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고전] 14:21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4:22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고전] 14: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고전] 14: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고전] 14:25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차서를 따라 하라
[고전] 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교회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덕을 세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앞에서 아무리 강조한다 하더라도 뒤에서 잊어버린다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로만 외친다고 해서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정말 모든 교회생활이
덕을 세우기 위해서는 이것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때 진정으로 덕을 세우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헬라어로 ‘οἰκοδομή (oikodomē)’ 라고 하고 이것은 영어로 ‘edify’ 한다는 것이고 그
의미는 ‘의식을 고양시키다, 교화시키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육을 통해서 그 사람의 도덕성이나 지성이나
수준을 증진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덕을 세우는 것이고,
그것이 한마디로 ‘덕행’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덕행을 통해서 우리들은 같은 믿음의 형제들의 신앙수준을 높일 수 있습니다. 그저 예전 그대로 계속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덕을 세우면서 신앙이 발전되고 성장하며 변화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것은 바로 이러한 덕행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렇게 교회의 모든 것을 바로 덕을 세우기 위해서 행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고전] 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우리가 모일 때 찬송시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사가 있는 찬송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냥 찬양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설교입니다. 그 다음에 계시와 방언과 통역이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행하는 은사사역입니다. 이런 것들이 교회생활 속에 있습니다. 찬양과 설교와 은사가 우리의 모이는 이 교회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이중에서 먼저 찬양이 덕을 세우기 위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찬양을 통해서 노래하는 자들이 그리고 듣는 자들이 덕을 세울 수 있게 되는 의미입니다. 그냥 찬양만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의 가사가 노래하는 자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게 합니다. 또한 그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간구하게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찬양이 듣는 자들 함께 하는 자들에게 감화를 미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세우고 결심을 세우게 합니다. 그러한 찬양을 통해서 덕을 세우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찬양의 목적이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반대로
덕을 세우지 않는 찬양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하자면 그 찬양이 단지 자기 자신의 즐거움만을 위해서
부르는 것일때 전혀 덕이 되지 않습니다. 찬양이 자기 맘에 들기만을 원할 때 그 찬양은 부르면 부를
수록 이기적이 되게 할 것입니다. 혹은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할 것입니다. 자신은 흥에 겨워서 노래를 부를 수 있지만 그것은 멜로디나 마음에 드는 가사만이 자기를 기쁘게 할 뿐이지 스스로의
덕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는 것도 아닌 말그대로 덕을 세우지 못하는 찬양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덕을 세우는 찬양이란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될 때에 비로소 덕을 세우는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종종 기독교 TV에서는
다른 교회에서 하는 찬양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찬양의 모습은 노래 부르는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도취되서 부르는 것 같습니다. 반면에 어떤 찬양팀의 모습은 진실하게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열정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 모습은 너무나 은혜가 됩니다. 그들이
열정을 다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은 나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그런 것이
덕을 세우는 찬양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덕을 세우는 찬양은 그 찬양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
나아가게 합니다. 그로 인한 감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덕을 세우는 모습입니다.
가르치는 말씀이 덕을 세운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설교가 그저 전달되는 것만의 의미를 갖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설교가
단지 예배를 끝내게 하는 과정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설교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자기 자신만 생각하게 한다면 설교는 전혀 덕을 세우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설교시간에 졸았는가 늦었는가 잘못 이해했는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덕을 세울 수 있는가 없는가, 설교가 끝난 뒤에 어떤 삶을 살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설교가
끝난 다음에 그 설교로 인해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만약 이렇게 되면
설교가 덕을 세우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설교가 덕을 세우는 것이 되도록 설교자와 청중이 모두
노력해야 합니다.
제가 초중고 학생때 다녔던 교회는 나이 많으신 목사님이
목회하던 교회였습니다. 이 교회는 중학교부터 어른예배를 같이 드렸습니다. 중학교때 나이 많으신 목사님이 하시던 설교는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그
목사님이 항상 강조하시며 말씀하시던 ‘청교도적인 신앙’은
그 당시 제겐 뭔가 색깔이 파란 사람들과 관계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만 낳았습니다. 또한 소리를 높여
강조하시던 ‘보수주의’는 그것이 정말 중요한 것이구나라는
마음만 갖게 했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이야기하시던 일본순사에게 고문받던 이야기는 나도 그런 고통을 이겨내야
하겠구나라는 마음을 갖게 했습니다. 그 내용을 다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때로는 졸기도 많이 졸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설교 속에서 오히려 더 신앙에 굳세어지고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재미가
있고 웃음이 있고 평안이 있는 설교 속에서 덕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상하게 그때의 저에게는 재미도 없고 웃음도 없고
평안도 없었으나 하나님을 따라가려는 굳은 마음과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설교의 핵심은
정말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나아갈 때에만 덕을 세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도 이제 시간이
흘러 설교를 하는 입장에 있는데 항상 그 생각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도들의 덕을 세우고 있는가
아니면 성도들의 덕을 무너뜨리고 있는가. 여러분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설교을 들으면서 덕을 세우고 있는가 아니면 덕을 무너뜨리고 있는가.
이렇게 덕을 세우기 위한 노력과 애씀은 찬양과 설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계시와 방언과 통변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계시가 덕을 세우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있고 덕을 세우는 것과 상관없는 것이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계시는 그 계시를 받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덕을 세우지
않는 계시는 그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다른 사람과 분란을 일으키게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대혼란에 빠지게
되어버립니다.
저희 시찰 내의 어떤 교회에서도 한 여전도사님이 계시의
은사를 받았는데 그 은사를 담임목사님의 지도하에 쓰지 않고 자신이 아무에게나 막 그 내용을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그 여전도사님에게 많이 의지하게 되었고 또한 그 여전도사님도 그렇게 자신에게 의지하는 성도들을 받다 보니까 덕을
세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는 것인데 자신을 의지하게 하면
결국은 사람을 의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방언을 하는 것도 덕을 세우기 위함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거나 다른 사람의 기도를 방해하거나 아니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거나 할 수 있습니다. 덕을 세우는 방언은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면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기도를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감추면서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기도의 분위기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방언은 하나님께
그 자신과 함께 있는 자들이 한마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좋은 은사가 될 수 있습니다.
통역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방언을 통역할 때 무조건 모든 것을 다 통역하는 것이 아닙니다. 덕을
세우기 위해서 통역하는 것입니다. 그가 알아야 하는 내용이 있고 그가 알지 않아도 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했다가는 당장 실족하게 되고 마음이 상하게 되고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게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기위한 노력이 통역을 통해서 나타나면 자연스럽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그 마음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할까요? 덕을 세우는 것 말고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원하는 대로 하면 안될까요? 너무
교육적이고 너무 가르치려고 하다보면 따르는 사람들이 불편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 알만한 사람들이고
다 알게 될 텐데 굳이 찬양에서 설교에서 계시와 방언과 통변에서 항상 덕을 세우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23절부터 25절까지 함께 읽어봅니다.
“[고전] 14: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고전] 14: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고전] 14:25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온교회 성도가 함께 모여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않는 자들이 볼 때에 그들을 미쳤다고 말할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방언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냥 보통사람으로는 보이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예언을 하면 그 미쳤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볼 때 그 예언이 이해가 되는 내용이고 그 예언이
마음의 숨은 일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연결되는 것이 그 앞선 18,19절입니다.
“[고전] 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미쳤다고 보이지
않도록 정신이 올바르고 굳셀 뿐만 아니라 오히려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도록 그들앞에서는 깨달은 마음으로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듣는 사람을 위해서 예언을 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러한 뜻입니다. 이제
다시25절로 돌아와서 생각해 봅니다.
“[고전] 14:25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성도들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방언을 잘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전파하는가 입니다. 여기서 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나오는데 덕을 세우고자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전파되기 때문입니다. 덕을 세우려고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나타날까요? 바로
자기 자신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덕을 세우지 않는 것의 위험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나타난 상태를 바로 잡기 위해서
하나님을 나타내고 덕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면 자기를 나타내는 데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그런 말을 불편해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를 숨겨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를 숨기기가 싫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하나님 나타내기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커다란 어리석음이 됩니다. 태양의 빛을 어떻게 손바닥으로 가릴 수가 있겠습니까? 태양보다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가 될 때 그 빛으로 채워지는 자가 되지 그것을 가리는 자가 되면
스스로 어리석음을 나타낼 뿐입니다.
예전에 미국을 방문중이던 우리나라 대통령의 대변인이
현지에서 경질된 적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한국교포여성에 대한 성추행 혐의가 있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명예를 높이고 대통령의 뜻을 잘 받들어야 하는 자가 자신의 욕구를 다스리지 못해서 결국 국가적인
수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주님이 이땅에서 하시려는 일을 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뜻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욕구에 빠져버린다면 바로 그 일을 실패하는 자들이 되고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를 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는 더욱 애써서 덕을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이든은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연주회가 열렸습니다. 그의 걸작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공연되었고 그 공연을 보기 위해 수많은 관중이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그는 늙고 병약하였기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공연장에 입장하였습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공연을 마쳤을 때 관중석에서는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는 힘들게 자리에서 일어나
떨리는 손을 위로 치켜들고 외쳤습니다. “내가 아닙니다. 그
음악은 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저기 우리의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습니다.”
그말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다시한번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덕을 세우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덕을 세워야 합니다. 덕을 세우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혜에
장성한 자의 모습입니다. 20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지혜에 어른이 된다는 것은 덕을 세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는 것은 덕을 무너뜨리는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 자신을 숨겨야 하는지, 언제
자신을 낮춰야 하는지, 언제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지 덕을 세우는 일이 정말 지혜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지혜는 결국은 악을 행하는데 더욱 지혜로워질 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전파하게 하기 위한 지혜는 더욱 덕을 세우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항상 덕을 세우고 하나님을 나타내고 그 영광을 증거하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항상 여러분 자신에게 그리고 여러분 주변의 사람들에게 흘러 넘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