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희생] 47고후 12; 7-10 약한 그 때에 강하셨던 그리스도Loading the player...
47고후 12; 7-10 약한 그 때에 강하셨던 그리스도_1
2024. 3. 24. 주. 주일오전.
*개요: 고난주간, #53희생, [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올해 고난주간이 이번 주부터 시작됩니다. 이미 다른 교회에서는 사순절이라고 해서 부활절 이전에 40일 전부터 절기를 지키는 곳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단은 사순절을 지키지는 않고 고난주간만 절기로 지키기 때문에 이번 한 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할 때 우리의 신앙이 더욱 주님과 연합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난주간 다음에 이어지는 부활절의 기쁨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쩌면 내 인생 자체가 고난인데 왜 다른 사람이신 예수님의 고난을 우리가 왜 묵상해야 하는 것일까를 의아해 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우리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먼서 예수님의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던 일을 우리가 묵상하고 기념하는 이유를 잘 모르니까 이 시기를 혼란스러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와 어떤 관계가 있으시고 그분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면 그 모든 혼란이 싹 사라지고 예수님의 중요성을 절감하면서 하나님께 부활절의 감사와 기쁨을 드리는 이유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의 은인이시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예수님은 구세주이시다, 구주이시다, 구원자시다’라고도 표현하지만 좀더 마음에 와 닿는 표현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많은 생명의 은인을 만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영원토록 하나님 나라에 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예수님의 구원자되심과 생명의 은인되심을 죽어야만 알 수 있다면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명의 은인 되심은 죽은 다음에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에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살아 있을 때 그 구원자 되심을 알아야만 죽은 다음에도 그 효과를 알게 됩니다. 만약 살아있을 때 예수님이 생명의 은인이시라는 것을 모른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죽은 다음에는 어떠한 구원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죽으면 이미 심판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심판에 들어가기 전에 살아 있을 때 예수님이 생명의 은인 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의 생명의 은인이시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고난 속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주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걸 알게 되면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고난 가운데서 주님이 구원자 되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사도 바울의 고백 속에서 알아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이 심각한 고난 속에 있었습니다. “[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12: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사도 바울이 세 번이나 주께 간구했다는 것은 그가 경험하고 있는 고난이 얼마나 괴로운 것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 사탄의 사자에 대해서 어떤 신학자는 안질이라고 하고 또 다른 신학자는 간질이라고도 합니다. 무엇이 진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것이든 전부 정말 고통스러운 괴로움이었을 것입니다. 추측되는 내용을 듣기만 해도 우리는 몸서리가 쳐지는 괴로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간절한 기도 속에서 사도 바울에게 구원이 되었던 것은 그 사탄의 사자가 떠나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은 그대로였지만 다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고후]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의 의미는 사탄의 가시를 빼 줄 수 없다가 아닙니다. 사실 그 의미는 그가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약한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 진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 응답으로 우리에게 없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너무나 많은 이미 있는 것을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없는 것을 주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면 그전까지 자신에게 있었던 것을 오히려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많은 것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응답은 바로 그것을 다시 기억해 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 응답을 통해 그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깨달았을 때 크게 기뻐했습니다. 자신의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약한 것에 대해서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자랑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위로가 되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팔자를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것이 현세에서 부유하게 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사탄의 가시가 사라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과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에 대해서 자신이 저주를 받았고 죄값을 치른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녀를 양육하다가 힘이 들 때 자신이 벌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남편이나 아내로 인해서 골치를 썩일 때 자신이 죄값을 치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 고달픈 삶이 빨리 끝나게 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그때 해야 하는 것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럴 때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습니다. 촛불이 불을 피우는 원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촛불은 불을 피우기 위해서 자신에게 있는 몸을 희생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게 있는 파라핀 몸이 다 소진되면 그제서야 불이 꺼집니다. 그 몸이 닳지 않게 하려면 불을 피워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불이 켜져서 나타날 가치를 위해서 애써 자신의 몸을 불의 연료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다가올 영광을 위해 필요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이러한 원리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고난을 대하는 태도는 남다릅니다.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감당합니다. 그 고난 속에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었기에 부자가 되고 잘 살게 되고 건강하게 되기를 바랬다면 끝까지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설사 부자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다른 어떤 것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킵니다. 남편의 문제나 아내의 문제나 자녀의 문제나 혹은 또 다른 그 어떤 문제가 생깁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을 믿기에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문제는 생깁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생기더라도 여전히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 어려운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렵다고 해서 예수님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내게 머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을 의지하게 되고 그것이 위로와 소망이 될 때 고난이 끝이 나고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인생 자체가 고난이지만 그 고난 속에서 주님을 믿게 되는 것이고 인생이 끝이 났을 때 믿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부자나 평안한 사람으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공생애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의 가장 큰 고통은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과정과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고통입니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예수님은 혼자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하나님은 예수님의 능력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고난을 마치시고 ‘다 이루었다’ 말씀하신 뒤에 죽으셨을 때 하나님께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 영혼을 받으시사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된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고난 속에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달으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바울은 더 이상 사탄의 사자, 가시만을 놓고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약한 것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했습니다. 그걸 피해서 살아간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고통을 자처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하고 능욕받으며 궁핍하고 박해받고 곤고할 때 함께 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한 그 때에 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힘주심을 경험하기 때문에 쓰러지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며 의연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러하셨고 그로 인해서 가장 강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해지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온전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도 고난 속에서 예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가장 신실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고난을 극복해내고 진정한 구원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 보다 둘이 더 강한 것처럼 나 혼자만 아니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있을 때 강해집니다. 자녀가 부모와 함께 있을 때 강해지고 아내가 남편과 함께 있으면서 강해지고 동생이 형이 있을 때 강해지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강해집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고난 속에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고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난에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번 고난 주간에 우리의 신앙생활에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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