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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희락] 23사61; 1-3 여호와께서 알게 하시는 희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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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사61; 1-3 여호와께서 알게 하시는 희락_1

 

 2014.2.16.주.주일오전.

 

*개요:    62희락, 3분석, 5은혜-6결심

 

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신에 충만하여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 원하셨던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던 내용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신의 임재를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것, 정말로 기뻐하시는 것, 정말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그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신다는 말로써 표현되었습니다.

“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아름다운 소식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사야가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단지 전달자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 하나님께서 하려고 하시는 것,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아름다운 소식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게 하시려던 그 아름다운 소식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에게 기쁨을 얻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로 나타나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 1 …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조금 복잡하기는 하지만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엇을 해주려고 하시는가에만 촛점을 맞추어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쳐주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로써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로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이 많은 의미들이 본문 말씀에 함께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이것입니다. 이전에 희락을 누리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정한 희락을 누리게 하시고, 그들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사야를 통해 전해주고자 하셨던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들을 이루실 것을 미리 전하게 하셨고, 그 모든 일로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아름다운 소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은혜를 우리들에게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그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 말씀을 통해 바로 우리에게도 그 은혜를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은혜는 희락으로 슬픔을 대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받게 되면 우리는 변화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슬픔이 변하여 희락이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자가 되게 만드는 그 모든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환경적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을 변화시키셔서 이루시는 모든 변화입니다. 다시 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1 …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십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십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십니다. 그렇게 하셔서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십니다. 이것은 돈을 주시고 직장을 주시고 집을 주시고 옷을 주시고 먹을 것을 주셔서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그보다 별볼일 없는 마음만 고쳐주신다는 말도 아닙니다. 단지 자유를, 단지 놓임을, 단지 은혜의 해를, 단지 신원의 날을 주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은 돈을 주시고 옷을 주시고 먹을 것을 주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부분입니다. 더 핵심적이고 더 가치있으며 더 놀라운 일을 통해서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우리가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누군가에게 따로 유산을 남기지 않고 죽었습니다. 별다른 유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가 남긴 가구에 대해서 경매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집의 가구 경매가 이루어질 때 아무도 죽은 그 부자의 아들의 초상화를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은 어린 시절에 죽었기 때문에 그 부자는 그 그림을 무척이나 아꼈습니다. 그러나 모여든 경매자들은 다른 고급 가구들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그림에 대해서는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어서 낙찰자를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죽은 그의 아들의 초상화를 사겠다고 나선 유일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남루한 옷을 걸친 늙은 여인이었습니다.

왜 그 그림을 샀느냐는 질문에 그 여인은 수년 전에 소년의 유모였고 그 소년을 무척 사랑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초상화를 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초상화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그녀는 그림 뒤에 있는 두꺼운 서류뭉치를 발견했습니다. 그 봉투를 열어보니 그 속에는 유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의 사랑스런 아들의 대한 기억을 고이 간직한 사람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놀랍고 아름다운 변화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은 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희락 뒤에 진정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시지만 우리는 전혀 반응이 없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나 그 아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돈이나 물질이나 환경이나 그리고 그로 인해서 내 자신의 변화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주셔야만  물질을 주셔야만 환경을 바꿔주셔야만 희락이 있지 진정한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희락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고 그 가치를 알지 못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질이나 환경에 대해서 항상 결핍함을 느끼기 때문에 그것을 항상 애타게 찾고 항상 목말라 하지만, 정말 어느 정도 그것을 누린 사람은 더 큰 것을 바라봅니다. 더 큰 것이란 마음입니다. 마음의 평안, 마음의 변화, 마음의 새로움, 그런 것들을 소망합니다. 그런 것들을 결코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마음의 결핍을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부자가 되어서 그 허무함을 알고 난 다음에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통해 마음의 변화를 이루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하나님이 그속에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하심으로 변화를 이루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고 그 말씀에 대한 신뢰를 가질 때 비로소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마치 아들의 초상화 뒤에 유언장을 남겨놓았던 그 부자처럼 말입니다.

 

이제 정말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이러한 희락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 희락을 얻기를 원할 때 하나님은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십니다. 오늘 말씀은 신약에서 온전히 성취되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4장입니다. 누가복음 4장 16절에서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고 있습니다.

“눅4: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이 글이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라는 말씀은 이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예수님이 오셔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셨습니다. 눌린 자를 자유케 하셨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이 바로 모든 슬픈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희락이 되는 이유는 주님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돈을 주는 것보다 음식을 주는 것보다 그 어떤 것보다 더 귀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이 더 귀하고 놀랍다는 말은 괜히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이 더 가치있고 귀하다는 것은 그냥 과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것은 온전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그 말씀 속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사탄에게 가서 물어보면 사탄은 다 거짓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은 그 말씀 속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지 않는 사람에게 가서 묻는다면 그 말이 거짓이라고 할 것이고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묻는다면 그 말이 진실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필요하다면 하나님 안에서 더 큰 확신의 말씀을 찾아야 합니다.

 

성경 안에서 살펴볼 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 가장 귀한 희락이 되신다고 말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진정한 구원의 의미는 그것이 다시는 눈물이 없고 다시는 슬픔이 없는 삶을 확정받았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서 구원을 받은 우리는 변함없는 희락, 영원한 희락으로 인도함을 받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말씀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계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우리가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장막, 하나님의 집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있을 때 우리 눈물을 우리 눈에서 씻겨주십니다. 그때에는 다시 사망이 없고 다시 애통하는 것이 없고 다시 곡하는 것이나 다시 아픈 것이 있지 않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혹은 현세, 다시 말해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고 새로운 세상, 혹은 내세, 다시 말해 다음 것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구원입니다. 다시 울지 않아도 되는 진정한 삶이 시작됩니다. 바로 예수님으로 인해 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영화 속에서 사랑하던 두 사람이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이별을 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너무 슬퍼서 저도 눈물이 글썽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사랑했기 그 사랑이 끝나게 되는 이별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평생 행복하게 함께 살기를 바랬지만 죽음이 그들을 갈라 놓았습니다. 고통스러운 눈물을 흘리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헤어짐은 영화에서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삶속에는 그 피나는 눈물을 흘리게 되는 고통의 시간이 있습니다.

원치 않던 병을 얻어 고생하면서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경쟁에서 탈락해서 좌절감에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악한 일에 휘말려서 억울한 피해를 당할 때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모든 눈물 속에 모든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런 눈물을 흘리지 않게 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서는 항상 눈물과 고통과 괴로움이 상존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바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모든 눈물이 씻겨질 것입니다.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눈물을 씻겨주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더이상 눈물 흘리지 않게 되고 더이상 사망이나 애통함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 구원으로 나아가게 되었음을 기억할 때 우리에게는 희락이 생겨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희락을 설명해도 스스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한 그 희락은 누릴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제자리에서 걷는 한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몸을 앞으로 움직여야 앞으로 나아갑니다. 제자리에서 움직이려고 하지 않으면서 왜 나는 앞으로 걸을 수가 없지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몸을 기울여서 방향성을 가지고 의지를 가지고 나아가야 비로소 나아가게 됩니다. 희락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시는 희락을 마음에 새기고 그 희락을 향해서 나아가려고 할 때 그 희락이 내 속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정말 주님 말씀대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의 눈물을 씻겨주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곳에서 진정한 희락을 찾도록 소망하게 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희락할 수 있습니다.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말입니다. 그 나라에 가게 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면서 말입니다.

이제 이러한 희락을 향해 나아가보시기 바랍니다. 그 희락 속에서 여러분의 손을 붙잡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어깨를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을 밀어주시는 성령님을 느끼기를 바랍니다.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진정한 희락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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