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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편안] 42눅 1; 1-11 신앙의 본질은 경험인가, 이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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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1; 1-11 신앙의 본질은 경험인가, 이해인가_1

  

 

  

2021. 9. 5. . 주일오전.

  

 

  

*개요: 누가복음에서의 믿음의 소원, 43편안-56충만, 1적용적해석, 5복음서

  

 

  

[]1: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1: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1: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1: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1: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한 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의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1: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1:7    엘리사벳이 잉태를 못하므로 그들에게 자식이 없고 두 사람의 나이가 많더라

  

[]1: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1: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1: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이번 달 우리는 누가복음에서의 믿음의 소원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이 많이 나타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 유년 시절, 성장 과정이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과 동정적인 사랑하심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여인과 어린 아이에 대한 설명이 많이 나타나고 있으며 예수님의 역순으로의 족보와 긍휼이 풍성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의 모습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인성을 잘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이해하고 따라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라는 믿음의 소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니 그분이 너무나 존경스럽고 너무나 훌륭해서 그분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 이상으로 나아가서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경험과 체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에 있습니다. 경험과 체험에만 의존하려고 한다면 예수님을 내 눈 앞에 보여달라고 할 것입니다. 기적과 이적을 눈 앞에 보여달라고 할 것입니다. 로또에 당첨되며 집을 주고 땅을 주고 승진하게 하게 합격하게 해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경험이 아닙니다. 그런 경험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이해에 근거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나니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경험이나 체험도 의미가 있습니다.

  

 

  

종종 철저한 무신론자가 운세나 운명이나 사주를 보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와 하나님만 거부하는 것이었지 관상이나 점이나 무속에 대해서는 예외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척이나 실제적이고 경험적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자신의 지나온 날을 알아 맞추고 현재의 문제를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데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 다음부터는 지독한 무신론자들도 사주를 따지고 운명을 알고자 하며 점이나 무속에 의존하게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와 하나님은 부정하며 비판합니다.

  

이렇게 보면 무신론의 반대가 유신론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해서 모든 신기한 현상들까지 다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말 대치가 되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중시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계시를 중시하는가 였을 뿐입니다. 그런 차이를 이해하면서 우리가 믿는 신앙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다시금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경험과 체험을 중심으로 신앙을 갖는 자들이 아닙니다. 계시와 증거를 받아들이면서 신앙을 갖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누가도 데오빌로에게 누가복음을 써서 보냈습니다.

  

“[]1: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1:2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1: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1:4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단순히 사실과 경험에 대해서만 증거하려고 했다면 누가복음의 의미는 수많은 붓을 든 사람들이 저술에 비해서 아주 초라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내력들의 저술이 더 큰 중요성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이적만 모아 놓은 책이 있다고 해 보십시오. 그 책은 어떤 의미를 가지겠습니까? 정말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그 경험과 체험을 묘사해서 방대한 양의 책이 있다 하더라도 체험 중심의 사고 속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경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 시대 사람들의 경험이고 예수님 자신의 경험이지 자기 자신이 직접 감각하는 체험적인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책은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누가복음을 썼습니다. 바로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이해하고 있는 것을 더욱 굳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누가복음을 썼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단순히 예수라는 분에 대한 경험과 체험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믿은 사람이 그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믿을 사람이 무엇으로 예수님을 믿을 것인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경험과 체험을 중시하는 믿음생활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중시하는 믿음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참된 믿음의 목적인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고 그분을 믿는 것이 정말로 믿는 것인지 사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고 그분을 믿는다고 말한다면 정말 그분을 믿는 건지 아니면 그분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인한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당연히 예수님을 알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는 나타난 계시와 증거를 살펴봐야 합니다. 그 계시와 증거가 성경에 나와있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읽고 설교하며 공부합니다. 그런데 그런 성경묵상과 이해가 귀찮아서 못하겠다면 결국 편안이라는 욕구에 이끌려서 진정한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셈입니다.

  

어떤 취미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합니다. 골프를 치거나 낚시를 하거나 수영을 하거나 축구를 하거나 악기를 다루거나 무슨 취미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이것 저것 배워야 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배워서 취미생활을 하며 남는 것이 많습니다. 그 취미생활을 오래도록 잘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은 많은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배우지 않으면서 취미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할 수 있는 것들은 전부 자극적이고 소모적이며 소비적인 것들 뿐입니다. 배워야 하는 애씀과 괴로움을 편안함과 안락함으로 바꿨기 때문에 결국 얻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취미생활일 뿐입니다. 신앙은 구원과 생명을 얻게 하는 종교활동입니다. 그런데 그런 종교활동에서 배움과 이해와 깨달음이 없이 단순히 체험과 경험과 감각으로만 하려고 한다면 결국은 헛된 시간만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인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그분을 이해하고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체험중심이 아니라 이해중심입니다. 그럴 때 체험도 의미가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고 헬라인 의사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동역자로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해가 중요하니까 이미 이해가 있는 데오빌로에게 체험과 경험으로 확인된 내용을 전달하였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볼 때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던 사가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역시 이해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8절부터 나타납니다.

  

“[]1:8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1: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1: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1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사가랴가 자신의 차례대로 지성소 안에 들어가서 번제의 예를 진행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하고 있을 때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서 그가 분향하는 향단 우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는 이해 속에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었고 그 제사장으로서 직무를 다해야 함을 알고 그 직무를 감당하고 있었을 때 천사의 방문이라는 경험을 했습니다. 경험을 하고 나서 하나님의 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제사장으로 지성소에서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천사의 방문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경험 중심이라면 경험 자체는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의 경험은 이미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그 이해 속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천사는 대제사장이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에게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경험이 아니라 이해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경험 중심의 신앙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조석지변 하겠지만 이해와 깨달음 속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편안하고자 하는 삶을 살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그 말씀을 연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신앙의 본질이 이해임을 깨닫고 신앙생활 속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고 이해하며 깨달아서 날마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거부함 없이 따라가고 귀찮아 하거나 부담스러워 하는 것 없이 언제나 순종하는 귀한 신앙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은혜가 우리 삶에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성

  

1. 주님을 믿는 것은 경험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해에 따르는 것이다.

  

2. 경험에 따르는 것은 달라질 수도 있지만 이해에 따르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3. 누가와 사가랴는 바로 그러한 이해가 있기에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가 되었다.

  

4. 경험에 흔들리지 말고 이해에 굳게 서서 주님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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