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정체성] 47고후 5; 15-17 새로운 피조물이 할일2Loading the player...
47고후 5; 15-17 새로운 피조물이 할일2_5
2018. 2. 2. 금. 금요철야
*개요: 고린도후서 연구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후]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교회에 나오게 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또한 설사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또 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고려하면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것 같습니다. 교회를 나오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일들이 힘들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절차가 복잡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단지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 마음이 바뀌어 교회에 나오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경우가 그리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몸을 일으켜 교회에 나오면 되고 마음을 움직여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어렵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전도해서 교회에 나오게 하고 예수님을 믿게 한다는 것을 하나의 성공이라고 간주했을 때 복음의 성공율은 사람을 설득시키는 어떤 노력들보다도 훨씬 낮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동차를 파는 것이나 책을 파는 것이나 약을 파는 것이나 보험을 들게 하는 것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사거나 가입하거나 받아들이게 하는 것보다도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훨씬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평생 한 사람도 전도하지 못하고 죽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전도율은 거의 정체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몇 교회를 제외하고서는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비슷비슷한 사정입니다. 또한 세계적으로 보면 기독교는 오히려 전도는 커녕 날로 그 교세가 줄어들고 있는 형편에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것이 힘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믿게 되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마음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교회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실천에 옮겨 직접 교회에 나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을 가진 자들은 얼마나 복된 자들입니까? 그들은 수십대 수백대 아니 수천대의 1이라는 확률을 뚫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님이 소개되고 있지만 우리 교회가 전한 복음을 듣거나 본 사람도 수천명이 넘지만 그러나 몇 사람만이 그속에서 구원이 이르는 믿음을 얻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그리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고후]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 죽으심으로 우리가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구원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애써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으로 믿음생활이 끝나는 것일까요? 자동차를 팔기 위해서 애써서 설득하고 설득하여서 결국 그 자동차를 사게 만든 다음엔 다 끝나는 것처럼 그렇게 전도도 끝을 본 것일까요? 보험을 들게 하기 위해 책을 사도록 하기 위해 회원가입을 하게 만들기 위해 애쓰고 쫓아다니고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여 한 명에게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면 그것으로 그 사람에 대한 모든 열정이 다 끝나는 것처럼 그렇게 복음전파도 끝이 나는 것일까요? 교회에 나오게 설득하고 실제로 교회에 나오게 한 뒤에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도와주어서 결국 영접하게 만들었다면 그것이 끝이겠습니까? 자동차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보험을 가입시키는 것이 책을 사게 하는 것이 회원가입을 하게 하는 것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그것으로 끝이 날 수도 있고 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복음 전파는 절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일 뿐입니다.
본문 말씀은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 영접하고 나면 그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성경말씀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후]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것이 새로운 시작의 목표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영접한 한 사람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하는 것이 목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이란 그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연습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뜻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이제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살게 된다는 것. 어떻게 보면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사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어디 갔습니까? 그러면 앞으로는 예수님이 죽으라면 죽고 예수님이 살라면 살아야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여기 살라면 여기 살라고 저기 살라면 저기 살고 이것을 하라면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라면 저것을 하라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그렇게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비합리적이고 소모적이며 인격을 완전히 무시하는 그러한 삶이 아닙니다. 아마 공산당이 이러한 표어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당이 하라면 하고 당이 하지 말라면 하지 말고 나의 존재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공산당의 표어와 복음의 목표는 언뜻보면 비슷하지만 그러나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공산당의 경우 당은 나를 위해 죽지 않습니다. 당은 나를 대신하여 자신을 희생시키지 않습니다. 당의 이익이 나보다 더 우선합니다. 나는 소모될지라도 당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내 능력과 내 힘과 내 상황으로라면 당연히 죄값을 받아 죽을 수 밖에 없는 나를 살리셨습니다. 나는 바닥까지 떨어질대로 떨어진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나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오직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믿는 자도 역시 자신처럼 살아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의 이념이 아닙니다. 헛된 망상이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은 바로 내 스스로를 살리는 것입니다. 내가 힘껏 애써봐도 나 자신을 살릴 수 없지만 내가 하나님을 위해 애쓰면 하나님은 나를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날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삶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지금 막 그리스도를 믿은 어떤 초신자에게도 바로 이러한 삶이 주어져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교회에 나오는 것이란 예수님을 믿은 후에 꾸준히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란 바로 이와 같은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삶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연습이 무엇입니까? 배우고 실천해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삶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배웁니다.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이 되기 위해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그리고 그 배움을 실천해 봅니다. 때로는 잘 되지 않습니다. 실패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연습입니다. 다시 할 수 있습니다. 될 때까지 몇번이고 반복합니다.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을 제대로 살아나가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그리고 이제 막 그리스도인의 길에 들어선 초신자도 그와 같은 끊임없는 연습의 장에 뛰어든 것입니다.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했다고 해서 이것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 생활을 한 지 얼마되지 못했다고 해서 전혀 못 이루는 것도 아닙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느냐 신앙생황을 한 지 얼마나 되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누가 얼마만큼 앞서 갔느냐 누가 얼마나 그 목표에 다가갔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라보는 목표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이라는 것은 마치 우리가 태양을 바라보고 달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태양이라는 목표를 바라보고 달리지만 태양이 우리에게 가까와 집니까? 태양은 너무나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태양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보잘 것 없습니다. 다 대동소이합니다.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아무리 경건하고 주님을 위해 사는 자라 할지라도 인간인지라 죄가 많습니다. 실수가 많습니다. 부족한 자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신앙과 모범을 보여준 분들이 많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같은 분을 보십시오 얼마나 인격과 믿음에 있어서 훌륭합니까? 그러나 그분도 과거엔 신사참배했던 사람입니다. 늘 그때문에 자신을 죄인이라고 부르던 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자랑하겠습니까? 우리는 다 부족한 죄인일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위해 사는 삶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아가려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멀어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아도 포기하고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 목표를 바라보면서 죽을 때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목표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놀라운 변화를 경험합니다. 성경은 이어서 말합니다. “[고후]5: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은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놀라운 변화에 대해서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를 위한 살아가려는 목표를 가지고 노력할 때 변화하게 됩니다. 그 변화는 이전과 이후로 나뉩니다. 이전의 모습은 육체대로의 모습입니다. 나면서 가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원래 그 사람의 성격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그 모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지라고 결심하기 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바뀝니다. 놀랍게 바뀝니다. 앞으로는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어쩌면 변해도 이렇게 변했나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해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새롭게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것이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전의 모습은 사라집니다. 과거에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유익만 알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베풀 줄은 모르고 받을 줄만 알았던 세상적이고 마귀적이고 정욕적이었던 모습이 주님을 본받아야겠다는 간절한 노력 끝에 다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새로운 인격과 새로운 모습이 그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게 변화를 경험하는 자를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릅니다. 새것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을 위해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다 이와 같은 새로운 피조물이고 새것인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새로와져야 합니다. 신앙생활한 지 얼마나 되었든지 간에 우리는 오늘 이 시간 또 한번 새로워져야 합니다. 끝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늘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매일 새로워져도 그렇게 10년 20년을 살아도 여전히 새로워질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 방금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나 10년 20년전에 믿은 사람이나 동일하게 말씀을 통해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정말로 주님을 위해 살아야 겠다는 마음을 새롭게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에 그들은 어부요 세리요 무식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그들이 담대히 말하는 것을 듣고나서 대제사장들은 놀라서 저들이 과연 과거의 그 볼품없던 사람들이 맞느냐고 물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사도가 되어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수행하였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아름답게 영광스럽게 존귀하게 변화시키십니다. 변화되기를 주저하지 마십시오. 오늘 이시간 이후부터 저와 여러분 모두는 새로와지십시오. 새로운 피조물이 되십시오. 딴 사람이 되십시오. 과거의 우리들을 알던 모든 사람들이 ‘어쩌면 사람이 달라져도 이렇게 달라지는가!”라고 탄성을 지를 것입니다.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늘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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