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6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7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하나님의 사자와 자기 자신의 양심
지난 주에 이어서 우리는 권세자들에 대해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사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선을 이루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만약 우리가 선을 행하려 하지
않는다면, 권세자들은 우리에게칼을 휘두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싫든 좋든 선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임을 모른다 할지라도, 그 칼이 무서워서라도 명령에 따르게 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는 권세자들에 대해 그 말을 따라야 하는 이유 두 가지를 배운 셈입니다. 하나는 그들이 우리에게 선을 이루게 하는 하나님의 사자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들이 휘두르는 칼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외에 하나 더 다른 이유를 추가해 줍니다. 그것은 ‘양심’입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13: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하나님의 사자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나, 노를 인하여 그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알겠는데, 양심을 인하여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신앙적 기준 이외에 그리고 본능적 기준이외에 다른 기준이
또 있다는 말입니까? 과연 ‘양심’이라는 기준은 어떤 것입니까?
양심이 무엇인가를 이야기 하기 전에, 우리는 양심의 효용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양심은 어떤 때에 사용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에 대해서 입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입니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양심
하나님께 대해서는 신앙이 사용될 것입니다. 신앙적 기준에 따라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은 신앙과 관계된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본능이 사용될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유익한 것과 유익하지 않은 것은 본능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배가 고프면 먹으려 하고 졸리면 자려고 하고 힘들면 쉬려고 하고 이 모든
것은 본능적 요구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어떤 기준이 사용될까요? 신앙적
기준이 사용되겠습니까? 아니면 본능적 기준이 사용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양심’이라는 기준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은 바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용되는 것입니다.
양심을 또 다른 뜻은 ‘부끄러움’입니다. 수치심을 갖는 것이 양심입니다.
혼자 있을 때에는 수치심이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 수치심이 생깁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다른 사람에게
불편을 끼쳤을 때 우리들의 마음 속에는 수치심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러한 양심은 사람마다 다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왠만한 일에도 좀처럼
수치심을 느끼지 않습니다. 도리어 뻔뻔하게 대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양심에 화인맞은 자들입니다. 양심이 굳어져버려서 좀처럼 자극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양심은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대개 비슷비슷합니다.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개인별로 천차만별이지만 어느 정도 비슷한 정도의 양심,
다른 말로 하면 수치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이러한 양심이 나타난 때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입니다. 창3:7을 보십시오.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은 자동적인 하나님의 대비하심에 따라서 몸의 변화로 수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에 눈이 밝아졌기 때문에 이러한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들은 더욱 악한 모습으로 타락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수치심이 오래 가지 못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수치심, 다시 말하면 양심은 우리 삶에서 더 큰 죄악으로 나아가는 것을 막지만 그러나 양심은 죄성을 막아낼 수 없기 때문에
결국은 더 큰 죄악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을 대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그들을 내보내시고 그와 함께 화염검을 두어 지키셨습니다.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이것이 양심의 촉구를 가져오고 이로 인해서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도 그렇게 안할 뿐만 아니라 강제적으로도
죄를 더이상 짓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일들이 우리 사는 세계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 상황에서의
화염검이 우리의 양심을 촉구하며 더 큰 죄를 짓지 않도록 막아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6절 말씀을 보십시오. 6절의 의미가
좀더 분명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13:6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권세자들이 항상 노력하고 힘쓰는 것은 바로 이 양심을 세우는 일입니다. 이 양심이란 우리들 각 사람에게 형성되어야 하는 본분인데, 바로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양심이 이루어내는 것
공세를 바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공세의 유익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갑니다. 우리는 자신이 내는 공세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공세를 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공세를
내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가는 유익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입니다.
일반 세금은 어떻습니까? 전기료나 수도료등의 요금은 누구의 유익을
위해서 내는 것입니까? 역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냅니다. 결국은 더 많은 사람에게 유익이 돌아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관공서와 정부와 행정기관은 이러한 요금을 걷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저 그러려니 하고 아무 생각없이 납부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들은 그 의미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들
세금이나 공세나 요금을 통해서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이 받게될 유익을 생각하게 되고, 양심을 바르게 세우게 되며 이러한 양심은 바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세워놓으신 기준임을 새롭게 깨닫는 것입니다.
정부나 행정기관과 같은 권세 이외에도 우리가 속해있는 권세들은 많습니다. 그속에서는 회비를 내기도 하고, 적립금을 내기도 하고, 여러가지 다양하게 돈을 내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강제성을
지니기도 하고, 혹은 자율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그 모든 소속 중에서 우리들은 ‘양심’을 배웁니다. 그 양심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 이익을 위해서 내가 솔선하는 마음입니다. 양심을 통해 우리는 더욱 이기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이타적인 사람들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이상의 삶을 사는 자들
오늘 말씀은 윤리교육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것은 분명 성경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입니다. ‘양심’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양심’에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일을 위해 여러분들은 말씀에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야 하는 방법이 여기 나와 있습니다. 7절입니다.
“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유익만 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자들임을 나타내시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