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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순위] 11왕상 17;8-14 나의 유익보다 앞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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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왕상17;8-14 나의 유익보다 앞선 하나님_1

 

 2014.7.13..주일오전.

 

*개요:    71충성, 4극본, 2역사서, 7실천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10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무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가로되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11    저가 가지러 갈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생각할 때에 그 의미는 나의 것보다 하나님의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나의 것이 사소한 것일 경우에는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나의 오락, 나의 여가, 나의 취미 등등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일때 그것은 충분히 희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일 때에는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내가 유익하고 내가 발전이 되고 내가 더 향상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보다 우선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나에게 지금 있는 이 시간은 내 몸의 건강을 위해서 정말 중요하게 사용되어야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만약 그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만약 나에게 있는 물질은 내가 생업과 가정을 위해서 꼭 필요하게 사용하려고 한다고 해보십시오. 그런데 그것보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더 먼저 사용하라고 부르심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시간이든 물질이든 재능이든 그 어떤 것이든지 간에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한도내에서는 얼마든지 하나님께 드릴 수 있지만 그것이 정말 중요하고 요긴하며 필요로 하는 한에서는 그것보다 하나님의 것이 더 우선된다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기준을 바탕으로 해서 우선순위의 서열을 생각해보면 1순위는 나의 유익한 것, 2순위는 하나님의 것, 3순위가 나의 선택적인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말씀하실 때에 그렇게 설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충성이란 1순위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 다음 2순위 나의 유익한 것, 3순위 나의 선택적인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2순위로 밀려가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은 항상 1순위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너무 이기적이신 것 같습니다. 너무 자기중심적이신 것 같습니다. 너무 독불장군이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도 순서에 따라서 밀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줄을 서셔야 하고 하나님도 기다리셔야 하고 하나님도 양보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보다도 더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더 우선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순서에 의해서 밀리시는 분이 아니고 줄을 서셔야 하지도 않고 기다리실 필요가 없고 양보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이기적이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이거나 독불장군이시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자꾸만 사람처럼 생각하다 보니까 이런 저런 오해가 생깁니다. 하나님은 신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신이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행하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하시는 것은 절대적으로 옳고 하나님의 뜻은 가장 완전하며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은 가장 거룩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가장 먼저 우선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과연 그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잘 이해하는가입니다. 그것을 이해하면 그 뜻을 따르겠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뜻을 거부해버릴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르밧 과부는 아주 어려운 제안을 받고 있습니다. 그녀가 받았던 제안은 우리가 살펴본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온세상에 기근이 임한 그 당시에 그녀에게는 하루치 먹을 양식이 있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바로 그 상황에서 이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이 과부가 넉넉할 때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풍성해서 나누어주기에 충분할 때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을 다 먹고 이제 마지막 남은 양식이 있을 때 엘리야 선지자는 그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그녀가 먹을 마지막 양식을 자신을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11    저가 가지러 갈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사르밧 과부는 자신의 양식은 그저 자신과 아들이 마지막 한끼를 먹을 분량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남은 것은 정말 그것 뿐이었고 그로 인해서 그 다음에는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녀의 전부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야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떡을 만들어 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떡도 아니고 자기가 먹을 분량을 먼저 달라고 했고 그 다음에 혹시 남은 것이 있다면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위해서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떤 점에서는 엘리야는 너무나 야박했습니다.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엘리야는 그것을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누가 보기에도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의 말은 무리가 되는 것이었고 가당치 않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 남은 양식이 그것뿐인 것은 안타까운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녀 자신이 어쨌든 처리하게 내버려 두었어야 하는 상황을 엘리야는 끼어 들어서 그것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오히려 엘리야가 그녀와 그 아들의 먹을 것을 마련해서 도와주어야 하는 형편이었는데도 엘리야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녀의 먹을 것을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많은 면에서 바로 이러한 점때문에 욕을 먹고 있습니다. 기독교 외부에서 과부의 마지막 양식을 달라는 엘리야의 모습은 몰인정하게 보여집니다. 또한 기독교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나중에는 바로 자신에게도 올 것이라는 점을 알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조차도 이러한 요구에 대해서 어려움을 느낍니다. 바로 여러분에게 엘리야가 나타나서 여러분의 마지막 양식을 달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저같아도 그 양식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중고등부 시절 교회에서 주일저녁예배를 나가곤 했습니다. 그날도 아무 생각없이 주일저녁예배를 갔는데 그 때 마침 어떤 외부목사님이 오셔서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 헌금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보니 그때가 여전도회 헌신예배였습니다. 또한 말씀내용도 모든 것을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에게는 예배끝나면 식빵을 사가지고 가기로 한 돈이 있었는데 헌금을 해야 하겠고 돈은 있지만 그 돈은 빵을 사야 하는 돈이었고 고민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헌금 바구니가 앞에서부터 돌아서 오는데 너무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 고민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헌금바구니가 무섭게 느껴집니다.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헌금을 내야 하는 상황이 힘들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고민고민하다가 결국은 그 돈을 다 헌금으로 내버리고 말았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식빵을 안사왔다고 한소리 들을 게 뻔했지만 이상하게 그때에는 그냥 그렇게 헌금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때의 저의 모습은 너무 순수했던 것일까요? 그렇게 까지 안해도 되는데 너무 오버한 것인가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엘리야가 왜 사르밧 과부의 마지막 양식을 달라고 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렇게 행했던 것 뿐입니다. 그를 사르밧과부에게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8절말씀입니다.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엘리야를 그녀에게로 보내셔서 그녀의 마지막 양식을 통해서 도움을 받게 하셨을까요? 왜 넉넉한 집으로 보내지 않으시고 가난한 집으로 가게 하셔서 그녀의 보잘 것 없는 도움을 받게 하셨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신약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그 이유가 증거되었습니다.

4: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선지자됨을 비방하는 고향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의미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뜻으로 과부에게로 가서 그의 도움을 받고자 하셨을 때에 그것은 사실 엘리야가 과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과부가 엘리야의 도움을 받게 하시는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결국 사르밧의 과부는 자신의 먹을 것을 엘리야에게 줌으로써 오히려 엘리야로부터 자신이 먹고도 남을 많은 것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그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공급하심 앞에서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당대의 유명한 선지자였던 것을 그녀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자신의 당장 먹을 것이 더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못갈 자신의 유익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그녀를 잡아당긴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오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누리도록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13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의 핵심은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는 그 말씀을 증거하였고 그것을 이 사르밧 과부는 믿었습니다. 엘리야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엘리야가 말하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먹을 양식을 순순히 엘리야에게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었던 신뢰이고 나타나지 않은 미래를 바라보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유익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우선됨을 고백하는 충성스러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충성스러움의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15절입니다.

“15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정말 저와 엘리야와 그 식구는 여러날 먹었지만 그 통의 가루는 날마다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로 인해서 과부와 그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그들이 엘리야를 먹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그들을 먹이셨습니다. 그것은 사르밧 과부가 자신의 최선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더 중요시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녀의 가장 좋은 해결법보다도 하나님의 해결법이 더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겨야만 했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능력을 놀랍게 나타내 주셨습니다.

 

전도자 무디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유명한 미국의 전도자이자 설교자입니다. 그는 원래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문법이나 철자, 발음이나 표현등에 서툴렀고 실수를 많이 하였습니다. 더욱이 그는 신경이 예민하여 말을 더듬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기로 굳은 결심을 하였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장애를 극복하고 훌륭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습니다. 무디는 어느 모임에 참석하였을 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완전히 헌신하는 자를 찾으시게 될 경우에, 남은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무디는 그 모임장소를 떠나면서 자신이 그러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였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의 헌신을 통해 수많은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는 1863년에 무디기념교회의 전신인 교회를 직접 개척하였습니다. 그는 노스필드에 있는 헐몬산 아카데미, 교역자 연수원, 성경연수원, 그리고 시카고에 있는 무디 성경 학교 등을 세웠습니다. 무디는 일생동안 약 오천 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충성했던 것이지 자신의 능력으로 그 일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일한 원리로 우리는 우리 나라에서 수많은 일들을 이루었던 귀한 목회자, 전도자, 선교사, 직분자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에 충성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유익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은 결코 자신의 유익을 잃어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유익의 한계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충성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할 수 있는 일보다도 더 크고 놀라우신 일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만족해서 그만하고 싶어할 때에도 하나님은 계속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의 유익보다 하나님의 유익을, 자신의 것보다도 하나님의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것 속에서 나의 것을, 하나님의 유익 속에서 나의 유익을 생각한다면 결국 우선순위가 바뀌고 말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 자신도 그렇게 어느해 한번 빵 살돈 전부를 드린 다음에 마음이 하나님께 쏠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더 의지하게 되었고 더 열심히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심을 믿고 그 하나님께 여러분의 것을 드리실 수 있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사르밧 과부의 믿음과 헌신이 결국 그녀 자신과 그의 가족을 살릴 수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의 충성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가족을 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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