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마] 40마 26; 69-75 베드로의 통곡의 이유2Loading the player...
40마 26; 69-75 베드로의 통곡의 이유2_5
2019. 10. 11. 금. 금요철야.
*개요: 마태복음 연구 [마]26: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마]26: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마]26: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마]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마]26: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마]26: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마]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대제사장의 뜰 밖에서 심히 통곡하고 있습니다. 왜 그는 예수님을 그렇게 많이 부인하게 되었을까요? 그가 받은 세 번의 질문은 모두 그에게는 치명적인 시험이었고 그 시험에 모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면서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맞았음을 깨달았을 때 수치심과 절망감으로 인해서 통곡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렇게 세 번이나 부인한 이유는 사람들의 다그치는 말에 겁먹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너무나 세게 다그쳤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베드로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말을 내뱉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변화산에서 자신도 모르는 말을 정신없이 했던 것처럼 그렇게 생각없이 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닭이 울었을 때 그는 모든 상황을 깨달았습니다. 정말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었던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던 교만함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통곡했습니다. 그는 세 번의 부인 속에서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실패는 우리에게는 교훈입니다. 우리도 베드로가 받았던 세 번의 시험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은 쓰러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각각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베드로는 갈릴리 사람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69절입니다. “[마]26: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마]26: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는 예수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의미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처음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따르기 시작한 뒤 그 이후를 줄곧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시간들을 부인해 버렸습니다. 그와 함께 자신의 인생의 3분의 1이 부인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신앙생활을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역사입니다. 그 속에서 살고자 할 때 주님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그는 나사렛 사람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71절입니다. “[마]26: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마]26: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이것은 나사렛 사람이라는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나사렛에서 사셨던 예수님의 신성과 그리스도되심을 의미합니다. 공적으로는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음을 부인하는 것은 그동안 믿고 따르고 있었던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스스로 부인했던 것을 의미합니다. 나사렛 예수님의 모든 은혜로우심과 거룩하심을 모두 부인했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신실했던 신앙심의 부인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는 자신의 생애의 3분의 2가 부정되고 무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그는 자신이 이전에 행했던 경험과 사역을 보여주는 말소리를 부인했습니다. “[마]26: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마]26:74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그것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행했던 모든 자신의 말을 부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속에 자기 자신이 있고 지금까지의 그가 있었는데 그는 그 모든 것을 다 날려버렸습니다. 이렇게 세 번 부인함으로써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예수님과 했던 그 모든 것을 전부 부인했습니다. 그것이 허무하고 좌절스러워서 그는 통곡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자신이 그것밖에 안되는 자임을 알게 되어서 통곡했습니다.
우리는 순식간에 한번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단 한번의 실수가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한번의 혈기를 내는 것이, 한번의 욕심을 내는 것이, 한번의 정욕대로 행하는 것이, 그리고 한번의 마음을 놓는 일이 모든 것을 걷잡을 수 없이 결코 돌이키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닫게 해버리는 것입니다. 모세가 그랬고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다윗이 그랬고, 삼손이 그랬습니다. 그로 인한 결과는 참으로 비통한 것이었다. 울며 통곡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다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가룟 유다와 다른 점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에 대한 사함을 받고 용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의지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하지 못한 것을 괴로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 번의 실수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한 번이 열 번이 되고, 열 번이 백 번이 되는 것을 알기에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번으로 심판을 내리시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용서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임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돌이킨 후에 제자들을 굳게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눅]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용서를 굳게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용서의 의미는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었어도 주님께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울며 통곡하는 베드로 만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말고 베드로처럼 되지 말고 울며 통곡하는 자가 되지 말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하듯 모든 사람들에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앞으로도 바라보아야 할 것만을 바라보고 한번의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능력을 신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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