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구함으로써 아버지께서 영광을 얻으시게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받게 되는 가장 우선적인 변화는 삶의 영역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삶에서 교회를 다니는 삶으로 바뀝니다. 있는 장소가 틀려지게 됩니다. 그것은 변화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면서 그 변화는 그것을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놀랍게 진행되어집니다.
신앙생활로 인한 우리 삶의 변화 중 가장 극적인 것은 우리의 욕구가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원하던 것에서 전혀 새로운 것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원하던 것을 하나님을 믿고 난 다음에도 계속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결정적인 변화는 바라는 것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원하는 것이 달라지는 것, 그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13절 말씀을 읽을 때에 예수님을 믿기 전의 원하는 것을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 달라지게 됩니다. 주님은 그것을 염두에 두시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주님이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그것을 들어주시는 이유는 아버지가 영광을 얻으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습니다. 이것은 아들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올바른 것을 원함으로써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2.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해야 하는 것은 보혜사 성령을 간절히 사모하고 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것이나 본성대로 마음 대로 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생각해서 주의깊게 구해야 합니다. 단지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는 말에 환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분명한 것은 그 앞에 있는 ‘내 이름으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내 이름으로라는 것은 그냥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주문처럼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 무엇을 구하든지 뒤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만 하면 그것이 주님께서 시행하시는 그리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점을 강조하시기 위해서 그 다음 구절에 15절에서 주님의 계명에 대해서 말하신 것입니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시행하십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것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간구하는 것일까요?
이미 알려주신 말씀 속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좀더 말씀을 읽어가다 보면 우리가 얻고자 하는 해답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읽어보면서 주님의 원하시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주님이 사실 주기를 원하시고 구하기를 원하시는 것은 보혜사입니다. 보혜사를 구할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3. 그것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보혜사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더 성공하고 부강해지고 지혜로워지고 튼튼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보혜사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일전에 어떤 부자가 자기 아들에게 오직 한 가지 만을 선택할 수 있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는 예화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그 부자는 결국 모든 것을 아들에게 남기기를 원했기 때문에 모든 소유를 종에게 물려주었고 바로 그 종을 아들이 선택하기를 원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지만 그 하나의 의미를 안다면 그것은 전부이기도 했습니다.
보혜사를 구한다는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성령님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성령을 구하기를 원하셨고 우리가 성령을 구하기만 하면 예수님은 그 성령을 하나님께 구해서 우리가 얻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성령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령의 존재의 속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을 사모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모든 욕구와 감정 속에서 성령의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속성과 일치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 삶 속에 나타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드러내게 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나타내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애초에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이 세상에 주님의 뜻을 나타내기를 원하셨기 때문이고 오늘날 성령을 통해 그일이 이루어질 때 주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놀라운 창조의 목적이 성취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우리와의 관계를 간절히 원하셨던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의 소원을 잊지 말고 동일한 소원으로 채워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감독에게 영광은 선수들의 승리이고 위정자에게 영광은 백성들의 평안함이고 지도자에게 영광은 이끄는 자들의 일체와 순종인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은 그 성도들의 모습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니 그러한 영광을 사모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소원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또한 세상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이 달라지는 것을 보면서 말입니다.
이번 기도제목 속에서도 우리는 여러 가지 소원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단지 성황당이나 우상에게 비는 소원과 다를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소원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소원의 내용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지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어질 것입니다.
오늘도 함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원, 성령으로 더욱 충만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럴 때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충만히 부어지시고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소원으로 더욱 가득하게 되어질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 넘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