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1)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4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5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2)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서 절제하려고 할 때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절제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말’입니다. 말은 우리의
삶에 가장 기본적이고 영속적이며 항구적인 활동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로 나타냅니다. 그래서 말하지 않으면 우리의 존재 자체도 무의미하게 될 것입니다. 말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이 말에서의 변화를 가져올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임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말은 너무나 원색적입니다. 때로 세상적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감정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합니다. 말은 우리의 희노애락을 나타냅니다.
또한 그속에서 모든 분노와 미움과 모든 악감정도 함께 나타냅니다. 그것이 어쩌면 당연하겠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예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말은 악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의미에서 그럴 것지만 만약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면 그것은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은 달라져야
합니다. 그렇게 달라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말을 하고자 할 때에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동일한 의미도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프랑스
파리의 미라보 다리 위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한 장님이 있었습니다. 그 장님은 "저는 태어날 때부터 장님입니다."라고 쓰인 팻말을
목에 걸고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곁을 지나가던 어떤 사람이 그 걸인에게 당신이 이렇게
해서 구걸하는 액수가 하루에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걸인은 침통한 목소리로 겨우 10프랑 정도(11,000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행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걸인의 목에 걸려있는 팻말을 뒤집어
놓으며 다른 어떤 말을 적어놓았습니다. 그로부터 약 한달 후, 그
행인이 그 곳에 다시 나타나서 말을 걸었을 때 걸인은 행인의 손을 붙잡고 감격해하며 물었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선생님께서 다녀가신 뒤 요사이는 50프랑까지
수입이 오르니 대체 어떻게 된 연유인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글을 써 놓았길래 이런 놀라운 일이
생기는 겁니까?` 그러자 행인은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별다른 게 아닙니다. 원래 당신의 팻말에 써 있는 글인 `저는 태어날 때부터 장님입니다` 라는 말 대신에 `봄이 오건만 저는 그것을 볼 수 없답니다` 라고 써 놓았을 뿐이죠." 그 사람은 바로 프랑스의 시인인 로제 카이유였습니다.
아주 단순해
보이는 것같은 변화였지만 그 표현의 차이가 바로 생각의 차이, 태도의 차이를 일으켰습니다. 우리의 말도 생각해 보십시오. 단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비관적으로 생각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고
교회를 다니지만 말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무슨 차이점이 있겠습니까? 말이 우리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인데
그러한 말이 예수님을 나타내며 예수님의 모습을 닮으려고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성화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며 진정한 구원을 항해 나아가게 됩니다. 그럴 때 진정한 봄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이러한 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말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선한 말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악한 말이 우리 입에서 나온다면 그로 인해서
화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고사하고 인간으로서의
모습조차도 유지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약3:5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약3:6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그로 인해서 나오는 것은 매우 큽니다. 작은 불이 어떻게 산 하나 전체를 다 태우고도 남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정도는
괜찮으리라고 생각한 말이 얼마나 다른 사람을 해치고 괴롭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아이의 돌팔매질이
개구리에게는 생명의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처럼 함부로 하게 되는 말은 많은 피해를 낳고 그로 인해서 많은 슬픔을 불러 일으키게 합니다. 그래서 말이 중요하고 또한 위험한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그 위험한 말, 통제되지 않은 말, 다듬어지지 않은 말, 불과 같이 모든 것을 태우는 말은 항상 절제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을 때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럴 때 그 말은 불의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는 것입니다. 불의의 세계는 인정사정 봐주지 않습니다. 가혹하며 잔인합니다. 그리고 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본질은 지옥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악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심판장소인 지옥은 본질적으로 악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지옥불에서 나온다는 것은 그 본질이
사탄적이며 악에 해당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불이 되는 혀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
상관없이 가장 죄악되고 사탄적이며 지옥불에서 심판받는 악의 본질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의 신분은 의롭고
경건하며 신실하였을 지라도 그가 입에서 불의 혀를 발휘하는 순간 그 어떤 악인보다도 악하며 그 어떤 사탄적인 행동보다도 더 사탄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악한 말로 인해서 모든 것이 다 불타버립니다.
성경에서
그러한 가장 악한 결과로 나타난 사람은 가룟유다입니다. 그의 비참한 모습은 얼마나 말로 인해서 모든
것이 다 타버릴 수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마27:3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4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5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그는 자신의
후회와 죄책감의 문제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상의하였고 그들은 그 모든 것을 전부 가룟 유다에게 덮어버렸습니다. 그가 예수님에게나 다른 제자들에게나 하나님께 회개한 것이 아니고 그저 괴로워만 하면서 대제사장의 악함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답은 그냥 아무런 회개도 하지 못하고 스스로 죽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네가 당하라’는 식의 악한
말, 분노의 말, 외면하는 말, 불타는 불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말을 위해서 우리는 혀를 다스려야 하고 감정을 다스려야 하며 마음을 다스려야만 합니다. 야고보사도는
이것을 마치 배를 움직이는 키에 비유하였습니다.
“약3:3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약3: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우리도
순간 순간 안좋은 말이 나갈 수 있지만 그런 말이 얼마나 안좋은 결과를 나타낼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입에 재갈을 먹여서 온힘을 다해서 막습니다. 이는 마치 커다란 배가 광풍에 밀려가면서도 키 하나로 선장이 배를 움직이려고 하며 뒤집혀지지 않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게 있는 힘을 다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뜻대로 함부로 말하지
않게 되고 감정대로 악을 쏟아내지 않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대로 온전하게 말을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나누는 대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평탄할 때에는 좋지만 안좋은 상황이 시작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순식간에 서로 나누는 대화는 광풍에 밀려가는 배처럼 안좋은 감정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그러면 배는 정신없이 휩쓸려가게 됩니다. 부모와 자녀가 나누는 대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뭔가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고 그에 대해서 부모의 거친 감정이 터져나옵니다. 그러면 자녀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대들기도 하고 항변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런 모습 자체를 견디지 못하고 부모의 언성이 높아집니다. 결국
불꽃이 튀기고 불이 붙습니다. 좋았던 부모자녀의 관계가 모든 것을 살라 버리면서 불타 오르는 것입니다. 친척과 동기와 이웃과 나누는 감정적인 대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더
심각하고 더 감정적이며 더 파국적인 일들이 일어납니다. 서로 싸우거나 밀치거나 폭행을 하거나 피해를
입힙니다. 그 모든 일들이 바로 한순간을 참지 못하고 자신을 어거하지 못하고 키를 돌리지 못하고 그냥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 모든
일이 다 일어나고 다 불타버리고 다 끝나버리기 전에 우리는 우리 주님의 모습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는 한없는 희생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을 감당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 스스로가 달리실 십자가를 메고 가셨던 것입니다. 자기가 달릴 형틀을 자기 자신이 끌고 올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렇지만 그것은 예수님 자신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지은
모든 죄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악한 성품과 모난 성격, 거친 마음과 불태워버리는 극단적인 말에 대해서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묵묵히 지고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에 예수님은 스스로를 얽어매셨습니다. 그 죄성에 대해서 자유를 누리신 것이 아니라 그 악한 모든 일들에 주님은 친히 온몸을 어거하셨으며 광풍에 흘러가는
우리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키를 붙들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며 올라가실 때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눅23: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주님은
우리와 우리 자녀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울지 말고 예수님이 바로 우리와 우리 자녀를 위해서 이렇게 십자가를 지셨구나를 생각하면서 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우리의 말의 악함대로 우리의 삶은 불타버리고 우리의 인생은 덧없고 우리의
가치는 사라져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이 있었기에,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예수님이 있었기에 우리는 죽음에서 살아났으며 죄에서 풀려났고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은혜를
기억할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졌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구레넷사람 시몬이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아무 생각없이 군병들에게 잡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는 자신이 졌던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자기와 자기 가족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는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롬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여기서
나오는 루포가 누군가 하면 바로 구레넷사람 시몬의 아들이었습니다.
“마가복음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다시 말해서
구레넷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메면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계기를 갖게 되었고 그 이후에 그의 자녀들이 예수님을 믿고 바울을 도와서 복음전파에
힘을 썼던 것입니다. 우리가 말에 있어서 절제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진다면 그것은 지금 당장은 괴로운 일일 지 몰라도 나중에는 나와 내 자녀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는 일입니다. 나의 절제하지 못하는 말과 나의 통제되지 못하는 말은 결코 내 자녀에게
좋은 유산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따라하며 그대로 모방하면서 더욱 커다란 불을 지피는 혀가
되고 배를 뒤흔드는 광풍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멍에를
짊어 지고 온옴을 어거하는 예수님의 사람들이 된다면 우리의 말 속에서 온전히 그리스도가 나타나며 그리스도의 향기가 흘러 넘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 삶속에 놀랍게 나타날 것입니다.
5만 번 이상의 기도응답을 받은 기도의 사람이자 3000명 이상의 고아를 기른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뮐러도 청소년 시절에는 동네에서 부랑자였습니다. 학생 때 그는 아버지의 돈을 훔치고 거짓말을 일삼고 친구와 어울려 유흥업소와 경찰서를 자기집처럼 들락거리다가
결국 교도소를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의 마음을 잡게 해서 오늘날 기독교사에 빛나는 성자가 되게
한 것은 말 한마디였습니다. 어느 날 동네 목사님에게 상담하러 간 그에게 목사님이 이렇게 말해 주었다고
합니다.
“조지! 나쁜
버릇을 하루아침에 고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한번 택한 자녀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 낙심하지 말고
노력하면 넌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이 말에
마음이 변화되어서 조지 뮐러는 우리가 아는 대로의 그러한 놀라운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렇게 자신의 아내에게 자신의 남편에게 아들에게 딸에게 친척에게 이웃에게 말해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내 온몸을 어거하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을 붙들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본받으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을 잘 사용하여 온전한 절제를
나타내고 그로 인해서 주님이 약속하시는 놀라운 은혜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