리가 했을 모든 통곡과 우리가 흘렸을 모든 눈물을 대신 흘려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죄지은 우리보다 우리를 용서하신 주님이 크고 우리의 죄보다도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의 용서하심이 더 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많은 우리에게는 주님보다 우리 자신이 더 우선됩니다. 만약 우리가 그 모든 예수님의 고통과 괴로움에 아무런 느낌이 없고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죄사하심에 대해서 무덤덤하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죄사하심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 가치도 모르고 그 의미도 모릅니다. 그저 다만 우리 자신에게 관심이 많아서 무엇을 해도 우리 자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해 주었더니 그 다음에는 보따리 내놓으라고 한다는 말처럼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말하고 그 다음에는 오히려 자신을 위해서 예수님이 해주신 일이 뭐냐고 되물을 것입니다. 고작 구원을 해주신 것 밖에는 없냐고 더 크고 풍성하게 복을 주실 수는 없냐고 하나님을 비난할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통곡과 눈물을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아무리 예수님의 통곡과 눈물을 말한다 하더라도 그로 인해서 꿈쩍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래서 뭐가 어쨌는데?’라고 말하면서 여전히 죄사함의 의미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통곡과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말하면서 도리어 예수님의 희생의 의미를 축소시키려고 할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신 일이 거룩하고 귀하신 이유는 단지 지금까지 말한 통곡과 눈물을 흘리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의 진정한 영광과 거룩함은 그 고통속에서 예수님께서는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올렸다는 점입니다. 그 모든 간구와 소원이란 바로 예수님이 구원받을 우리들을 위해서 간절히 비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죽음에 내어주시면서 구원받을 성도들에게 원하셨던 일이 과연 무엇인가가 이사야 5310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53: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예수님께서 그 모든 통곡과 눈물 중에서 올리신 간구와 소원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뜻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의 사함을 얻고 그 죄악의 용서함을 얻고 의롭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간구와 소원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소원대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구원함을 얻었고 의로움을 받았으며 그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높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 올려지는 모든 찬송과 영광은 그들 자신이 바로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음을 증거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누구에게 존경을 받고 누구에게 영광을 받고 누구에게 기억이 되는지를 보십시오.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위한 희생제물이 되셨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기 때문에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계시는가를 믿는 자가 아니고 예수님이 좋으신 분이시라고 생각하는 자가 아니고 예수님께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간구하신 간구와 예수님이 바라신 소원은 바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기를 원하신 것이었기 때문에 그 구원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구원의 근원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을 기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 덕분에 살아난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그 모든 구원받은 자들을 위해서 간절한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위대한 교부이었으나 젊은 날 방탕하였던 어거스틴이 회개한 이유는 어머니 모니카가 눈물만을 흘려서가 아닙니다. 모니카가 그 눈물 속에서 간구와 소원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교황의 막강한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가 결국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그 아내 카타리나가 남편과 함께 모든 고통을 눈물로 이겨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는 남편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절한 간구와 소원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올리는 간구와 소원을 뺀 나머지의 모든 것을 시도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일입니다.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모든 일 은 하지만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리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뒷조사를 하고 때로는 미행을 하고 때로는 감시를 하고 때로는 조종을 하면서도, 또한 위협과 협박과 탄식과 눈물과 고성과 분노와 자해를 하기도 하면서도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리지 않는다면 그 모든 일은 다만 자기 자신 만의 감정일 뿐입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이루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통곡과 눈물 속에서 오직 하나님께 간구와 소원을 올렸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만이 그 간구와 소원을 들으시고 그 소원을 이루어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서 그 소원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서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서셨습니다. 영원히 살아계시며 이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일을 시작하실 때 그 누가 막을 수 있으며 그 무엇이 불가능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간구와 소원이 들어지셨고 예수님은 부활하셨으며 이후 모든 믿는 자들의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주를 믿는 자들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고 그 죄가 결코 예수님의 피값을 무기력하게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 어떤 죄도 예수님의 피로 사하여지지 못하는 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그 어떤 죄값보다도 크고 중하며 귀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마지막 절은 예수님이 단지 그 당신의 자기를 믿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앞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대속자가 되셨음을 보여줍니다.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구약을 기준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사함을 진행하는 한 사람의 대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 한 사람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제사장은 그 이전의 멜기세덱이라는 자의 차례를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대제사장 제도 이전에 멜기세덱이라는 대제사장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멜기세덱 보다도 더 앞서는 대제사장이 있었으니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멜기세덱에서 그 뒤의 대제사장으로 이어지는 대표적인 위치를 회복하는 가장 원천적인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죄를 사하시는 가장 온전한 대속자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이 바로 예수님의 고난의 길과 그 길의 끝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모든 바쁜 와중에 해가 뜨고 날이 밝습니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덮입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지만 이 세계는 놀랍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와 상관없는 것 같아도 우리에게 가장 상관이 있는 이 일이 다시 기념되고 있습니다. 우리 삶의 가장 중심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의 고난과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올렸던 간구와 소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때 우리도 조금이나마 우리를 위해서 2천년여전에 고난 당하셨던 그리스도의 삶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 구원하심이 지금도 우리 삶속에 기쁨과 감사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아무 상관없던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셔서 우리 삶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되시고 가장 분명한 구원의 근원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구원의 근원되신 예수님을 향해 진심으로 더욱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한 사람의 믿는 성도가 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된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과 간구와 소원의 결과입니다. 바로 구원받은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그 모든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의 가치입니다. 그 크신 은혜를 깨닫고 예수님 앞에서 더욱 귀한 성도가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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