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 복음을 전하는 것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두렵고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나타낼 때에 우리의 믿음은 온전해집니다. 우리가 빛을 가지고 있다면 그 빛은 퍼져야 합니다. 빛을 가지고 있다면 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빛이 아닙니다. 빛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꺼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전도활동은 그렇게 쉽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전도합시다 할 때 예 그럽시다!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전도합시다하면 다들 표정이 어두워지고 안색이 창백해집니다. 전도하러 나갑시다
하면 역시 다들 많은 사정들이 생겨납니다. 갑자기 없던 약속이 생기기도 하고 갑자기 연락안하던 사람들이 연락을 해오기도 하고 여기저기서 어서 빨리
해결해주어야 하는 문제들이 터져나옵니다. 그런 사정들이 얼마나 반가운가요! 얼른 그 문제를 해결하러 가는 것이 중요하지 지금 당장 전도하는 것은
그리 쉽게 내켜지지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전도를 생각할 때 전도활동을 머릿속에
떠올릴 때 우리는 대개 두려움과 수치심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가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특히 신앙이 오래되고 연륜이 있는 사람일
수록 더 그렇습니다. 신앙이 얼마되지 않은 사람들은 전도한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 생각이 없을 수도 있지만 신앙이 오래되고
전도하면서 과거에 아픈 경험, 힘들었던 경험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당연하게도 전도라는 말만 들어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이 전도를
한 사람도 그런 마음을 느낍니다. 물론 점차 아무 생각도 없어지고 익숙해지기도 하겠지만 어느 누구나 처음에 전도를 하러 나갈 때에는 그런 두려움과
수치심이 드는 것입니다. 또한 열심히 할 때에는 좀 덜해 지다가도 다시 오랜만에 전도를 한다고 하면 역시 동일하게 두려움과 수치심이 들게 됩니다.
그렇게 두려움과 수치심이 드는 것은 정말 인지상정입니다. 안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가 전도 앞에서는 나약해집니다. 복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을 전파하고 싶지는 않은 것입니다.
2. 제자들도 성령이 아니고서는 복음전파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러분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 조차도
스스로의 힘으로 전도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훈련을 받았던 제자들도 두렵고 수치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들이 전도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충만하게 임해서 그들이 말하게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전도를 할 수 없었고 성령님을 통해서만이 전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십시오.
“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들이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충만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다른 방언으로 말하였고 그 방언의 내용은 복음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전도할 수 있었고 그것이 그들의 복음전파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그 방언을 들은 사람들은 여러 곳에서 살다가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살고 있던 곳은 바대, 메대, 엘림, 메소보다미아, 유대, 가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과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이었으며 로마와, 그레데인과 아라비아 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전부 혈통상 유대인이거나 혹은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로서 일년에 한 번씩
오순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온 해외거주 유대인 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자기들이 사는 곳에서 쓰는 용어를 아는데 그들이 자신들만 알아 들을
수 있는 지역언어를 바로 이 제자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하는 말 속에서 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11…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각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한번도 배워보지 못한 지역의 언어로 말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충만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지어낸 가공의 말이 아니라 자신들이 억지로 준비한 인간적인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하게 하시는 온전한 내용의 복음을 사람들에게 전하였고 또한
그들 자신도 두려움과 수치심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어떤 사람들은 ‘새 술이 취하였다’고 하였는데 정말 제자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취하여서 완전히 변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우리에게 있는 신앙을
컵에 있는 물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신앙의 단계가 있는데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컵을 마련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그 속에 은혜를 담는 것이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확신이 더 있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확신이 있기는 하지만
부족하기도 하고 개인적인 차이가 생깁니다. 여기에 더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은 이 컵 속의 물이 넘치는 것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차 올랐던
컵의 물이 어느순간 넘치게 되면 비로소 밖으로 흘러 넘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그렇게 넘치게 될 때에 컵 안의 물은 밖으로 흘러나오게
되고 컵을 쥐고 있는 손은 적시게 됩니다. 이것은 새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기쁨이
넘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커다란 평안이 마음 속에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처럼 이렇게 그 컵의 물이 넘쳐서 다른 사람에게 따라
주기도 할 때 비로소 복음의 전파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의 전파는 결코 인간적인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속에서부터 우러나와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해 밖으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결코 자신의 의지나 노력으로 복음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성령의 충만함이 임했을 때 그것이 밖으로 흘러 넘친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수치심을 이기고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의 내용 자체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누가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성령님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이 세계의 창조와 심판과 구원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생각 자체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오직 신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셨기 때문에 복음이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 복음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3.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감정을 새로운 결심으로 감당하게
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성령님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령님,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령 하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시면서 이 세계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성령을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의 신’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숨’이라고 번역이 됩니다. 2장에서 인간을 만드실 때 생기를 불어넣으셨는데 그 때 역시 하나님이 인간에게 ‘숨’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이 부분이 바로 성령께서 역사하신 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령님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잘 아십니다. 특히
감정과 욕구를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것, 우리가 분노하는 것 등 인간의 감정 상태와 마음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알고 그것을 변화시키십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처음에 하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을 통해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 이후에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신앙을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는 마음을 이겨내고 수치스러워하는 마음을 극복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9장에는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수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의 두려움을 붙들어 주시고 그에게 안수하게 합니다. 또한 그럴 때 성령께서 사울을 충만하게 채워주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 17절 말씀입니다.
“행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성령께서는 아나니아도 충만하게 하시고 사울도 충만하게 하셔서 그 모든 두려움을 벗어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사울을 안수하였고 사울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그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가기를 두려워하였을 때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마음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0장 19절입니다.
“행10: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또한 사도행전 18장에서는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두려움을 아시고 그를 강하게 해 주셨습니다.
“행18: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이처럼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그 마음의 형편 속에서 극복해야하는 두려움과 수치심을
이길 수 있게 해주십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한계입니다. 우리는 결코 그 한계를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컵에 물을 부을 때 그 물을 넘치게 부어본 적이 있습니까? 한번도 없습니다. 제정신으로는 절대로 그 컵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그보다 적게 물을 붓습니다. 또한 그보다 적게 물을 받습니다. 우리는 그 한계를 넘어서지도 않고 넘어설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넘치게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우리의 감정보다 우리의 욕구보다 항상 하나님은 더 넘치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감정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두려움과 수치심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이든지 그것이 컵의 한계보다 낮으면 절대로 넘치지 않습니다. 확장되지도 않고 퍼주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넘치면 그것은 변합니다. 그 감정은 결심이 됩니다. 그 속에서 사랑이
생기고 그 속에서 희락이 생기고 그 속에서 화평과 인내가 생겨납니다. 그런 결심보다 두려움과 수치심이 더 앞선다면 그런 결심은 사그라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을 극복하게 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이 있을 때 우리는 그 새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충만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충만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고 복음전파로
나아가자.
저도 처음에 전도를 나갔을 때의 그 두려움과 수치심이 기억이 납니다. 전도를 나가 있을 때 괴로운 것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전도를 나가기 전에도 괴롭고 전도를 나가기 전 날에도 전 주에도 괴로웠습니다.
그러니까 전도만 생각하면 괴로웠던 것이지요. 하지만 전도를 하고 나면 뿌듯합니다. 내가 나의 두려움을 이겨냈구나 나의 수치심을 극복했구나 라는
성취감이 들었습니다. 또한 성령님을 의지해서 이 두려움의 한계를 이 수치심의 한계를 극복했구나라는 것이 기뻤습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기에 또 다시 전도를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섭니다. 하지만 성령을 의지해서 나를 붙들어 주십시오라고 간구하고 맡기고 의지하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담대해지고 평안해져서 전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전도를 생각하면 저와 같은 두려움과 수치심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것을 느끼니까요. 하지만 그럴 때 성령님께 의지해 보십시오. 혼자 힘으로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해보십시오. 그러면 어느 새 두려움은 사라지고 인내심이 생길 것입니다. 수치심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함이 마음 속에 자리잡을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마음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감정을 전혀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마치 뜨거운 물에 일회용 차를 집어 넣어서 녹차를 만드시는 것처럼 뜨거운 물에 커피스틱을 넣어서 커피 한잔을 만드시는 것처럼 아무 쓸데 없을 것
같은 우리의 감정에 성령님의 손길이 임하면 그것이 놀라운 결심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감정을 주님께 맡겨보십시오. 그러면 주님이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변화를 전도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다른 삶의 상황에서도 생각해 봅시다. 평소의 삶속에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때가 있습니까? 치솟는 분노와 미움과 절망에 사로잡혀서 어쩔 줄 몰라하던 때가 있습니까?
그러면 성령님께 의지해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그냥 그대로 불타게 내버려 두지 말고 성령님께 도와달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을 순식간에 변화시켜 사랑으로 희락으로 화평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성령님의 손을 붙잡으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의 감정의 한계를 극복하십시오.
그것을 승리하게 되실 것입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면 감정의 한계를 극복하게 될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어떤 기업인이 그런 감정의 한계 속에서 괴로워하다가 성령님을 의지하게 되고 그래서
자기가 경영하는 기업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면 믿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이름은 스탠리 탬이었습니다.
그는 United States Plastic 회사의 회장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업의 50퍼센트를 주님께 바쳐서 해외 선교사를 돕는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모든 사업체를 100% 하나님께 바치고 자신들은 봉급을 받는 회사의 고용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사람이 되는 데에는 그가 젊었을 때 경험한 놀라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 은 재생 사업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큰 실패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업 초기부터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며
열심히 일해온 젊은이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실패가 웬 일입니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쳐오는 것입니까?”
집을 향해 운전을 하며 자문자답하듯 탄식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스탠리의 마음에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스탠리야, 너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네 사업을 내게
맡기지 않으련? 너는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하나님께서 너를 붙드시고 공급해 주신다는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잠시 고민하던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 대답을 했습니다.
“주님, 주님이 성공을 시켜 주십시오. 저는 모든 면에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런데 곧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스탠리의 사업은
다시 복구가 되어 좋은 경기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십일조 헌금에 그치지 않고 그 다음에 자신의 사업의 50퍼센트를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런 다음 60퍼센트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나서 100퍼센트를 바쳤습니다. 그 이외에도 그는 영혼구원 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헌신적으로 섬겼으며 많은 세미나를 인도하고 또한 전도에 대해 강의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두려움에 떨 때에 절망감으로 인해
괴로워할 때에 성령님을 의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도 계속해서 성령님을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는 담대함과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모든 일을 다 잘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번 9월에 여러분이 새로운 성령의 충만에 도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지 전도가 아니라 여러 삶의 고비속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두려움과 수치심을 넘어 성령의 충만함으로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누리는 여러분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과 즐거움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못 오를 것 같았는데 딱 오르게 된 그 기쁨, 못할 것 같았는데 딱 하게되는 그 감격을 영적 생활 속에서
바로 이번 9월에 누리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에게 성령의 충만이 임하게 되고 그로 인해 복음의 놀라운 전파가 이루어지는 이달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