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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충만] 59약 1; 19-25 듣기만 하는 자와 실천을 행하는 자

  2018_1125-112127.pdf 454.9K 0 5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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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1; 19-25 듣기만 하는 자와 실천을 행하는 자_1

  

 

  

2018. 11. 25. . 주일오전.

  

 

  

*개요: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의 축복, 56충만, 4극본, 6서신서,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1: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1: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1: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Jas]1:22 Do not merely listen to the word, and so deceive yourselves. Do what it says.

  

 

  

[Jas] 1:22  Γίνεσθε δ ποιητα λόγου κα μ μόνον κροατα παραλογιζόμενοι αυτούς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수레 안에 들은 것이 별로 없으면 그 안에 들은 작은 물건이 덜그럭거려서 물건이 가득 찬 수레보다 더 시끄러운 법입니다. 그와 같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자기가 아는 작은 것을 가지고 말하다 보면 그 분야를 정말 더 잘아는 사람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확실히 아는 것이고 많이 아는 것이지만 그런 일에 관심이 없으면 적게 알고 틀리게 알아도 많은 말을 하게 됩니다이러한 많은 말은 그만큼 구체적인 실천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인 실천이 없기 때문에 많은 말은 공허하고 무의미하게 됩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과 보이지 않는 사람을 구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이런 모습을 하는 것을 비난하고 비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저 자신도 빈 수레를 요란하게 끌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정말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빈 수레임을 자각하고 조심하며 가능한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방향성을 갖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누구를 지적하고 비난하고 비판할 필요없이 서로서로 조심하면서 더욱 발전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혹시 누가 알겠습니까? 지금은 빈 수레라도 나중에는 가득 찬 수레가 될 수 있을지. 그래서 우리는 더욱 신중해지고 더욱 지혜로워져서 하나님의 은혜를 담는 수레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말씀은 바로 이러한 지혜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우리가 듣기만 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에 유익한 강연을 듣는 것이 아니고 인생의 교훈집을 읽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 하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 실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순한 이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에 이르게 되는 이해가 중요한 것입니다

  

종종 선생님이 학생들을 데리고 거리에 나와서 거리 청소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집게와 쓰레기 봉투를 들게 한 뒤 어디를 어떻게 청소할 지를 설명해 줍니다. 설명이 끝나면 학생들이 나서서 일할 차례입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아무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시 선생님이 우리가 왜 청소를 하려고 하고 청소를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고 그것을 통해서 어떤 목표가 이루어지는가를 말해주지만 역시 아무도 청소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선생님의 마음은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아무리 설명을 열심히 듣는다 하더라도 실행을 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실행의 중요성을 25절 말씀이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1:25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여다 보는 자들은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닙니다듣고 그대로 실천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습니다. 들여다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대로 실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기만 한다고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 말씀을 유심히 들었다 하더라도 막상 실행할 때가 되었을 때 선생님만 멀뚱멀뚱 쳐다보는 학생이 있다고 해 보십시오.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그냥 겉모습일 뿐입니다. 속마음이 어떤지는 어떻게 행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마음에서 그것을 실천하려고 할 때 그 행하는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 행동으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대해서 복을 주십니다.

  

행하고는 싶었지만 잊어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어디를 청소하라고 말을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청소할 때가 되니 그 청소구역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청소구역을 다시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또 청소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이 학생은 또 잊어버립니다. 답답하지만 선생님은 인내를 가지고 또 다시 설명해 줍니다. 그런데 이 학생은 돌아서서 또 잊어버립니다. 이런 일의 무한 반복이 바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잊어버렸다고 말은 하지만 그것이 정말 몰라서 잊어버린 것인지 잊어버리고 싶어서 잊어버린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일정 시간이 주어져 있어서 청소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는 하지만 그 기회가 무한정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가 되면 청소를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청소를 못했다면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 할 것입니다. 잊어버렸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잊어버렸기 때문에 복을 받지 못했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는 지금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자신의 상태를 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의 말씀에 잘 비춰집니다.

  

“[]1: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1: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거나 행하려고 생각하지도 않으면 그는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고 나서 그 모습을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습니다. 말씀은 거울과 같아서 항상 자기 자신을 보게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반사경으로 만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비추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먼저 자신을 바라보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일 뿐입니다. 정작 자기 자신을 비춰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만 말씀을 들이댄다면 그것은 말씀 뒤에 숨는 비겁한 사람일 뿐입니다. 또한 그것은 종종 사탄이 사용하기도 하는 방법입니다.

  

 

  

얼마나 사탄이 성경을 잘 사용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탄은 말씀을 사용하기는 하나 그것을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사탄이 성경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그런 점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러한 악한 모습을 본받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들여다 봐야지 남을 비추기만 하면 안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욱 종교적이 되고 더욱 폐쇄적이 되며 비판적이 되고 냉소적이 되고 반항적이게 됩니다.

  

누가복음에서 사탄이 성경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께 시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4: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4:10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4:11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4:1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사탄은 성경말씀을 인용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성전꼭대기에 뛰어 내리게 하려고 했습니다. 성경말씀을 따르게 되면 예수님을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리게 할 수 있으니 사탄은 얼마나 이 시험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이러한 성경의 사용으로 꼼짝없이 예수님을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시험은 두 가지 단어로 표현됩니다.

  

시험하다(훈련), δοκιμάζω, dokimazō 

  

시험하다(미혹), πειράζω, peirazō”

  

훈련의 의미를 갖는 시험하다는 통과하게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하지만 미혹하다는 의미의 시험하다는 떨어뜨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선한 결과를 목표로 하면 도키마조이고 악한 결과를 목표로 하면 페이라조로 사용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페이라조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미혹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사탄은 성경말씀으로 예수님을 넘어뜨리게 하려고 사용하셨지만 예수님은 성경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법으로 사탄도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내용을 미혹되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다윗도 밧세바를 범했다느니 솔로몬도 아내가 많았다느니 하면서 자신의 죄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는 것입니다이처럼 많은 성경의 이야기가 안좋은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올바로 사용하는 것은 그것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 악함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행동을 실행할 수 있겠지만 만약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고 스스로를 선하게 생각하면 선한 행동을 행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여전히 악한 행동만 계속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지혜로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에게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가 듣기만 하는 자가 되지 않고 구체적으로 실천을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따르는 자에게 주시는 좋은 것은 단순히 복으로 끝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21,22절입니다.

  

“[]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1:22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때 그것은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영혼을 능히 구원하는 마음에 심어지는 말씀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분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구원하십니다. 우리의 육체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도 구원하십니다. 그 모든 것은 말씀이 우리 마음에 심어지는가 심어지지 않는가에 달려있습니다그리고 그것을 온유함으로 받는가 아니면 속이는 자가 되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서 마음에 심어지게 되면 그것이 우리 속에서 역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퍅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마음에 아무 것도 심어지지 않으면 아무리 귀한 말씀도 우리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결국 메마른 마음이 될 뿐인 것입니다

  

왜 사탄이 애초에 하나님의 천사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타락한 천사가 되고 말았을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또한 왜 가룟 유다가 예수님과 함께 12제자로서 3년간을 함께 살았지만 결국은 예수님을 팔아버리는 자가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도 법적인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성락교회의 김기동씨나 만민중앙교회의 이재록씨 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왜 그렇게 악을 행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사탄이나 가룟 유다의 마음에 새겨지지 않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 잘못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다시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뜻과 원칙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속에 있는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릴 수가 없고 결국에는 강퍅한 자가 되고 말 수 밖에 없습니다.

  

이로 인해서 결국은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됩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자기자신의 추함과 악함을 속이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것은 스스로 미혹하는 것이고 마침내 실족함에 빠지는 결과를 얻게 만듭니다. 이를 헬라어로는 ‘παραλογίζομαι, deceiving’이라고 합니다. 말로써 현혹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 이외에는 다른 지혜로운 길이 없음을 기억하고 그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서 실천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야고보 사도를 통해서 우리가 행해야 하는 중요한 실천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1: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1: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이 말씀이 처음부터 가장 온유하고 가장 성내기를 더디 하며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던 자가 말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 자신이 날 때부터 그러한 자였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가 처음에는 형이었던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반감을 가지고 믿지 않는 자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되심을 믿고 그 말씀을 온전히 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런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성을 내고 또한 성을 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을 행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마음 속의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지 못하고 우리 영혼을 구원할 마음에 심겨지는 말씀을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이 하나의 실천을 행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실천도 행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보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보며 그대로 따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로 인해서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가 될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인생 속에서 중요한 실천을 행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을 따라서 실천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그럴 때 우리의 살아가는 시간이 복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시고 모범을 보여주셨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받아 살아가는 귀한 삶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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