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10: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10:47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10: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1. 베드로는 세례를 주면서 성령세례도 받게 하였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고넬료와 함께 모인 자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 복음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대로 화평의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그 복음을 듣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는 말씀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말씀이 그들 속에서 역사함과 동시에 성령께서는 따로 그들에게 역사하셨던 것입니다. 이럼으로써 그들에게는 놀라운
성령의 부어짐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본에서는 성령의 선물을 부어주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말씀을 듣는 중에 그들은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았고, 이 모습을 본 베드로는
그들이 세례도 받기에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결국, 그들은 성령의 부어주심에 이어 세례까지 받았습니다.
일견, 이 모든 과정은 별다른 것이 없어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조심해서 이 사건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똑같이 성경을 보았는데도 엉뚱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엉뚱한 이야기라 함은 성령의 부어주심과
세례를 따로 분리하는 것입니다.
2. 사람들은 성령세례를 물세례와 오해하면서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이러한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자들은 세례를 받은 자들이라도 다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례만 받은 자들은 물세례를 받은 것이기 때문에 다시 성령세례를 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자신들의 방법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또한, 물세례는 그냥 물로 베푸는 세례이고, 성령세례가 성령으로 부어지는 진짜 세례라는 것입니다.하지만, 이것은 성령세례와 일반세례를 분리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는 본문에 나오는 사건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닙니다.
성령을 부어주심이 있고 나서, 베드로가 세례를 주라 명함으로써 성령부어주심과 세례가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나중에 베드로가
11장 16절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좀 더 이전부터 전해졌던 주님의 말씀이 있었는데, 그 말씀이 이러한 오해의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말씀 자체가 오해의 원인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이 오해의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11장 16절에서 베드로는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성령부어주시는 일이 있은 다음에 세례를 주라 명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성령부어주심과 세례는 함께 가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11:16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그래서 베드로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 바로 고넬료에게 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미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은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풀것을 허락했던 것입니다. 그는 말씀을 바르게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처음 들을 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사건들과 현상들을 통해 그 말씀은 더욱 분명하게 증거됩니다. 이제서야 비로소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모든 세례를 통해서 더욱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신다.
그러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자들은 베드로의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봐라 여기 물세례가 있고 성령세례가 있지 않느냐, 이 둘은 구별되지 않느냐, 그러니 더욱더 물세례를 받은
뒤에도 성령세례를 받아야 할 것 아니냐’
이들이 잘못 보고 있는 것은 물이나 성령으로 구분되는 세례의 방식입니다. 본질을 보지않고 방식을 보니까 물세례냐 성령세례냐 식의 구분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받는 세례의 방식은 물세례입니다.
방식과 방법에 촛점을 맞추니까 현재 받는 물세례는 완전한 것이 아니고, 다시 새로운 성령세례를 받아야 그것이 올바른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본질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의 세례이냐라는 것입니다.
물세례나 성령세례나 형식이나 방법의 차이가 아니라 그것이 누구로부터 나온 세례이냐가 바로 본질입니다. 사도행전 1장 5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이전에는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나. 앞으로는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방법이나 방식의 차이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완전히
변화된 세례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의 세례에 반대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세례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세례는 물로 준다 하더라도 역시 그리스도의 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나, 그리스도의 세례나 동일하게 물로 주지만 분명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하는 표시이지만, 그리스도의 세례는 깨끗하게 된 표시입니다. 물이라는 방식은 같지만, 본질은 전혀 틀린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세례는 성령으로 주어지는 세례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주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것은 성령으로 된 일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는
표시요 인침이기 때문에, 우리가 받는 세레가 바로 성령으로 받는 세례입니다. 이를 정리해 본다면, 요한의 세례와 구별되는 그리스도의 세례는 물세례요,
성령세례며, 씻음이요, 깨끗케 함이요, 인침의 표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으로는 족하지 않고, 다시 성령세례를 또 받아야 한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세례를 받은 것이 이미 성령으로 말미암는 세례를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와 성령세례는 동일한 것이며 같이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원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고넬료와 함께 한
무리들이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았을 때에, 그들에게 더이상 세례 베푸는 것을 주저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미 그들에게 성령이 분명하고도
충만하게 주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부어주심과 성령으로 세례받는 것은 동일한 의미였습니다. 다만 한가지 다른 점은 은사가 동반되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4. 우리는 성령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자들이
되자.
오늘날, 성령세례를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좀더 말씀의 의미가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세례를 받고나서 또다시 성령세례가 필요하다는 엉뚱한 말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말은
이렇게 수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령세례가 아니라 성령의 은사 부어주심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입니다. 성령의 부어주심으로 인해 우리가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자들로서 더 큰 은사를 부어주심을 사모합니다. 그러나 혹 은사의 부어주심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만족하고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충분한 성령이 우리에게 부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그 성령님과 동행하며 사시는 우리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주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날마다의 성령체험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