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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영역] 41막10:13-16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을 용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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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막10:13-16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을 용납하라_1



2011.5.1.주일오전 , 어린이주일, [5-1계획]

이번 주는 어린이주일입니다. 5월 5일 어린이날이 이번 주에 있고 다양한 어린이를 위한 행사가 전국적으로 열립니다. 우리나라는 이런 면에서 특별히 어린이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날이 제정되게 된 계기는 1919년 3·1운동을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어린이들에게 민족 정신을 일깨워 주고자 1923년 소파 방정환을 비롯한 일본 유학생 모임 색동회가 주동이 되어, 노동절에 맞추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한 데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1927년부터는 5월 첫째 일요일에 행사를 진행했는데, 일제의 탄압이 있던 시기인 1939년까지 중단되었다가, 광복 이후 '어린이'를 존중하는 마음을 살리기 위해 1946년에 다시 부활되었습니다. 그리고 1961년에 제정·공포된 '아동복지법'에서는 매년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습니다. 그 이후 1975년부터 공휴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의 어린이날은 일제시대때의 약화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특별히 업신여겨지고 천대시 되었던 나이어린 자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선각자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당하는 시기가 없었다면, 그리고 어린이들에 대한 천대시하는 시각이 없었다면 굳이 생기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연약한 형편은 그 부분을 더욱 보완하고 새롭게 변화시키기 위해서 여러가지 방법들이 취해졌고 결과적으로 어린이에 대한 관심과 사랑과 정성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그러한 반전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어린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것은 어린이들의 연약함과 미약함, 그리고 부족함을 예수님께서 채워주시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어린이들이 일으키는 소음과 번거로움과 불편함을 보았습니다. 이제까지의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형태는 조용히 사람들이 앉아있으면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양한 예화와 비유와 설명을 통해서 장시간 가르치는 것이 기본형태였는데 그런 조용함과 정숙함을 깨트리는 것이 바로 어린이들이었습니다. 또한 어린이들에게 만져주시기를 바라고 부모들이 예수님께 다가오는 것도 불편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논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왜 당신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소란스럽게 하는가?’
‘왜 당신들은 예수님께 어린이들을 만져달라고 간구하는가?’
‘왜 당신들은 이래 저래 예수님과 우리들을 불편하게 만드는가?’
어린이들을 동반한 부모들에 대한 이러한 비난과 폄하의식이 결국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대의식은 과거 어린이들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 어린이들을 그렇게 천대하였습니다. 어린이들이 어른하는 일에 끼여드는 것 자체를 용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천대의식을 바로잡고자 어린이날이 제정되게 되었던 것이고 제자들은 바로 이러한 어린이를 천대시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근본적인 생각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고 연약함이 있고 성숙되지 못한 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여전히 지금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장애인들이나 지체부자유자들이나 심신미약자들에 대한 천대의식이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실존하는 것처럼, 마음의 문제에서의 어린 자들에 대해서 천대시하고 멀리하며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도 여전히 바뀌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몸은 어른이지만 마음이나 생각하는 것은 어린 아이인 자들이 있고 그런 자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다가가거나 다가오는 것을 싫어하고 부정적인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어린아이같은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성경말씀에서도 영적 수준이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5장 12절을 보십시오.
“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단지 육신의 나이가 어린 어린 아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 바로 어린 아이입니다. 의의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가 바로 어린 아이입니다. 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 바로 어린 아이입니다. 다른 신앙인들을 이모 저모로 불편하게 만드는 자가 바로 어린아이들과 같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절대 불신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신앙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님을 따라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기존 신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실천하지도 못합니다. 끊임없이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단단한 식물을 먹지 못합니다. 그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바로 어린 아이입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런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어린 아이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쁜 뜻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라도 되어야 성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서도 물론 어린 아이 이후의 장성한 자를 말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린 아이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고 있지만 사실 성경 전체에서 어린 아이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인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고 어른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도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이 필요합니다. 정말 나이가 어려서 어린 아이가 아니라 새로운 신자라서 어린 아이가 필요합니다. 아니면 실족했다가 다시 회복하려고 하는 어린 아이가 필요합니다. 지금은 좀 연약하지만 많은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이 교회에는 많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런 어린 아이들을 귀찮아 했습니다. 불편해 했습니다. 짜증이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데려오는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역자들이나 직분자들이나 일반 성도들이나 교회는 이런 어린 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을 귀찮아합니다. 불편해 합니다. 그래서 오자마자 제자들처럼 꾸짖기부터 합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감동이 있는 교회는 첫인상부터 다르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고 방금 이야기한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교회가 받아들이기를 부담스러워한다는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도 잘 맞는 것 같습니다. 뭔가 좋은 해답을 기대하고 첫 장의 제목을 보는 순간, 저는 ‘어라?’하고 생각했습니다. 첫 장의 제목은 ‘소비자를 알아야 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하고 생각하면서 첫 장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실망감이었습니다. 이래서 교회가 사업을 하는 곳이 되는구나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도를 소비자로 생각하고 서비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교회가 성도를 소비자로 생각할 때에 교회일은 사역이 아니라 사업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방식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이 주님께로 나오는 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해야 그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천대시하지도 않고 불편해 하지 않고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을 받으면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래서 어린 아이들에 대해서, 어린 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 중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말씀 때문에 어린 아이들에 대한 정의와 평가와 가치는 완전히 새로워졌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려오는 부모들을 꾸짖는 것을 보고 분히 여기셨습니다. 통분히 여기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은 그런 어린 아이들이, 그런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사람들이, 그런 어린 아이들과 같은 자들이 자신에게 나아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나아오는 것을 허락할 뿐만 아니라 금지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에는 그런 자들이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만 만나고 돌아가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만져주심만 바라고 사라지는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계속 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서 축복을 얻고 도움을 얻은 다음에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자들을 오히려 쫓아내려고 하고 오히려 책망하였던 제자들에게 분하게 여기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예수님의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았던 셈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분히 여기셨던 것이고 그들의 의미에 대해서 새로운 정의를 내려주시는 것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가족들이었습니다.

얼마전 들었던 어떤 한 부인께서 남편에 대해서 한 간증은 여러면에서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 부인은 오래 전에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하고 있던 남편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안타까워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주셨다고 합니다. ‘네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그를 더욱 사랑하고 있노라’라고 말입니다.

이런 은혜는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별로 사랑받을 것 같지 않은데 왜 하나님은 사랑하실까요? 사랑은 커녕 심판을 받아도 마땅할 것 같은데 왜 사랑하실까요? 이런 의문은 성경 곳곳에서도 나옵니다. 탕자의 형은 탕자가 집에 돌아온 것을 보고 반갑게 맞이하고 환영하는 아버지를 보며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형은 말합니다.
“눅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 아들은 어리석었었고 어린 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자를 위해 아버지는 두말없이 용서해 주시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뿐만 아닙니다. 오늘도 부자집 자녀들은 별로 하는 것도 없이 문제만 일으켜도 그들은 다 용납되며 다 공급받습니다. 왜 그들은 똑바로 사는 것 같지 않은데 그렇게 유익을 누릴까요? 뿐만 아닙니다. 어떤 부모의 자녀들은 문제도 많고 어리석은 행동도 많이 하지만 부모는 그들을 쫓아다니며 그들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냥 내버리지, 그냥 잊어버리지, 그냥 내쫓아버리지, 왜 그들을 위해 희생할까요? 각각의 부모들이 용기가 없어서 자녀를 버리거나 잊어버리지 못할 때 사탄은 대신해서 그 자녀들을 잡아먹어주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사탄이 자녀를 잡아 먹으려 할 때 그냥 놔두는 부모들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그래도 말로는 그래도 속으로는 진정한 속마음은 자녀가 어리석고 미련하며 부족해도 자기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희생하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사랑을 주님으로부터 받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왜 그렇게 사랑하시냐고, 그런 죄많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왜 도와주시냐고, 그렇게 몸과 마음이 어린 자들을 왜 그렇게 용납하시냐고 우리가 힐난하고 비판할 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사랑을 정말로 누리고 있는 자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도 그 사랑이 아니었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 사랑속에서 제자가 되었고 성도가 되었으며 직분자와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나타내신 사랑이나 어린 자들을 위해 나타내신 사랑이나 동일합니다. 우리가 다 그 사랑을 받은 자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로마서 5장 8절말씀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니 그 사랑을 제한하려거나 제지해서는 안되고 그 사랑을 더 많은 부족한 자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온 어린이들을 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안수하시며 축복해주셨습니다.
“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주님은 그렇게 주님께 나아온 자들을 사랑하십니다. 과거의 모습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주님께 나아왔다면 그들이 왜 주님께 나아왔겠습니까? 어린 아이들을 주님께 이끌고 왔다면 부모들이 왜 주님께 자녀를 데리고 나아왔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축복해주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주님이 주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단지 안수만 해주고 축복만 해주고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사모하는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어쩔 수 없이 가는 나라가 아니라 마지못해 가주는 나라가 아니라 가고 싶어서 질책을 무릅쓰고 책망을 이겨내며 예수님께 나아오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왜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같이 받들지 않으면 결단코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까요?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사모할 때에만이 비로소 모든 어려움과 시험을 이기고 그 곳에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에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순종하고 인도함을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다 어린 시절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어떤 곳을 사모하고 받든다는 것이 얼마나 설레고 가슴벅찬 일인지를 아실 것입니다. 저도 예전 어렸을 때의 기억이 있습니다. 돌아오는 어린이날에 어린이대공원에 가기로 한 다음에 몇 일전부터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하루 전에는 밤에 잠이 제대로 오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지 거의 새벽녘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대와 설레임 속에 뒤척였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어린 아이처럼 받들고 기다리며 소망할 때에 비로소 어려움을 이겨내고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저런 시험과 유혹에 빠져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하루 이틀 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한달 두달 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1년 2년 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10년, 20년 하게 하시지 않습니다. 평생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소망은 비로소 진실한 것이 되며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되게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좋은 포도주는 숙성이 되면 될 수록 맛이 좋다고 합니다. 숙성은 포도의 성분이 발효에 의해 새로운 성분으로 바뀌어 기존 성분과 섞이면서 조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포도에 있는 물분자와 새로 생긴 알코올 분자가 섞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분자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 사이를 새로 생긴 알코올분자가 끼어들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렇게 물과 알코올이 분자상태로 섞이는 것을 숙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존 성분과 새로운 성분이 섞이면서 생기는 맛이나 향의 조화를 숙성이라고 합니다. 이 숙성기간에 따라서 와인의 등급이 구별됩니다. 2,3년 되면 비교적 싼 포도주이고, 10,20년 되면 고급에 속하고, 50년이상이 되면 정말 좋은 포도주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50년이상 숙성시키려면 와인자체가 특별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도 그렇습니다. 오래 될 수록 오래도록 천국을 사모할수록 더욱 귀한 신앙이 됩니다.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온전한 모습이 되어갑니다. 그렇게 되도록 주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안아주십니다. 안수해주십니다. 축복해주십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할 때에 어린 아이를, 혹은 어린 아이같은 자들을 용납하고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금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고 사모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는, 혹은 어린 아이와 같은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어린 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여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되리라’한편 강도에게 말씀하셨고 지금도 우리 모든 주님의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5월은 가족의 달입니다. 이번 주는 어린이주일입니다. 아울러 5월은 초청의 달이기도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합시다. 그들을 막아서지 말고 그들과 주님의 만남을 방해하지 말고 그들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줍시다. 또한 우리 자신도 어린 아이와 같은 심령으로 이 5월에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봅시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어린 아이 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따랐던 것처럼 우리 모두도 그렇게 어린 아이 같이 순수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소망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개요 {4서신서} <1적용> [2분류]-[7실천]
1. 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고 제자들은 그런 자들을 꾸짖었습니다.
2. 사람들은 지금도 어린 아이같은 자들을 주님께 데리고 오고 사역자들은 그런 자들을 괴로워합니다.
3. 하나님은 도움을 받고자 하고 예수님께 만져주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안고 안수하시며 축복해주십니다.
4.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모함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와서 그 축복과 구원을 누리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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