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충만] 62요일 2; 1-6 동행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
62요일 2; 1-6 동행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_1
2019. 2. 17. 주. 주일오전.
*개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핵심, 55동행-46지배-56충만, 1적용, 6서신서 [요일]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일]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일]2: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일]2: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2: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동행에서 자신의 죄와 문제를 자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표면적인 자세나 태도를 수립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동행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자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만약 자신이 연약하지도 않고 한계를 느끼지도 않는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스스로 강하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과 동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동행이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잘 이룬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동행을 잘 이루고 싶어서 계속 노력하는 중이라면 역시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진짜 문제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과의 동행을 이루려고 하지 않을 때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과 함께 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계속 멀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방향의 충돌이 신앙생활을 매우 힘든 것으로 만듭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는 성도 자신에게 그렇고 그러한 성도를 바라보시는 하나님께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게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생각하다 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더욱 잘 동행할 수 있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했지만 그렇게 동행하려는 사람은 새롭게 동행의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결국 모두에게 하나님과의 동행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말씀이 됩니다. 그 시작은 1절 말씀에서 진행됩니다. “[요일]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이것을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앞서 보았던 자신의 죄와 약점과 한계를 깨달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하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자신의 죄를 부인하고 약점과 한계를 거부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것은 돌이키지 않고 계속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도가 하나님을 따르고자 할 때 모든 부족하고 연약하여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을 사해 주시는 분이신데 아예 하나님을 거부하며 동행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그 죄 가운데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분이시만 예수님으로부터 떠나는 자의 죄를 사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의 죄를 사해 주십니다. 이는 반대로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는 자들은 죄를 사함 받지 못하는 자들임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오는가 혹은 나아오지 않는가로 죄를 사함받는가 받지 못하는가가 결정됩니다. 사실 한 사람의 죄를 사해 주시는 이유도 그가 주님께 나아오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나아오고자 하지만 죄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죄를 사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오면 과거의 죄를 사함 받고 미래에 죄를 짓지 않도록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으면 과거의 죄도 사함 받을 수 없고 미래에도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습니다. 몸이 아플 때 병원에 가는 것도 생각해 보십시오. 병원에 가면 약을 먹고 나을 수 있지만 병원에 가지 않으면 계속 아프게 되고 더 큰 병이 될 것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병원에 가지 않으면 나중에는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병원에 가면 이것 저것 검사를 하게 되고 치료를 받게 되고 입원을 하는 경우도 있고 수술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과정이 복잡하고 힘들지만 잘 감당하면 병이 나아서 다시 건강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병원에 가도 그런 과정을 잘 감당하지 않고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병은 좀처럼 낫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명목상으로만 따르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적으로 따르게 하십니다. 구체적인 삶의 모범과 행동을 보여주십니다. 본질적인 마음과 생각을 바꾸게 하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잘 따라 나가면 그분이 주시는 온전한 죄사함과 변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다시는 예전의 죄를 짓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왜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로만 나오면 이전의 죄를 사함받고 앞으로 죄를 짓지 않게 될 수 있을까요? 2절을 보십시오. “[요일]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화목 제물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사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어리석음과 죄악에 대해서 심판하십니다.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 이후로 모든 인간에게는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심판은 하나님을 만날 때 이루어집니다.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의 눈을 피해서 숨어 있을 때에는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에덴동산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모든 일을 다 보여주시면서 그들에게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바로 그 일이 우리가 죽으면 받게 될 일입니다. 살아있을 때 하나님을 피해 다닌다면 하나님을 만나게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죽으면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결코 소멸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재판을 받고 그로 인해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을 만나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심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심판이 있음을 알게 한다면 그들은 심판을 올바르게 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판이 없다는 사람들에게 심판의 존재를 알려줄 수 있는 정말 중요한 근거는 죽음 그 자체입니다. 죽는다는 것 자체가 심판의 존재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사탄은 아담과 하와에게 죽지 않으리라 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 말은 서로 충돌합니다.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도대체 이 두 가지 말 중 진실은 무엇이었습니까? 죽음 그 자체가 심판의 증거입니다. 사탄은 그 심판 자체를 부정해 버립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게 합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존재를 확신시키셔서 선악과를 먹지 않게 하시지만 사탄은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 말씀대로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도 이미 인간에게 존재하는 죽음이 심판의 존재를 보여주지만 사탄은 죽음은 존재하지만 심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 그 다음에 오는 영생과 영벌, 천국과 지옥을 대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깨달아야 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심판으로 죽었고 그 다음에는 그들의 삶에 대한 영원한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 거한 시기가 얼마 되지 않는데 그에 대한 심판이 죽는 것이었다면 그가 930년을 살면서 지은 죄에 대한 대가는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음은 심판의 증거입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 말씀대로 죽음을 볼 때 우리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자들로서 언젠가는 죽는 존재이고 그 후에는 심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심판에서 죄를 사함받는 방법은 예수님께서 그 죄를 사해 주시는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죄를 사해주실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은 온 세상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예수님이 치루신 죄값은 온 세상의 모든 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온 세상의 모든 죄보다도 더 가치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모든 죄를 사해주실 수 있었고 그 죄사하심 덕분에 우리는 심판을 피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께로 나아올 때에 진정으로 올바르게 죽음과 심판을 대비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제는 해야 하는 것을 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놀라운 구원의 효력은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모든 죄를 위해서 죽으셨음을 고백하며 받아들일 때 이루어집니다. 그 고백은 예수님이 온 세상의 모든 죄보다도 더 가치있는 분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모든 죄보다도 더 귀하심을 부인한다면 결코 이러한 믿음을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죄사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아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예수님의 죄사하심을 받는 자가 됩니다. 3절을 보십시오. “[요일]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요일]2: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이 과정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을 아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 –> 예수님을 아는 자 –> 예수님을 따르는 자 이것은 하나의 발전과정입니다. 여기에서 아예 아무 것도 안 믿거나 모든 것을 믿고 따르면 혼란이 없는데 문제는 일부만 믿고 일부는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지만 알지 않는 자이거나 예수님을 알지만 따르지 않는 자입니다. 그들에 대해서 성경은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해서 바라는 것은 진실을 말하거나 진리를 속에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바로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 했던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시는 것은 너무 과도한 일인가요? 뿐만 아닙니다. 애초에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죽으리라 하시던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과도한 것이었나요?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오직 선악과만 먹지 말라던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나 지나친 요구였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이유는 그 유혹이 너무 강렬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을 먹지 않고는 견뎌낼 수가 없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심판이 없으리라는 사탄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게 되었고 결국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에덴동산 밖의 이 현실의 삶 속에서 우리는 심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의 뜻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심판을 깨달으면서 돌이킬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계명을 알게 되고 그 속에서 영생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요일]2: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2: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그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과 동행하려고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됩니다. 우리가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시고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죄를 사하신 예수님 안에 있고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행하면서 살아갈 때에 그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바로 이것을 행하면서 사는 삶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잘 기억하여 우리와 동행하시는 동행의 원천이자 근원되시는 예수님을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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