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충만] 58히 1; 1-5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 속에 있는 성도들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
58히 1; 1-5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 속에 있는 성도들_1
2018. 10. 7. 주. 주일오전.
*개요: 은혜의 본질과 의미, 56충만, 2분석, 6서신서 [히]1: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4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히]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히브리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을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시작하고 그리스도로 끝이 납니다. 그리스도의 본질을 설명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적용으로 끝이 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놀라운 설명 속에서 우리는 은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은혜의 본질이란 단순히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선물이 아닙니다. 은혜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스러운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구원도 있고 영생도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구원이 없었다면 우리의 인생은 불신자들과 동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구원이 있기에 우리의 인생은 불신자들과 달라졌습니다. 삶과 죽음의 의미가 모두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버스터미널에 가면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가는 수많은 버스들이 있습니다. 원하는 목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올바른 버스를 타야 합니다. 아무리 승차권을 잘 구입했다 하더라도 버스를 잘못 타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중간에 다시 돌아오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라는 은혜의 버스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그 버스가 올바른 버스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라는 은혜의 버스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히브리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무조건 따라오기만 하면 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면 스스로 이해해서 깨달음을 가지고 따라와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이자 히브리서 서두의 시작은 곧장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히]1: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히]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브리서는 일반적인 서신서에 나오는 서두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한 누가 쓴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를 바울의 저작으로 보는 역사가들이 있습니다. 유세비우스, 클레멘트, 오리겐, 아다나시우스 등은 바울의 저작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때부터 히브리서의 저자를 알 수 없다고 하거나 혹은 바나바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어왔습니다. 내용적으로 사도 바울의 다른 저작과 유사한 사상과 언어적 표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감안해 볼 때 기록상 히브리서의 저자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그 내용상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1절에서 보여지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하나님’은 구약에서 계시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계시는 신약으로 넘어왔을 때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바로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신약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섬겼었지만 예수님 이후부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그 전에는 단순히 혈통과 율법에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의 의미였지만 이후에는 은혜와 복음에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심으로 나타났는데 하나님은 일찍이 그분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셨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모든 세계를 지으셨을 때 이미 예수님은 만유의 상속자이셨습니다. 그 모든 것이 이미 존재하고 숨겨져 있다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말씀하실 때 비로소 인간에게 계시된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역할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은 단순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그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3절입니다. “[히]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이러한 영광스러움이 있으십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에 비해서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동등한 권능과 영광의 존재시라는 것입니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두 분이 너무나 친밀하시고 너무나 서로 사랑하시는 관계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영광스러움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의 말씀대로 만물을 붙드셨습니다. 만물을 다스리고 인도하셨습니다. 또한 세상에 내려오셔서 대속하심으로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셔서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렇게 영광스러우신 분이심을 그분을 믿는 자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광에 근거합니다. 버스를 탈 때에 이 버스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를 거쳐서 어디로 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버스는 종점에서 출발해서 정류장을 거쳐 목적지로 갑니다. 정류장에서 자신이 가려고 하는 목적지로 가는 버스를 잘 보고 타야지 그렇지 않으면 목적지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본체의 형상이십니다. 그분은 애초부터 하나님에게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구원과 대속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을 따라서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으로 갑니다. 그곳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우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곳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목적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바로 옆에서 예수님을 따라간 한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눅]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눅]23: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눅]23: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고백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자신들과 다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와 예수님이 연결되는 것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 하나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이 의로우심을 고백하며 예수님께 도움을 간구한다는 그 하나만으로 예수님께서는 그를 자신과 함께 하게 하셨습니다. “[눅]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치 예수님은 자기 버스에 그를 태우신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으로 나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버스에 그는 올라탔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어둠이 아닙니다. 그곳은 심판도 처벌도 아닙니다. 그곳은 낙원입니다. 슬픔과 눈물과 애통이 없는 천국입니다. 그렇지만 그보다 먼저 선행되는 것은 그곳은 예수님과 함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있기를 바라는 자들이 그곳에 갈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함께 있어 낙원을 소망하는 자들로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 안에 있는지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휴게소에 들러 잠시 쉬는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디 멀리 가지 말고 화장실만 갔다 오고 재빨리 되돌아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곳에 눌러있다 보면 버스는 기다리지 않고 떠나버리고 맙니다. 어쩌면 왜 자신을 기다리지 않았느냐고 불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버스는 잠시만 쉬는 것이 목적이었지 각 사람의 관심사를 다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의 일정과 버스의 예정시간을 맞출 수가 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차리고 버스의 휴식계획을 잘 맞춰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통과해서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잠시 세상에 사는 자들이지 세상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기인식이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금새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동화되어버리고 맙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다시 한번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영광과 그 뛰어남에 대해서 성경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히]1:4 그가 천사보다 훨씬 뛰어남은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예수님이 천사보다 훨씬 뛰어나십니다. 그 이유는 천사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본체의 형상이신 예수님을 고작 천사들에 비교할 수 있는가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천사숭배사상은 초대교회 당시에 있던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천사들을 만드신 예수님을 천사와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되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던 천사숭배 사상때문에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예수님을 천사보다 뛰어나다고 말하는 것이고 굳이 비교를 하자면 아주 훨씬 뛰어나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천사보다 예수님이 훨씬 뛰어나신 이유는 그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셨기 때문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이름을 얻으셨기 때문에 천사보다 훨씬 뛰어나신 것일까요? 그 이름이 도대체 어떻게 기업이 될 수 있을까요? 이점이 중요한 것은 우리도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시고 그로 인해서 천사들보다 뛰어나게 되셨다는 것을 기억할 때 예수님의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한 뛰어남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받은 아름다운 이름이 무엇이며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업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받으신 이름이 무엇인가를 살펴봅시다. 5절입니다. “[히]1: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하나님은 천사 중 그 어느 누구에게도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또한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시지도 않으십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아버지라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신 것은 정말 예수님을 낳으셨다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낳았다는 표현처럼 아주 친밀하고 절실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시는 그 친밀한 관계가 잘 표현된 내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얻으신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창세 전부터 존재했고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다시 나타났으며 또한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하는 명칭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전부터도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이 후에도 사랑하는 아들이십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일을 행하실 때마다 다시 한번 강조되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가 이러한 아름다운 이름을 얻으셨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끊임없이 강조되는 이 놀라운 이름이 어떻게 기업이 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기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이름으로 인해 예수님이 영광스럽고 탁월하시며 뛰어나신 것처럼 우리도 그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라 부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되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놀라운 기업입니다. 그 기업의 가치와 영광을 기억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 휩쓸려 사는 자가 아닙니다. 또한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자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속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온 자들이며 앞으로도 항상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기억하며 그 아름다운 이름을 간직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이름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우리 속에서 보실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되심처럼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과 자기인식을 잊어버리지 말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을 항상 바라보며 사시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주제설교 관련글[더보기]16설교소감 관련글[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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