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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희생] 43눅22:63-71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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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눅22:63-71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_1


2011.4.17.주일오전,

예수 그리스도 [5-3희생]

이번 주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심을 묵상하는 고난주간입니다. 4월 한달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묵상해 왔고 이제 그 최고의 절정인 고난주간에 이르렀습니다. 이 고난주간이 끝나고 십자가의 묵상이 마치면 우리는 부활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괴로웠고 그 고난은 너무나 힘들었지만 그 다음에 찾아오는 부활의 영광은 너무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고난이 밑으로 떨어지면 떨어질 수록 부활의 영광은 위로 올라가며 올라갑니다. 괴로웠던 것만큼이나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 부활을 향해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고난주간을 거쳐야만 합니다. 고난을 통해 영광에 이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모든 고난은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바로 이 장면이 고난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백성의 장로들 앞에 서 계십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이었으며 유대인들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예수님을 잡아들여서 자신들앞에 세우고 심문하고 있습니다. 이 심문을 통해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최후의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예수님의 정체성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심문하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잡아들인 이유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내용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쳐서도 아니고 안식일을 어겨서도 아니며 죽은 자를 살리고 많은 사람들을 먹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가르치심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이 한가지를 가르치셨습니다. 바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백성의 장로들이었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대해서 망령되이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이 유대청년은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요셉이요 어머니는 마리아요 나사렛에서 태어난 형제와 자매들이 있는 33살의 청년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볼때 충분히 이런 이유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저런 이유로 오해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의 족장들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그가 누구인지를 묻는 것에는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에 대해서 신성모독죄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보다 더 세력이 커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에 관한한 자신들의 위치와 권위가 있었는데 예수님이 그보다 더 높아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려운 자들을 도와주는 것은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독사의 자식이며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는 한에는 결코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타도해야만 하는 대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권위에의 심각한 도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붙잡히셨고 심문당하고 계십니다. 심문당하기 전 그들은 예수님을 희롱하고 때렸습니다. 눈을 가리게 한 다음 얼굴을 치며 너를 친 자가 누구냐 알아맞혀 보라고 주님을 능멸했고 욕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협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로마지배시대라서 독자적인 사형권한은 없었지만 그일을 위한 절차는 있었던 것입니다.
날이 밝았을 때 백성의 장로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공회에 세웠습니다. 공회로 구성된 백성의 지도자들 앞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대답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일 지 살릴 지를 결정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대답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여든 우리에게 말하라’

그들은 이미 죽음의 위협으로 주님께 묻고 있습니다. 밤새 희롱하고 때렸으며 이제 날이 밝은 뒤에 열린 공회 앞에서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 마디만 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죽일 작정이었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죽일 수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내가 말할 찌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할 것이라 그러나 이제 후로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고 해도 저들이 믿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또한 그렇다면 왜 믿지 않느냐고 물어도 그들이 그 이유를 대답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알고 싶어서 묻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의도는 예수님은 그리스도나 메시야가 아니고 그래서 백성을 선동하고 지도자들에게 비판을 한 죄로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답을 얻고자 하는 한에는 어떤 말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위협하는 그들에 대해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 순간에 꼬리를 내리고 살려달라고 했다면 그들의 위치와 그들의 신분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살려달라고 했다면 그리스도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상태로 목숨을 부지할 수있을 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목숨에 연연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주는 고통에 좌지우지 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더 큰 것을 보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임을 부인하였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그리스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의 우편에 앉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함으로써 주님은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로서의 주님은 바로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실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네가 그리스도냐고 물어보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사람들로부터 그런 질문을 받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인이냐’하지만 그럴 때 그 질문은 결코 좋은 의도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뜻은 네가 그리고도 그리스도인이냐, 네가 그렇게 악한 삶을 살고도 그리스도인이냐, 네가 삶 속에서 그렇게 옳지 못한 행동을 하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임을 믿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임을 부인하고 싶어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애초에 그리스도나 그리스도인이나 뭐든 간에 그런 존재가 있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는, 또한 그리스도인은 자신들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위치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들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존재감이 없거나 그 영향력이 미미하거나 할 때에는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존재가 커지고 영향력이 강해져서 마침내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고 자신의 삶을 불편하게 만들 때에는 가차없이 제거해 버리려고 합니다. 영적인 원리가 그렇습니다.

사탄은 별로 은혜도 되지 않고 어떤 위협도 되지 않으면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쌓이고 뭔가 신앙에 발전이 있을 것 같으면 당장 찾아와서 시험합니다. 그 시험 속에서 사탄은 실족하기를 바라고 은혜를 쏟아버리기를 바라고 신앙에서 낙심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언제든지 사탄이 원하는 대로 다시 조정하고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탄의 영향으로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올바르게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냥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악하게 추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올바르고 선하며 깨끗하게 살아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면서 축복과 영광까지 누리게 된다면 배가 아파서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 있는 힘을 다해서 어려움을 주며 괴롭히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면,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권능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직분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리스도인임을 부인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만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권능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시인하고 고백하며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자만이 하나님께서도 그를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가복음 8장 3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리스도인이냐 물을 때 대답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을 부끄러워하시지 않도록 ‘그렇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대답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의 자랑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계실 때 우리도 그 영광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함께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함께 거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이것을 원하시면 한번 손을 들어 그 믿음을 표해주시기 바랍니다.

좋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더욱 굳게 결심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인자가 하나님의 능력의 우편에 앉아 있을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으며 저들은 이제 마지막 카드를 빼어 들었습니다. 이 마지막 질문을 통해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 위해서 결정적인 증거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정말 예수님이 굽히지 않고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면 없애버릴 수 밖에 없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주님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 대답으로 인해 고난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된다 하더라도,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 고난은 일시적인 것 뿐입니다. 그 고난은 과정일 뿐입니다. 그 고난은 결코 결과가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 주님은 영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고난 뒤에 주님은 하나님의 능력의 우편에 앉아계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선언하십니다. 당당히 선포하십니다.
‘너희 말과 같이 내가 그니라!’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 고난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모르셨을까요? 방금전 그 수하들에게 매를 맞으면서 만약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십자가형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셨을까요? 그래서 그런 말을 하신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들이 어떻게 하리라는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줄 수 있는 이 세상의 고난에 예수님은 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담대하여 모든 고난을 이겨내시는 하나님의 구원자 구속자 그리스도 예수님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네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네가 하나님의 자녀이냐?’ 이제 뭐라고 대답할까요? 우리는 그리스도인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이미 그리스도인이라면서요? 그 고난 이후의 하나님의 능력의 영광에 동참하기를 원하다면서요? 왜 영광은 원하면서 고난은 싫어하십니까? 왜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어려운 일은 안하려고 하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는 원하면서 고난을 피하고 싶다구요? 그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모르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때문에 얻는 고난은 그 자녀이기 때문에 가족이기 때문에 당연히 받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니 담대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는 고난을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다시 물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비록 믿음으로 인해서 고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이일을 고백하신다면 어떤 고난이 임할 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에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고난을 감수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신다면 손을 들어 그 믿음을 보여주십시오.
좋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인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고난 당할 때 함께 고난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믿어서 어려움 당했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믿기 때문에 어려움 당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 믿기 때문에 힘들게 산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믿기 때문에 힘들게 사는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이 고난주간에 우리가 쉽게 쉽게 살아간다면 어떻게 우리가 양심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까요? 이 고난주간에 우리가 여전히 평상시와 똑같이 고난을 피하고 향락을 즐긴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고난받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떻게 살아가며 일찍 주님을 믿게된 자로서의 사명은 어떻게 감당한단 말입니까? 이런 저런 이유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의 자녀도 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이제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고난을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난을 스스로 감당하십시오. 모든 오락을 폐하고 모든 즐거운 것을 그만두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나타내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묵상하십시오. 내가 오락을 금하고 쾌락을 멀리하는 것이 이렇게도 힘든데 주님은 얼마나 힘드셨을까를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그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것을 놓는 것에 불과하지만 주님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던 것을 받게 되셨습니다. 가장 끔찍하고 고통스럽고 잔인한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정말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겠다고 결심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그 믿음을 표현해 보십시오. 고난은 결코 보는 것만으로는 깨달아 지지 않습니다. 정말 조금이라도 경험할 때에 얼마나 괴로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동참하는 자들은 언제라도 주님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고난을 받아도 그리스도인임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저버리지 않는 자들은 어떤 어려움이 와도 다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고난을 체휼하신 예수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주 고난주간을 함께 체험함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개요 {4서신서} <2시점> [5은혜]-[6결심]
1.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인가를 악한 의도로 주어지는 모든 고통속에서 질문받았습니다.
2. 주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하였고 그 이유는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3.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을 싫어하여 고난을 주지만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 고난의 의미와 이후의 영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4. 이번 고난주간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분의 고통과 영광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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