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우리는 살다보면 다른 사람들이 아픔이나 슬픔에 대해서는 둔감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아픔과 슬픔에 대해서는 매우 예민하지만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괴로움이 없습니다. 이러한 반응은
현대인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모습입니다. 이전처럼 공동의 개념이 컸을 때에는 함께 울고 함께 웃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괴로워했지만 지금처럼 개인의
개념이 클 때에는 더욱 혼자 울고 혼자 웃고 혼자 슬퍼하고 혼자 괴로워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앞으로 이러한 분위기는 더욱 확장될 것입니다. 서구사회의 발달된
개인주의 영향과 현대사회의 바쁘고 분주한 삶으로 인해 더더욱 우리는 개인적인 상황이 될 것입니다. 점차 경조사에 시달릴 일이 없을 테고 점차 친척간의
왕래도 줄어들 테고 시월드니 처월드니 하는 말도 점차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더욱 더 마음은 편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어서 다른
사람들로 인해서 괴롭고 슬프고 마음 상할 일이 없게 되면 좋을 것 같은데, 현실속에서는 이상하게도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명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스트레스는 점차 줄어들어 가지만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스트레스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되면 행복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럴 수록 더욱 자기 자신의 스트레스가 자각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다른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게 되면 결국에는 혼자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속에서 혼자가 되어버리면 모든 고통을 다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우리 자신의 세계에 갇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슬픔과 괴로움을 생각하면서 그들의 어려움과
괴로움에 함께 동참하면서 함께 아파하면서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의 슬픔과 괴로움에 갇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의 기쁨과
즐거움에도 동참하게 됩니다. 나 자신은 기쁘고 즐거울 일이 없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행복과 즐거움 속에서 우리 자신도 함께 동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으로서 우리의 인생이라면 성도로서 우리의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믿게 된 이상 우리는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픔과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하나님의 슬픔과 괴로움에 대한 말씀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더이상 하나님 만의 것이 아님을 깨달을때, 다시 말해서 우리도 하나님의
슬픔에 동참하고 그 괴로움으로 인해서 괴로워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 세상을 지으신 그 하나님과 연결되어집니다. 우리의 인생은 바로 하나님 안에서
의미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본 성경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잃어버리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의 일로 인해서 무엇을 잃어버리셨을까요? 무엇을 잃고 괴로워하시며 슬퍼하실까요?
19절은 하나님이 잃어버리신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본문을 아담과 하와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범죄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에덴동산에서의 안락함을
잃어버린 것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잃어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고 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셨지만 그들은 불순종함으로 그 의미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 이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를 원하셨고 그들이 계속해서 생명나무를 먹으면서 살아있는 존재들이 되기를 원하셨지만 아담과 하와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잃어버리신 것이고, 하나님의 슬픔이자 괴로움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신 아담과 하와가 흙으로 돌아가게 된 하나님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 경험을 해보게 된다면 그 슬픔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저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어렸을 때에 키우던 개가 죽었는데 그 개를 강변에 묻어준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개야 많으니 새로운 개를 키우지 그러느냐고 했지만 강아지때부터
데리고 온 그 개는 특별했습니다. 한번 집에서 나가서 길을 잃었다가 몇달만에 다시 찾아온 그 개는 특별했습니다. 개는 많이 있지만 어린 시절을
함께 했고 많은 경험을 함께 했던 그 개는 특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개가 죽었을 때 저는 참 많이 슬퍼했습니다. 그때 저는 고등학생이었고
시험기간이었지만 도저히 마음 편하게 집중해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상실감은 이루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개를 강변에 묻고
흙으로 덮었을 때에 저는 마치 지나간 모든 시간들이 다 사라지는 듯이 괴로웠습니다. 흙으로 돌아가서 그러려니 하는 것이 아니라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너무나 괴로웠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그 가족을 땅에 묻으면서 괴로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화장을 한뒤 그 재를 뿌리면서 괴로워합니다. 자녀를 잃은 부모에게 새롭게 자녀를 낳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세상을 떠난 자녀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자녀입니다. 결코 그 무엇으로도 대치할 수 없는 상실감입니다. 부모를 잃은 자녀에게 그 부모님의 부재는
그 어느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입니다. 사랑하는 그 누군가를 잃은 사람에게는 어떠한 말로도 적절한 위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 아파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경험하시는 이러한 상실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손실과 결핍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공들여 만드신 아담과 하와가 흙으로 돌아가게 된 이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그 슬픔을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우리의 수준에서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함께 그 괴로움을 공감할 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슬픔과 결핍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큰 슬픔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아담과 하와가 죽을 자가 된 다음에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 가죽옷을 ‘지어서’ 입히셨다는 것은 가죽을 벗겨서 입히셨다는 뜻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 동물이 죽임을 당했고 그
동물에게서 가죽을 벗겨내셨습니다. ‘지어’라는 히브리어는 ‘asha’라고 하는데 이는 ‘눌러서 쥐어짜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렇게만 보면 하나님은
그냥 아담과 하와를 위해 동물 하나를 희생시키셨구나 생각할 수도 있는데, 사실 이 동물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인간을 위해 대속제물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혀서 그들의 수치심을 가려 주시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서 죽으셔서 그들의 죄를
사해주실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잃어버리시는 것은 바로 그 아들 예수님입니다. 앞으로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의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을 대속제물로 보내셔야만 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손실은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을 잃어버렸고 또한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도 죽게 하실 수 밖에 없었지만 그 모든 슬픔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몸은 죽으나 영혼은 살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몸과 온전한 영혼을 다 얻을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영혼이 있다면
몸의 죽음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영혼을 받으신다면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 영혼이 다시 살아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을 받으셨습니다. 몸은 죄에 대한 댓가로 내어 줄 수 밖에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을 받으셨을 때 비로소 모든 죄에 대한 댓가는
치뤄지고 그로 인해 생긴 모든 손해는 다시 다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으시면서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맡겼고 아버지는 그 영혼을
받으셔서 그로 인해 다시 예수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눅23:46절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 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그렇게 영혼을 하나님께 드리셨던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고전6:14절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음을 증거합니다.
“고전 6: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하나님의 고통과 슬픔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상실감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무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잃어버리셨던 주님을 다시 살리셨고 그리고 그와 같이 주님을 의지하는 인간들을
다시 살리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안에서 죽는 자들에게는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다시 그 영혼으로
살리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것을 깨닫게 되면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게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죽기
전까지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자신의 영혼의 구주로 고백할 때에 그들을 죽더라도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몸은 흙으로 돌아갈 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온전히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잃어버리신 모든 것들 속에서 하나님이 다시 되찾으시는 것임을 기억할 때에
과연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신 것은 무의미했을 까요? 이 모든 일을 애초에 시작하신 것은 정말 손해와 슬픔만
가득한 것이었을 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슬픔을 깨닫고 그 상실을 이해하고 다시 주님께 돌아올 수 있었을 때에, 그 한없는 하나님의 고통과
괴로움을 이해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의 구원을 받아들이게 되는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그래서 이 모든 하나님의 슬픔은 바로 우리들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구레넷 사람 시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예수님 대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사람이라 예수님의 사정에 대해서
잘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이 선량한 사람이 왜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는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고난과 그 고통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도왔던 그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슬픔에 동참해서 그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에덴동산의 모습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자신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난 뒤에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스스로 살길을 찾지 못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이제 스스로 살기 위해서 생명나무를 구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스스로 구원받기 위해서 에덴동산을 찾아나설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우셨는가를 이해할 때만이 우리는 에덴동산이나 그
생명나무를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어서 하나님의 에덴동산,
하나님의 생명나무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잃어버리신 바로 여러분을 찾으십니다. 그 상실감에
안타까워하십니다. 슬퍼하시고 괴로워하십니다.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에 대해서 우리들에 대해서 괴로워하십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주님께로
나아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슬픔에 동참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 슬퍼하며 부끄러워하고 죄송스럽게 여기는
마음을 가집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를 그 마음으로 불러 주시는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진정으로 다시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사람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나님의 슬픔에 동참하고 생명을 얻는 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