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셨을 때 예수님은 인자의 영광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때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실까를 고민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세부적인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로 인해서 생겨나는 고민을 풀고자 하는 노력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알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장면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들이 예수님을 뵙기를 원한다고 하였을 때 예수님은 인자의 영광을 말하였습니다.
“21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 부분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왜 예수님은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뵙기를 청하였을 때 그 때가 바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되었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인자의 영광과 헬라인들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미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이세상에 오신 목적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바로 12장에서 헬라인들의 방문을 통해 더욱 구체적이 되고 있습니다. 11장에서 보았던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바로 헬라인들이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죽으시는 인자의 영광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헬라인들이 원한 것은 사실 구원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인자의 영광은 바로 그 헬라인들을 포함한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실 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자의 영광에 대해서 우리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이미 예언된 것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일어나게 되는 놀라운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예수님은 자신이 이루실 일들을 바라보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을 고치고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더 중요한 예수님의 일은 바로 온 세상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희생을 제외하면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일이 전부 감당할 만한 것이었지만 희생만큼은 도저히 쉽게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희생은 인자의 진정한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물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병자를 고치고 많은 사람들을 먹인 것으로 유명한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가장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은 세상을 위해 죽으신 일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진정한 영광입니다. 헬라인들의 방문은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영광을 전조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찾아왔고 그들이 얻고자 하는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그 희생을 거부하거나 혹은 피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그 영광의 의미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결코 희생하는 것이 없이는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그 희생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열매를 바라보십니다. 희생의 괴로움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열매를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십자가의 영광을 향해 나아간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희생의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자신의 희생을 이루신 것으로 끝이 아니고 우리를 그 희생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은 감사하고 고마운데 우리를 예수님의 희생으로 부르시는 것은 부담스럽고 괴로운 일이 됩니다. 왜 예수님은 그냥 자신의 희생으로만 끝내지 않으시고 우리를 그 희생으로 부르시는 것일까요?
“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왜냐하면 그 희생이 단순히 사람들을 살리는 것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그 희생은 그로 인해서 사람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그 희생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온전히 나타나게 하였습니다. 받으시는 영광을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으시고 완전하게 받으시도록 만들었습니다. 희생과 영광은 그래서 동시에 존재했던 것입니다.
다시 이사야 53장으로 돌아가봅니다. 과연 그 희생 속에 영광이 증거되고 있는 것일까요?
“53: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게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으니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분깃을 함께 얻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전에도 그러하셨고 이후에도 그러한 분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희생은 영광을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4. 하나님이 예수님을 귀히 여기시는 것처럼 예수님의 희생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귀히 여기심을 받는 자들이 됩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희생의 길을 제안하시는 것은 그 영광에 동참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함께 고난을 당하자고 하는 것은 함께 영광을 누리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제안은 무섭거나 괴로운 것이 아니라 은혜롭고 감사한 것입니다. 대통령이 여러분에게 함께 일하자고 해보십시오. 사장님이 여러분에게 함께 일하자고 해보십시오. 목사님이 여러분에게 함께 일하자고 해보십시오. 이 모든 것은 희생을 동반하지만 구체적인 영광도 함께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가 주님께 있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길은 비록 희생이 따르지만 감당하면 놀라운 영광이 임하는 길입니다. 그 길을 따르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과 함께 그 희생을 감당하고 그로 인해서 영광을 누리시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시간 주님의 길을 가겠다고 다시한번 다짐하면서 함께 기도합시다. 주님의 희생을 우리도 하고자 할 때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영광을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 길을 걷겠다고 그 길을 잘 걸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다같이 손을 들고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