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희락] 58히 12; 1-3 그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는 자들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pdf보기]
58히 12; 1-3 그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는 자들_1
2017. 6. 25. 주. 주일오전.
*개요: 희락의 의미, 62희락, 53희생-62희락, 6서신서, 4극본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오늘 말씀을 증거하기 전에 앞서 시 한편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가장 아름다운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않은 별 무엇을 해야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그 때가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어느 길로 가야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그 때가 비로소 진정한여행의 시작이다” 터키 시인인 나짐 히크메트라는사람이 쓴 시입니다. 그의 시속에 우리가 희락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희락은 아직 경험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이 세상에서 온전히 경험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희락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얻는 것입니다. 그러한 희락을 우리는 현재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얻게될 진정한 희락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희락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그 희락에대한 소망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망은 진정한 희락의 방향성과 일치될 때에 이루어질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희락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의 희락을 바라며 살아갈 때에그 희락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세상의 희락만 생각하면서 하나님 나라에서의 희락을바란다면 그 희락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진정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희락에 대한 소망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희락을 향해 나아갈 때 가장 큰 모범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던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그러한 희락을 바라보며 나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 희락을 바라보며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길이 필요합니다. 아무데나 산으로 올라갈 수있는 것이 아닙니다. 산에 올라가는 길을 찾아야 오를 수 있습니다. 그길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우리도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을 여전히 찾고 있는 분들이라면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가를 보아야 하고 그 길을 찾은 사람이라면 그 길에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진정한 희락에 대한 길을 가고자 할 때 그 길을 가장 먼저 만드시고 이루신 예수님께서 바라보셨던 희락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분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바라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보셨던 그 희락이 진정한 희락입니다. 그것은 결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희락이었습니다. 왜냐하면십자가에 죽으셔야 이루어지는 희락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기쁨이란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원 사역이 완성되는 기쁨이었습니다. 그 구원 사역은예수님 자신이 죽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살아 생전에 이 기쁨을 누릴 수가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기쁨을 바라보실 때 예수님은 그 기쁨에 대한 소망 속에서 사셨습니다. 그 기쁨을 위해서 십자가를 참으실 수 있었고 그 기쁨을 위해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렇게 죽으셨을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그리고 그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 것이 바로 스데반에게서 목격이 되었고 사도 바울에게서 목격되었으며 또한 사도 요한에게서 목격되었습니다. 이러한 증거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 진정한 희락을 온전히 이루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가신 길은 결코 허무하거나 무의미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보좌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그 보좌에 계시던 분이었는데 세상에 내려오신 다음에는 그 보좌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게이루어지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사역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이 땅에서 바로 그온전한 구원사역을 이루셨을 때 비로소 다시 원래의 보좌로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바라보셨던 그 희락은 바로 다시 원래의 보좌로 돌아가게 만드는 힘이었습니다. 그희락을 바라보시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주저앉아버릴 수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 희락을 따라가지 않았다면그 모진 십자가의 고통을 견뎌낼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희락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견뎌낼 수있게 만드는 희락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락입니다.우리가 그 나라에 도달하게 만드는 희락은 그 나라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 누리게 될 더 큰 기쁨입니다. 그 기쁨을 바라볼 때에 우리도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있습니다. 이 속담에 얽힌 민담은 이렇습니다. ‘옛날 한나무꾼이 나무를 하러 산 속 깊이 들어갔다가 우연히 동굴을 발견했습니다. 동굴 안으로 들어가니 길이점점 넓어지고 훤해지면서 눈앞에 두 백발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나무꾼은 무심코 서서바둑 두는 것을 보고 있다가 문득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옆에 세워 둔 도끼를 집으려 했는데 도끼자루가 바싹 썩어 집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마을로 내려와 보니 마을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어 있었습니다. 한 노인을 만나 자기 이름을 말하자, 노인은 “그분은 저의 증조부 어른이십니다.”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나무꾼이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대로 눌러 앉았다면 그나마도 돌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세상을 살아갈 때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에 이를 수없습니다. 그곳에서의 희락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 나라는 결코 좋은 곳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지옥이 더 살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혹은 죽은 이후에는 천국도 없고 지옥도 없는데 그것이 더 나은상태라고 생각한다면 굳이 하나님 나라를 애써 찾아나아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락을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에 들어가지 않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나라의 희락을 알게 되면 다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고 그 분이 이루신 것을 통해서어떠한 귀한 일들이 이루어졌는가를 생각하고 그 길을 따라가고자 한다면 우리도 그 희락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결국 그 희락을 따라 나아가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예수님 자신은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게 되셨는데 그 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그리스도인들이 생기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되었습니다. 그러한 구원의 복음이 우리에게도 전파되어서 우리도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생각해 볼 때 예수님의 기쁨은 단지 예수님 만의 기쁨이 아니라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기쁨을 우리가 간직하고 붙들 때에 우리가해야 하는 일은 바로 그 기쁨의 길을 걸어가셨던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히]12: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희락을 바라본다면 그 길을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의희락을 바라보는 것은 예수님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즉각적이며 육체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의 희락은 피곤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그 희락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다시 그 희락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예수님을 생각할 때 그 모습은 단순히 육체적 고난만 견디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단순히자신에게 일어난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시고 부끄러움만 개의치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죄인들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셨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참으심 속에서 하나님의 희락을 바라볼 수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본성상 예수님께 거역하던 그 죄인들처럼 육체를 따르고 싶고 세상의 희락을 따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예수님께서 그 모든 길을 바로그러한 자들을 참으시면서 이루셨음을 기억할 때 우리의 길도 바뀌게 됩니다. 산길에는 수없이 많은 갈림길이나오지만 항상 정상을 향해 나아가고 항상 예수님이 가셨던 그 선택으로 나아갈 때 우리도 그길을 갈 수 있습니다.그 희락이 나의 희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만났던 예수님은 처음 회심할 때에만 만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주의 즐거움을위해서 나아갈 때에도 그를 찾아와 만나주셨습니다. “[행]23:11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갔다가 유대인들에게 잡혔을 때에 그는 유대인들에게 죽을 뻔 하였지만 다행히 민란이 일어난 것을 보고 그를 구한 로마의천부장과 그 군인들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 앞에서 말할 기회를 얻은 뒤에 유대인들에게공회앞에서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한 증거는 그가 단순히 세상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아간 자가 아니라하나님 나라의 즐거움을 위해서 살아갔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들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그의 열심과노력과 희생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바울 곁에 서서 담대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로마에서도주님에 대해서 증언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의 희락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시대에 그런 일을 이룰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일에 동참할 수도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하게 되는것은 하나님 나라의 희락을 바라 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도 옆에서 그러한 희락을 더욱 크게얻을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세상의 즐거움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었다면 어떻게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희락을 향해서 나아가는 자들이라면세상의 즐거움은 때로는 포기하고 견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희락과 하나님 나라의 희락 중에서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희락을 선택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과정이피곤하기도 하고 낙심되기도 하지만 그러한 일을 잘 감당하다 보면 하나님 나라의 희락이 더욱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트럼펫이라는 악기가 있습니다. 이 악기는 입술과 호흡으로 부는 대표적인 악기인데 좋은 소리를내게 하기 위해서는 트럼펫을 부는 사람의 몸의 변화가 따라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호흡이 커지고 안정적으로되도록 횡경막의 변화와 복근의 강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몸의 변화가 이루어지도록참고 인내하며 다시 참고 인내하여 연습을 해 나갈 때 비로소 온전한 아름다운 소리가 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희락이 그냥 단순하게 이루어진다면 좋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희락은 진정한 희락이 아닐 것입니다. 단순하게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아마 세상의 희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단한노력과 연습으로 이루어지는 희락은 진정한 희락으로서의 가치가 생깁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살아가셨던 것이고우리도 그러한 희락을 향해서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그 결과가 아름답고 찬란하기에 그 과정을 따라가는것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고 가치있으며 의미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분명합니다. 1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우리에게 있는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그 앞의 11장에서 나왔던 믿음의 위인들을 의미합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은 전부 믿음의 증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믿음의증인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믿음의 모범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 모든 증인들을 통해서 우리가배우는 것은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속에서 예수님처럼 그 앞의 있는 기쁨을 바라보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희락을 바라보는 자들이 세상의 희락으로 스스로를 무겁고 얽매이게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러한것들은 전부 죄에 관계된 것들이라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 나라의 희락을 보지 못하도록 막는 것들입니다. 그래서그런 죄를 벗어버릴 때에 비로소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올바른 경주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무거운것과 얽매이기 쉬운 것을 벗어버리고 나서 경주를 할 수 있는 준비를 마친 후에는 본격적으로 경주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 경주는 인내로 이루는 경주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속에서 바라보며인내로 이 경주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이루며 나아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시는 희락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기쁨 속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희락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그러한 상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사도 바울의 삶속에서 그는 푯대를 향해서 부름의 상을 위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나라의 희락 속에 거하는 자였고 그 희락 속에서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희락을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귀한 시간이었음을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유명한 복음 전도자 무디는 유언으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땅이 물러간다. 천국이 열린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는구나!”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마지막 말은 이러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것,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버마 선교사였던 저드슨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예전에 헤어졌던 사랑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될 날을 생각하니 너무 기쁘다. 우리 하나님의 아버지 집에서 만나면 다시는 이별이 없을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였던스펄전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여보, 나는 좋으신 하나님과 함께 그토록 행복한 세월을 보냈다오" 우리의 희락은 이 세상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완전한 희락은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것입니다. 그 희락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 희락이완성될 날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주제설교 관련글[더보기]16설교소감 관련글[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