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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계획] 51골 1;15-20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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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골 1;15-20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존재한다_1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골]1: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골]1: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골]1: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011.2.13.주일오전, 복음의 적용

우리는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번쯤 고민을 해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 교회를 다니는 것인가, 왜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을 해보게 됩니다. 설사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더라도 살다보면 궁금증 많은 자녀에게서나 혹은 도전적인 친구에게서나 혹은 이런 저런 경로로 믿음이란 무엇인지, 무엇을 믿는 것인지, 신앙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물론 나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라고 한다면 간단하겠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지금까지 헛되게 살았습니다라는 뜻이 될 수 있기에 우리는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대답이 궁색하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은 오히려 믿음이란 무엇인가,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실례이고 예의를 벗어난 일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교회에서조차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신앙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묻는 것이 듣는 사람을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다 들어보면 이해할 만한 것들이고 익숙한 이야기들이지만 실제로 말하라고 하면 할말이 없는 것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다 아는 것 같아도 막상 설명해보라고 하면 뭐라고 설명할지 모르겠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믿음이란, 신앙이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를 따르고 순종하여 일을 행함으로 그 나라의 기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는 것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믿음만 가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그 나라의 기업도 얻고자 하고 신앙의 본질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믿음을 가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는 이유는 이 믿음과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이며 갖게된 믿음과 신앙을 삶 속에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가기 전까지 이 믿음과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그냥 계속해서 기다리기만 하면 될까요?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그냥 열심히 교회 일만 하면 될까요? 하나님 나라에 가서 기업을 얻을 때까지?
이런 의문점들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철저히 구분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가기로 예비된 사람들은 세상 나라에서는 아무런 일도 할 필요가 없다든지, 혹은 맘대로 살아도 된다든지, 혹은 세상에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열심히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가면 된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오해를 갖게 됩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풀어주시기 위해서 우리를 아들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그리고 우리의 죄값을 다 갚아주시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오늘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의미를 해결해 줄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의 나라에 가고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려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그분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와 같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 이상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나타내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입니다. 그러나 단지 하나님을 나타내기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모든 창조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다음 구절 16절을 보십시오.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님은 아들로서만 존재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분으로 존재하십니다. 예수님이 창조하신 것은 하늘과 땅의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도 창조하셨습니다. 또한 보좌들과 주관들과 정사들과 권세들과 만물이 모두 다 예수님이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바로 예수님을 위해서 이 모든 세계 만물이 창조된 것입니다.

인도에 가면 한 황제가 죽은 왕비를 위해서 만들어준 궁궐이 있습니다. 이름은 타지마할이고 그 모습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그 궁궐은 죽은 왕비를 위해서 무굴 황제인 샤 자한이라는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사람이 만들어도 그토록 아름다운데 이 세상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서 직접 만드셨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또한 얼마나 이 세상은 귀한 것입니까? 그리고 17절 말씀은 이러한 모든 이 세상에 대한 설명에 마침표를 찍고 있습니다.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보다 먼저 계셨기 때문에 만물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만물을 지으셨으며 그 이후에 나타난 모든 만물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서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만물들 속에 그리스도가 나타나신다는 것이며 어느 하나도 그리스도의 의미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계가 그리스도 밖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의 다스리심 너머에 존재하지 않고 오직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그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아들의 나라는 천국만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도 아들의 나라입니다. 만물이 아들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세상의 나라와 분리되어서 세상의 나라보다 더 작고 협소하며 왜소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주일에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며 나머지 6일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의 나라가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며 서 있고 함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세계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예비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면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열심히 노력한 만큼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깨달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의 나라보다 더 큼을 이해하고 이 세상의 나라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주일이 아닌 나머지 6일의 삶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힘써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지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존재하는 이 만물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외면하면서 살아갑니다. 주일에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를 드렸다면 모든 것이 끝났다구요? 그래서 더이상 주님께 드려야 할 의무는 없다구요? 그래서 맘대로 나의 시간과 물질과 삶을 사용하면 된다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과 신앙의 시작은 바로 삶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삶에서 믿음을 나타내고 신앙을 나타내는데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지 않은, 의롭지 않은, 올바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라도 자기의 있는 입장에서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이 세계 만물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도록 그들을 압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야곱의 삼촌이었던 라반을 생각해 보십시오.

라반은 야곱이 온 가족을 이끌고 하란땅을 떠났을 때 그는 분노함으로 야곱을 쫓아갔습니다. 그의 마음은 복수를 하고 야곱을 처리하고 온 가족을 다시 되찾아 오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야곱 앞에 섰을 때에 그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여기에 대한 라반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창세기 31장 27절부터 29절까지입니다.
“창31:27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으며
28 나로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느냐 네 소위가 실로 어리석도다
29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라반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 자신을 속였느냐는 것입니다. 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떠났느냐는 것입니다. 왜 나를 무시하고 자연스러운 이별절차를 밟지 않았으냐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어리석게 행동했느냐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럴 듯 합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그가 야곱에게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라반은 야곱에 대해서 옳지 않았습니다. 라반의 것으로 출발하였지만 야곱에게는 그의 희생과 노력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라반은 전혀 야곱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옳지 않은 의롭지 않은 정직하지 않은 주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야곱을 해할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맘만 먹으면 야곱을 죽이고 모든 것을 다시 되찾아 올 수 있었습니다. 레아와 라헬은 그의 딸들이었지만 애초에 결혼도 라반의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별도 가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능력이 있고 명분도 있고 이유도 합당해 보였지만 그는 아무 것도 야곱에게 요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 대해서 선악간 말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라반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이 세상의 만물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라반은 믿음으로 야곱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만물 속에 존재하시는 그리스도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라반처럼 의롭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정직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순수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혹은 모든 관계에서 나보다 더 열등한 사람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서 그 의롭지 않음을, 그 정직하지 않음을, 그 순수하지 않음을 계속 고집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라반이 야곱에게 커다란 보상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때 믿음은 우리의 의지를 가로막습니다.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것을 빼앗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물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만물들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반은 선악간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말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라반과 같은 입장일 때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삶속에서 나타나는 믿음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인은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이 세상 만물이 다 내 것이 아니라 전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럴 때 온전한 믿음이 삶 속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만물을 바라보십시오. 이 믿음으로 여러분이 라반처럼 장인으로서 사위를 바라보십시오. 또는 시어머니로 며느리를 바라보십시오. 부모로서 자식을 바라보십시오. 선배로서 후배를 바라보십시오. 사장으로서 종업원을 바라보십시오. 가진 자로서 강한 자로서 높은 자로서 가지지 못한 자를 약한 자를 낮은 자를 바라보십시오. 그 모든 만물 속에 그리스도가 보입니까? 그 안에 그리스도가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능력이 있지만 그 능력을 사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올바른 위치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내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올바르고 의롭고 선하고 정직한 위치에 있다면 그 위치에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신앙이 있기 때문에 내뜻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의 제자 아나니아가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 교회를 핍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에 그리고 그일로 인해서 눈이 멀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아나니아를 불러 그가 가서 사울에게 안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는 그 일을 싫어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악명과 잔인함을 알고 있었던 아나니아는 언제 다시 그가 변할 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9장 13,14절입니다.
“행9: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그의 생각은 옳았습니다. 사리가 깊었고 합리적이었습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습니다. 그는 의로운 편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 자신을 보호하고 교회를 보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사울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십니다.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주님은 그가 바로 자신의 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바로 자신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누구일까요?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사울이 길에서 만났던 바로 그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를 보내 사울을 변화시키려고 하시는 이유는 사울이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이 지으신 사람이요 그는 예수님께서 사용하고자 하시는 그릇이었으며 예수님으로 인해 존재하는, 예수님을 위해 존재하는 만물 중의 하나였습니다.
신앙이 있을 때에 믿음이 있을 때에 아나니아는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사울에게 가지 않고자 하는 수천 수만가지 이유를 댈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을 때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순종했습니다. 라반이 주님께 순종해서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나니아는 주님께 순종해서 사울에게 말해야 할 것을 말하고 기도할 것을 해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왜 라반이 할 말을 하지 않았고 아나니아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했을까요?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 만물들이 주님이 아니면 존재할 수 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라반에게는 야곱이, 아나니아에게는 사울이 바로 주님의 지으신 만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속한 자이기 때문에 해꿋이를 할 수 없었고 외면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죄지은 자, 연약한 자, 가능성이 없는 자에 대해서 하나님은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모든 불완전하고 부족한 만물 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우리는 문제를 일으킨 자가, 마음을 아프게 한 자가, 죄를 저지른 자가 빨리 없어지기를 바라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변화되어 올바르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병들면 빨리 잘라 버리고 싶어하지만 주님은 그 몸이 회복되어 올바르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들에게 나가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깨닫게 해야 합니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자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그 모든 만물 속에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경우입니까? 아나니아처럼 옳은 자의 편에 있습니까? 그럼 그 편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십시오. 라반처럼 옳지 않은 자의 편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하나님 안에 있고자 했기 때문에 그의 신앙은 진실한 것이 되었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대적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만 하라고 할 때 그만 할 수 있었고 금을 넘어서지 말라고 할 때 금을 넘어서지 않았고 의를 행하라고 할 때 의를 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교회에서 주일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모두 평일에 교회 밖에서 삶 속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라반의 야곱의 아나니아의 사울의 삶을 모두 변화시켰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분이 만물의 주인이시라고,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그와 함께 서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만물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십니까? 여러분이 보시는 자녀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깨달으십니까? 여러분이 보시는 남편과 아내 속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하십니까? 여러분이 보시는 이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십니까? 여러분이 보시는 여러분의 학교와 직장에서 그리스도를 경험하십니까?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가 그 모든 만물 중에 거하심을 바라보십니까? 이제 우리는 이것을 바라보며 깨달으며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악한 사람은 자기 아들이 친아들이 아니라고해서 3살짜리된 어린 아이를 때려 죽였습니다. 그 엄마도 남편의 행동을 동정하며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수긍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고. 그 속에는 내 아이건 남의 아이건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결코 그럴 수 없고 결코 그래서도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 만물 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모든 만물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그 만물을 원하시는 뜻대로 하는 것에 대해서야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만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그 만물 가운데 계신다면 어떤 목적이 있고 어떤 계획이 있으며 어떤 뜻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악인도 다 쓰임에 합당하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만물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존재하심과 거하심을 깨달으며 더욱 그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만물 속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삶 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나타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개요 {4서신서} <3분석> [0복음]-[1영역], [5-1계획]
1. 예수님은 세상의 창조자로서 세상은 그로 시작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2. 그래서 세상만물은 그 안에서 그로 인해서만 존재하며 그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다.
3.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세상을 다스리고 좌지우지 할 수 있으리라고 어리석은 생각을 합니다.
4. 우리는 만물 속에 존재하는 예수님의 뜻을 생각하며 그 뜻에 따르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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