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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계획] 42눅10:25-30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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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눅10:
25-30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이웃을 사랑하라_1



  2011.11.6.주. 주일오전, [51계획]

*개요 {5복음서} [1영역]-[8사역]
 
[눅]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눅]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눅]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눅]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눅]10: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눅]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여러분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다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한 대표적인 모델로 알려져 있습니다. 단지 성경의 이야기를 넘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일반 사회에서도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 돕는다는 의미로서 바람직한 시민상의 모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의미에 근거한 '선한 사마리아인 법'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위험에 빠지지 않는 상황에도 구조 불이행 (Failure-to-Rescue)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법입니다. 또한 선한 의도로 구조를 하려고 했던 사람이 불필요하게 처벌받지 않게 하는 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에게 바람직한 시민상을 보여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의 근거가 되는 누가복음 10장의 말씀은 사실 다른 의도에서 이 선한 사마리아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에 관계된 내용이었습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25…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6…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러자 율법사가 대답했습니다.
“27…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28…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여기까지의 대화를 생각해 볼 때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나오는 배경은 구원을 얻는 방법에 대한 대화였습니다. 율법사와 예수님 간에는 구원을 얻는 방법에 대한 대화가 오고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사는 결정적으로 이렇게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29…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끝내신 후 율법사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37…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다시 말해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율법사가 사마리아인처럼 살아가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구원을 얻을 수 있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행위구원을 말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믿음이 무엇이냐고 할 때에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사마리아 인처럼 행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행위구원에는 믿음은 없습니다. 그 안에서 믿음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음은 믿지 않아도 행위만 있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구원은 믿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진정한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믿음구원을 이야기할 때에는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행위구원을 이야기할 때에는 행동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위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려움에 빠진 이웃을 구해내야만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구원을 얻는 것인데 이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을 나타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어려움에 빠진 이웃을 구해내는 것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 속에서 주님은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에게 그 사랑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완전한 변화를 보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으로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데 겉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척만 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마음으로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행동으로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마음과 몸이 일치해야 하고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정말로 구원에 합당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려운 일인가요?

얼마 전 뉴스에서는 중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한 사건을 보여주었습니다. 두 살짜리 여자아이가 차에 치어 길가에 쓰러져 있었지만 그 자리를 18명의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여자아이는 사망하고 말았고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슬픔과 분노를 안겨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사람들의 매정함과 무관심을 비난하면서 분노하였습니다. 안타깝게 죽어간 어린 여자아이를 보면서 슬퍼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다른 나라 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정확히 동일하지는 않아도 남의 아픔과 슬픔을 외면한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슬픔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들이 복음에 대해서 한 번 들어보지 못하고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나 그러한 그들의 불행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는다면 우리가 차에 치여 다친 여자아이를 그냥 지나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입니까?

주님이 왜 하나님만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웃이 되는 사람들이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그 이웃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 이웃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주님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예수님의 죄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죄 용서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전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에게 그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말 이 세계를 지으시고 다스리신다면 왜 이 세상에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허락하셨느냐고 비난합니다. 왜 고난 당하는 자가 있고 왜 아파하는 자가 있는지에 대해서 하나님께 따지면서 그 모든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잘못이라고 공격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정말로 행하신 일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고통당하는 자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셨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잘못이라고 공격하며 비난하는 자들을 위해서도 죽으셨습니다. 그들이 비록 몸은 죽어도 영은 살리는 주님을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영혼은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비난하는 자들은 이웃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이 가장 큰 긍휼과 은혜를 보이심으로 희생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을 믿는 우리도 그러한 희생을 따르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연결됩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이 세상을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셨는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최대의 선행이 무엇입니까?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서 상처입은 자를 어디로 데리고 갔습니까? 그는 여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지속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것이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감당할 수 없기에 여관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혼자서 누군가의 영혼에 대해서 다 도와줄 수 없기에 교회로 데리고 갑니다. 어려움에 빠진 자를 교회로 데리고 갈 수 있다면 그는 정말로 그를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정말로 그의 어려운 형편을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어령씨의 딸인 이민아목사님은 자신이 어떻게 처음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떤 자매가 자신을 끊임없이 성경공부 모임으로 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매번 거절하던 그였지만 어느 날은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살기가 싫어졌다고 합니다. 바로 그때 끈질지게 성경공부에 오라고 하던 그 자매가 또 부드럽게 다가와서 성경공부에 나가자고 했답니다. 그 때에는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어서 응락을 했고 그렇게 나간 성경공부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녀를 성경공부로 데리고 간 그 자매가 아니었다면 이민아목사님은 평생 고통 속에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방법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생각해보면 영생을 얻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든지,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이웃은 사랑한다든지,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고 이웃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기적이 되고 개인적이 되어서 영생을 하기에는 합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셨던 우리 이웃을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이웃은 바로 예수님께서 그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죽으셨던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이웃을 주님께로 인도해봅시다.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 때로는 실망하며 때로는 감사하며 주님께로 이끌기 위해 노력해보십시오. 그것이 정말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할 것입니다. 진정으로 이웃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며 불쌍히 여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아픔에 지나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나타내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번 초청주일에 이러한 경험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성
1.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2. 우리는 구원이 단지 입으로만 고백하고 마음으로는 부인해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3. 정말로 영생을 얻기를 원하는가를 알아보시기 위한 것이 죽어가는 이웃을 사랑하는가입니다.
4.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영생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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