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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희생] 66계 1; 17-20 죽었었다가 살아 있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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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1; 17-20 죽었었다가 살아 있는 자_1

  

 

  

2019. 4. 21. . 주일오전. 부활절.

  

 

  

*개요: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남, 53희생, 2분석, 6서신서

  

[]1: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1: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은 만나는 자에게는 축복이요 감사입니다. 그 만남은 항상 예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기회가 됩니다. 사도 요한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예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은 놀라운 감사와 영광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부활을 기뻐하면서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자들은 다 만나 주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을 만나게 되면 모두가 기뻐하며 감사하고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그 만남이 거절될 까봐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다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17절에서 사도 요한은 그러한 만남의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1: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두려움으로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오른손을 얹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해 주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단지 본 것만 아니라 만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만났을 때에 예수님은 그에게 오른손을 얹어 주셨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진정한 만남입니다. 그것은 단지 멀리서 보기만 하는 것과 다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주님을 만나려고 해야 하며 또한 만나야 합니다.

  

여러분은 누군가 유명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으십니까? 보는 것 말고 만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둘은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실제로 만나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고 그냥 보는 것에는 용기가 필요없습니다. 저는 예전에 호랑이 선생님으로 유명한 조경환씨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싸인 한번 받아보려고 얼마나 그 근처에서 서성거렸는지 모릅니다. 친구들과 몇 번을 망설인 끝에 마침내 싸인을 받을 수 있었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유명배우를 만나도 그렇게 겁이 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는데 하물며 예수님은 어떻겠습니까? 이것이 정말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아무 감정없이 그냥 무덤덤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렇게 보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찌른 자들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비방한 자들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을 무시하고 부인하며 외면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보기만 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다가 방향을 돌려서 자기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길은 결코 좋은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때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손을 잡아주시고 손을 얹어 주십니다그리고 이끌어 주십니다. 두려워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불러 주십니다. 그래서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자들을 잘 대해 주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이전에 죽으셨던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1:18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주님이 언제 죽으셨던 적이 있으십니까? 지금을 기준으로 2천여년 전에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 때를 주님이 잊어버리시겠습니까? 자신이 죽으셨던 때를? 주님은 그 때를 결코 잊어버리시지 않습니다. 아니 절대로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 때 주님은 참혹하게 십자가에 달려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인간이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다 당하시고 고통스럽게 죽으셨습니다. 그 죽으심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그러나 그 이후에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그렇게 죽으셨던 이유는 바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대신 죽으셨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주님은 모든 죄값을 지고 죽으셨지만 주님 자신이 죄가 없는 의인이셨기 때문에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예수님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심판주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만난 자들을 사망과 음부에서 이끌어 내십니다. 또한 사망과 음부에 들어가지 않게 하십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이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자들을 죽지 않게 하시며 음부에 들어가지 않게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자들을 친히 만나 주시며 그들을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이 한없이 사랑과 긍휼이 풍성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럴 때 사망과 음부의 권세에서 나와 생명과 낙원으로 인도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에 대해서 주님께서 알게 하시는 제일 중요한 방법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기록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하시고 구원과 심판에 대해서 알게 하십니다.

  

“[]1: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예수님은 가능한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예수님이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들에게 그 일을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요한이 본 것,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 그리고 앞으로 이루어질 것에 대해서 요한은 기록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을 읽고 있는 우리는 이 기록에 대해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판단 기준입니다.

  

사람들은 기록만으로는 다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현상을 필요로 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현재 있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앞으로 이루어질 일에 대해서 구체적인 현상을 요구합니다. 실제적인 경험을 요구합니다. 그러면 믿을 수 있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있는 기록을 불신하는 한에서는 추가로 주어지는 경험도 불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인 경험도 그것이 잘못 이해될 때에는 뻔히 보면서도 믿을 수 없습니다. 마술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기록이 믿어질 때 경험도 의미 있지만 기록이 거부될 때에는 경험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거부해 버립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그로 인한 심판 만이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이를 다루는 기록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을 믿지 못하겠거든 차라리 다른 기록을 믿으십시오. 다만 내세를 말하는데 과학을 들이댈 수는 없습니다. 경제를 이야기 하는데 예술을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분야가 전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내세를 알고자 한다면 성경의 기록을 읽어야 합니다. 이러한 원리로 올바른 분야의 기록을 거부하면서 다른 기록을 근거로 할 수 없습니다. 또한 기록을 거부하면서 현상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사와 이적을 많이 행하셨지만 그것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벳세다와 고라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1: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11: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예수님은 고라신과 벳세대가 예수님의 모든 기사와 이적과 능력행하심을 보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을 때 차라리 소돔과 고모라가 더 먼저 회개하였을 것이고 그들이 받은 심판의 형벌이 훨씬 더 쉬운 것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경험을 하면서도 믿지 않는 자들이 많고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경험이 아니라 기록입니다. 그 기록을 중요하게 여길 때에 그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로 인해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어떤 존재의 근거를 나타내기 위해서 기록을 사용합니다. 인감증명서를 생각해 보십시오. 꼭 본인이 다녀야 하고 나타나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감증명서를 제출하면 본인이 나타나는 효력이 있습니다.

  

또한 모든 기록에는 주된 분야와 주된 대상이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내세에 대한 기록이며 믿는 자들과 믿을 수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도 요한에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기록해서 그 기록을 일곱 교회에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된 내용과 주된 대상이 정해져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

  

“[]1: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우리도 이 부활절에 성경의 기록을 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증거를 봅니다. 그 증거와 기록 속에는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담겨있습니다. 누군가 이 말씀을 거짓되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전달하였습니다. 이 전달된 기록을 귀히 여기고 잘 따라갈 때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보물지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보물지도는 보물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기록입니다. 지금 당장 보물은 없지만 보물지도가 있으면 보물이 있는 곳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보물지도가 있어도 그 위치로 나아가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용기를 내어서 그 위치로 나아갈 때에 비로소 그 보물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기록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록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기록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분을 만나기까지 따라야 하는 모든 인도하심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20절입니다.

  

“[]1: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그가 본 것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그 핵심은 예수님의 오른손에 붙들고 계시는 일곱 별의 비밀과 예수님이 거하시는 일곱 금 촛대입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자들과 교회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한번에 예수님을 만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딱 일곱 번의 만남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인간이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일곱 명의 교회의 사자들과 일곱 개의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 모든 기회가 다 사라지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냥 보기만 할 뿐입니다. 진작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고 믿지 못했음을 후회할 뿐입니다.

  

왜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까? 왜 예수님을 믿는다면 만나지 못했습니까? 왜 예수님을 만났다면 그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까? 우리에게는 일곱 명의 교회의 사자들과 일곱 개의 교회라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 사자들과 교회들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 누구에게든지 행하게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각 사람을 만나서 알려주십니다. 그것이 이 부활절에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예수님께 대한 기록의 핵심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처음이요 마지막이고 살아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이제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죽으실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으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예수님과 교통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이 그래서 의미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부활절의 모든 의미가 바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새로운 삶으로 나타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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