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이 따라올 수 없는 길로 가심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전에 우리가 고난과 영광의 관계를 잘 알지 못했을 때에는 고난은 고난이고 영광은 영광이라고 따로 따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고난에서 영광으로 가는 것이나 혹은 영광에서 고난으로 가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쩌면 지금도 고난이 영광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말씀을 통해서 분명히 아는 것은 고난과 영광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관계로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주님이 영광에 대해서 하시는 말씀을 고난과 연계해서 살펴보면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여기서 말하는 영광은 가룟 유다가 나가서 예수님을 밀고함으로서 비로소 십자가의 고난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또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시는 영광임을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고난이 진정한 영광이 되리라는 것을 예수님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그 영광은 고난 이후에 찾아올 진정한 영광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영광과 사망권세를 이기시는 영광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은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그 고난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영광으로 바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아셨기 때문에 고난과 영광을 굳이 구별하지 않으셨고 그 모든 것을 고난으로 보신 것이 아니라 영광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또한 우리도 그러한 영광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2. 주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따라올 수는 없지만 있는 곳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영광을 알게 하시고 설명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고난을 통한 영광이 임할 때까지 그들이 자신을 따라올 수 없음을 이해시키셨습니다. 주님의 가시는 길에 제자들이 따라올 수 없는 이유는 그 이전까지는 모든 일에 같이 동참하였고 경험하게 하셨으나 이 고난 만큼은 주님의 독단적인 사역이자 주님만이 걸으셔야 하는 외로운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그 길에 준비가 되지 않은 제자들은 따라올 수가 없었고 다만 그 길을 예수님 혼자 떠나가시는 것에 대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준비를 시키셨습니다.
“33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주님이 가는 고난의 길에 그들이 참여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지금 그들이 해야할 일이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의미였습니다. 고난을 받는 것은 오직 주님이 하셔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실로 우리의 모든 죄악과 질고를 지고 몸소 그 죄값을 치루시기 위해서 외롭고 힘든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그들에게 주님은 무엇을 말씀해주셨을까요? 함께 기도하자고 하시던 주님께서 함께 고난을 받자고는 하지 않으시면서 남아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신 그들이 해야하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알리라”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필요했던 이유는 주님이 고난의 길을 가시는 이유가 이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지시고 고난을 받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하나님도 예수님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랑으로 이루어진 일인데 남은 제자들이 서로 미워하고 서로 의심하고 서로 책임을 전가하면서 사랑을 잃어버릴까 걱정하셨기 때문에 주님은 남은 제자들이 새 계명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3. 베드로는 따라오고자 하였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오히려 세 번이나 부인할 뿐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새 계명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요구한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닌 우리 자신의 뜻을 따를 때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끝까지 고집을 피우고 주님을 따라가겠다고 했습니다.
“37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그러나 그 말은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는 목숨을 버리려고 했을 지 모르지만 진실로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목숨을 버리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코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으면서 베드로는 자신의 만용을 나타냈던 것 뿐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초라하게 세번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자가 되고 말았고 스스로의 의지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뼈저리게 깨달아야만 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 자의 모습은 이렇게 연약합니다. 모세도 스스로 구원하고자 했을 때 어이없이 사람을 죽이는 자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4. 우리는 주님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려고 하지 말고 주님께 순종함으로 따라가고자 해야 합니다.
주님이 가는 곳에 따라가려고 하지 말고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지키라고 하신 가르치심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줍니다. 우리는 늘 주님처럼 살아가는 것이 목표라고 하지만 실제로 주님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흉내내다가 더 큰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로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하다가 더 큰 실족함에 빠지게 될 뿐입니다. 실제로 그러한 노력 속에서 더큰 좌절에 빠진 베드로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개혁 개방을 하기 전 러시아의 한 지하교회에서 예배가 드려지고 있을 때 복면을 한 일단의 총을 든 무리가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벽에 걸려 있던 예수님의 초상화를 땅에 내려놓고 이 초상화를 밟고 지나가면 살리고 그렇지 못하면 죽인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초상화를 밟기를 거부했고 어떤 사람들은 초상화을 밟고 지나갔습니다. 그 총을 든 무리들은 약속대로 초상화를 밟고 지나간 자들을 풀어주어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렇지 않은 자들을 남겨두었습니다. 이윽고 그들만 남게 되자 갑자기 그들은 복면을 풀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진실한 예배를 드리고 싶어서 진실된 교회에 찾아왔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기뻐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눈물을 흘리며 뜨거운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가 진실함이 없을 때 가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늘 주님 자신이 혹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진실한 신앙생활을 원하십니다. 그것은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종교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은 가장 진실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진실한 신앙이 우리의 사랑함과 순종함 속에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함과 서로 용남합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자들이 됩시다. 그것이 고난이 아닌 평안에 있는 우리가 해야하는 일입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더욱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용납하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나의 목표를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함께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