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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경건] 45롬 5;5-6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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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롬 5;5-6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이유_1



2010.10.3. 주일오전

10월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완연한 가을에 접어들었습니다. 날씨만큼 우리의 정서와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것이, 해가 쬐면 해가 쬐는 것이, 그리고 날이 선선해지면 그렇게 날이 선선해 진 것이 우리의 마음과 정서에 영향을 미칩니다. 지난 여름 더웠던 모든 시간들은 사라지고 새로운 계절에 들어서면서 이번 달에는 뭔가 새로운 일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게 됩니다. 비록 그런 일이 아무 것도 없더라도 우리의 마음은 이 변화된 날씨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그런데 날씨는 이렇게 변화되었지만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계절은 시시각각 그렇게 자신의 모습을 바꾸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그대로 조금의 변화도 없이 이 가을에도 우리를 힘들게 만듭니다. 우리가 지난 여름 가지고 있던 문제는 여전히 이 가을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해에 가지고 있던 문제는 올해에도 여전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들이 우리를 여전히 힘들게 하며 날씨는 변하였지만 우리의 모습은 변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첫 째로는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나 자신을 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 보다는 나 자신의 취향과 즐거움에 빠져있습니다. 내 자신의 문제 속에서도 나에게 중요한 일을 행하고 그것을 준비하기 보다는 여전히 지금 당장 안해도 되는 선택적인 일에 몰입합니다. 그것이 나 자신을 생산적으로 만들지 않고 시간을 허비하며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진로의 문제’입니다. 어느 길을 가야 할 것인가, 어디로 방향을 잡을 것인가를 생각할 때 고민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을 공부해야 하며 어디에서 일을 해야 하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가 우리의 고민입니다. 그럴 때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다른 사람들의 조언이지만 우리는 오직 내가 하고 싶은 것에만 몰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로의 문제는 빨리 해결되지 않고 지지부진하며 답답한 상태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해결했다고 생각했지만 또다시 문제에 빠집니다. 잘못된 선택이 길을 빠져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왔던 길을 계속 다시 지나가게 만듭니다.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선택의 문제’입니다. 선과 악 사이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지 고민합니다. 또는 선과 악 사이에서 선을 선택해야 하는데 자꾸만 악을 선택하게 되는 것으로 인해 괴로워합니다. 우리는 올바르게 살고 싶지만 그것이 뜻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자꾸만 악에 손에 가고 악에 손을 뻗치게 되고 그래서 악을 경험해버리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큰 악인 다른 사람에게 악을 전파하고 주도하는 일로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선을 향해서 갈길이 먼데 자꾸만 악을 저지르게 되고 급기야는 다른 사람에게 악을 전파하는 일까지 나아가게 되니 그것이 반복적으로 죄책감과 수치심을 들게 만들어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와 씨름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좀 나아졌겠거니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작년에도 우선순위의 문제와 진로의 문제와 선택의 문제와 씨름하며 괴로워했는데 지금도 여전히 하나도 변화되지 못한 모습으로 똑같은 분류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며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이쯤되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볼 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답답하고 괴롭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조금도 변화되지 못한 모습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그런 문제인식과 한계를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합니다. 부모는 조금도 변화되지 않은 자녀를 보며 안타까워합니다. 부부는 서로를 볼 때 예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때문에 절망합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봐오는 어떤 사람이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여전히 동일한 모습을 가지고 있음에 낙심합니다. 교회에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오래 했지만 주님안에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여전히 신앙은 뒷전이고 하나님은 버려둔채 세상과 짝하며 살아가는 신도들을 보면서 또는 중직자를 보면서 또는 교역자를 보면서 힘이 빠집니다.

정말 소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우리 자녀가 변화되리라는, 우리 배우자가 변화되리라는, 우리 친구나 동료가 변화되리라는, 우리 성도나 직분자나 교역자가 변화되리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요? 현재의 상태는 결코 소망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의 상태는 자포자기입니다. 여전히 똑같은 문제를 저지르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낙심하게 됩니다. 절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포기해버리게 됩니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라’
‘좋아,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맘대로 한번 살아봐’
‘알았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게 내버려둘께’
‘알겠습니다. 이제는 당신을 그냥 놔두겠습니다.’

이러한 말들은 직접 하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절망감과 낙심으로 표현됩니다. 더 이상 신경쓰고 싶지도 않고 미련을 가지고 싶지도 않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우리는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래서 더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난 아무리 해도 안되나봐’
‘나는 어쩔 수 없이 원래 그대로의 모습대로 살아야 되나봐’
‘날 그냥 내버려둬, 나는 그냥 생겨난 대로 살아갈래’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 이런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같습니다. 세상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변하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날씨도 변하고 기후도 변하지만 오직 사람의 마음 만큼은 언제든지 원래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고달프며 괴로운 일이 됩니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도 그렇고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도 역시 그렇습니다. 둘 다 인간이기 때문에 쉽게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정말 소망이 없을까요? 우리는 그렇게 절망적으로 낙심한 상태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변화시키기를 원했던 사람을 포기하고 우리가 변화되기를 원했던 노력을 이제는 접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장 소망이 없어 보일 때에도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금은 전혀 가능해 보이지 않을 것 같아도 우리는 가능성을 꿈꿀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소망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소망을 가져라!’
이러한 소망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전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절망적인 상황에 놓일 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소망입니다. 창세기 17장19절에서 하나님은 99세가 되도록 자녀가 없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이제 곧 100세가 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실 그 소망을 75세가 되던 해에 이미 주셨습니다. 자녀가 없던 그에게 자녀를 주고 그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어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을 이미 창세기 12장에서 해 주셨던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셔서 그로 하여금 큰 부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가 지속이 되어서 24년이 지나갔던 것입니다. 그 동안에 사라는 경수가 끊어졌고 이제 조금만 있으면 아브라함이 100세, 사라는 91세가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명년 이 기한에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시는 말씀이 새로운 소망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말 분명한 소망을 주십니다. 하지만 이 소망은 당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75세때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을 99세때에도 동일하게 주시는 하나님은 때로 너무나 원망스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는 주시려고 하면 빨리 주시지 왜 이렇게 오래 걸리시나 답답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우리 자녀가 10세때 네 자녀가 이제는 변할 것이다 말씀해 주시지만 20세가 되도록 변하지 않습니다. 배우자와 10년 정도 살았을 때 네 배우자가 변할 것이다 말씀해 주시지만 20년 같이 살아도 변하지 않습니다. 너의 선후배나 직장상사나 부하는 이제 변할 것이다 말씀해 주시지만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너의 교회의 성도나 직분자나 교역자는 변화될 것이다 말씀해주시지만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포기해 버립니다. 5년 기다려도 변하지 않는데 10년 기다린다고 변하겠느냐 생각됩니다. 그래서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해 버립니다. 자녀와 의절하고 배우자와 이혼하며 학교와 직장을 옮기고, 교회를 떠납니다. 오래도록 기다리다가 마음만 상하느니 차라리 빨리 포기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 속편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그런 생각을 무려 24년 동안이나 하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이제 곧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 말을 믿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우리는 믿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다 끝났다고 할 것입니다. 이제는 주셔도 받을 수가 없고 키울 수가 없다고 거부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창세기 17장에서 그는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말로만 믿은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믿었고 행동으로 나타내었습니다. 온 가족이 할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할례를 받았고 그 집의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약속이었고 99세에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정말 명년 이 기한에 아들을 주신다는 그 말씀을 진실로 믿고 자신의 양피를 잘랐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 그대로 명년 그 기한에 그는 경수가 끊어진 아내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가진 소망은 진실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안에서 갖는 소망이, 하나님으로 인해 갖는 소망이 얼마나 유익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그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단지 그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것 이상의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이말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지기 때문에 그 소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에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말하면 그 소망을 붙들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온 마음으로 우리 온 가슴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다시 창세기 17장에서 나타났던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가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24년 만에 아들을 다시금 약속해 주신 하나님께 그는 불평과 불만을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24년 만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명년이 기한’이라고 시간을 정해 주신 것에 대해서 주님을 의심하고 원망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감사하였습니다. 자신을 잊지 않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자신의 간구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자신의 기도를 잊지 않고 들어 주셨던 그분의 변치 않는 사랑을 온 마음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기쁜 마음으로 온 가족과 함께 할례를 행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것입니다.

소망은 그렇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갖는 꿈과 희망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은, 낙천적인 인생관은 우리의 인생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인해 갖는 소망은 우리에게 지극히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 소망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망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 소망을 갖는 자마다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마음에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소망은 단지 그뿐일까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것, 그것이 전부일까요? 왜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라는 약속은 없을까요? 왜 그런 설명이 빠져있는 것처럼 보일까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라는 붉은 악마의 구호처럼 ‘소망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라는 성경의 약속이 그 다음에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단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은 너무 감상적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매일 된다, 된다, 된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조금만 더 기다려라는 말만 반복하게 된다면 그런 소망은 오히려 우리를 지치게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소망을 가질 때, 그리고 그 소망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의지할 때 만약 우리가 좀더 구체적인 확증과 증명과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바로 그 다음 절입니다. 그런데 이 5,6절이 그냥 함께 지나가고 함께 붙어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성경 구절을 액면 그대로 읽을 때에 여러분은 이 구절이 보여주는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신학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학을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보면 성경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그림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가치가 돈으로 매겨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잘 아는 전문가들은 그 그림의 가치가 얼마인지를 대충 헤아릴 수 있습니다.
6절 말씀의 가치를 매긴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매길 수 있겠습니까? 백만원? 천만원? 1억? 10억? 100억? 사실 이 로마서 5장 6절의 가치는 무한대입니다. 값을 매길 수가 없을만큼 가치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이 모든 것이 바로 이 구절에 의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 하나 그 구절을 음미해 봅시다. 제가 하나씩 하나씩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가치가 있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약속에 대해서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그 약속의 소망에 대해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당연한 계약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미약하고 연약한 자일 뿐입니다. 부족하고 불성실한 계약자일 뿐입니다.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에 흔들리며 약속의 파기에 가까운 행동을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신실하심으로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래서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모든 불경건한 자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모든 부족한 자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모든 변화되지 않고, 또한 변화되려고도 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들 자신은 거부했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변화되지 않은 그 상태라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연약하더라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너무나 커서 그 사랑의 대상이 아무리 보잘것 없고 불성실하며 연약하고 악하더라도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5장 6절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입니다.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언젠가 이루어지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는 언젠가 이루어질 아주 구체적인 기미가 보일 때 혹은 언젠가 정말로 이루어질 때에는 그제서야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도 아닙니다.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이유는 애초에 그런 소망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애초에 연약한 자를 위해,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받을 수 없는 자에게 소망을 주셨고 소망을 기대할 수 조차 없는 형편없는 자들을 위해 소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언젠가 놀라운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소망 자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소망은 결코 우리를 부끄럽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소망을 주셨습니다. 소망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 소망을 붙들면서 그 오랜 시간을 살아왔는데 그렇게 살아오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붙들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 소망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 소망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옛날 어느 마을에 두 아들 때문에 골치를 앓는 아버지가 살았습니다. 첫째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하기를 싫어했고 둘째는 힘이 세나 일하기를 싫어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자 아버지는 첫째와 둘째에게 유산을 찾아 가지라고 했습니다. 첫째 에게 줄 유산은 "방에 있는 서재 안에 책 속에 있다." 라고 하였고 둘째에게는 "밭에 묻어놓았다." 라고 하였습니다. 말을 마친 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첫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산이 궁금해서 방에 있는 책을 뒤지다가 책에 마음이 쏠려 공부를 하게 되서 과거에 합격했습니다. 그 때서야 첫째는 아버지의 유산을 알게 되었다. 둘째도 유산을 찾으려고 밭을 일구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둘째는 괜히 힘만 뺏다고 생각했는데 기왕 일군 땅이니 씨나 심자 라고 생각이 바뀌어 나중에 수확 할 때 그 때서야 아버지의 유산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소망을 주실 때 그때는 어떤 절망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어떤 문제가 우리를 괴롭힐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소망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소망이 정말 이루어지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의 진정한 유익은 이루어지느냐 이루어지지 않느냐가 아닙니다. 그 소망은 붙드는 자에게 믿는 자에게 따르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그 증거가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을 행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은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망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소망을 붙들었다는 사실은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인되게 만드는 모습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사랑을 가지고 다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바라보십시오. 그 문제는 우선순위의 문제이며 진로의 문제이고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 문제는 없어지지 않고 다시 이 10월에도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그 문제속에서 우리 자신이 변화되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길 기다리다 지쳐 포기할 즈음에 절망할 때에 하나님이 새로운 소망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그 소망을 붙드십시오. 그 소망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소망을 붙드는 한 여러분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소망을 믿는 한 여러분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실 것입니다.

포기하지 말고 다시 소망을 갖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고민하는 그 문제가 바로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유산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문제와 씨름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때 진정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10월에도 여전히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문제가 더욱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어지기를 위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써 붙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개요 {4선지서}, <4이야기>, <3분석>, [2분류-선택]~[0복음-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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