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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죄책] 45롬 1;21-25 하나님을 버리는 자들과 하나님이 버리시는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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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롬 1;21-25 하나님을 버리는 자들과 하나님이 버리시는 자들_1



2010.9.26 주일오전

1. 세상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놓고 자신만의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토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지난 한주 우리는 민속 고유의 명절인 추석을 보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추석 전날 큰 비가 와서 생각지도 않은 커다란 시련이 찾아오기도 했지만 우리 모두는 여하튼 추석이라는 절기를 다 마쳤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일상생활로 돌아왔고 이번 주 부터는 원래대로의 한 주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예전에는 추석 때 제사문제 때문에 많은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자신의 경우로 과연 제사를 지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의 문제로 절을 해야 되는가 말아야 되는가의 문제로 가족들 간에 혹은 친척들 간에 많은 갈등이 있었던 것이 과거의 모습입니다. 요즘은 그런 경우는 별로 없지만 이번 추석에도 어딘가에서는 제사문제로 그리고 절하는 문제로 갈등과 다툼이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분께만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믿지만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고 조상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조상에게 머리숙여 절할 수가 없고 그것은 우상숭배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이 존재하더라도 조상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거나 절을 하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생각의 차이, 믿음의 차이가 갈등과 반목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갈등은 단지 추석에 제사문제에서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든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납니다. 최근 여러 언론매체에서는 유명한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가 ‘신은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내용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는 최근 발간한 자신의 저서인 ‘위대한 설계’라는 책에서 신이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또한 미국 CNN의 한 인터뷰를 통해서는 ‘신이 존재할 수는 있지만 과학은 창조자의 도움없이 우주를 설명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신보다 과학이 창조를 설명하는데 더 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흥미로운 반응이 하나 있었는데 로마 카톨릭의 교황이 반박하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교황 베데딕토 16세는 영국의 한 대학에서 열린 종교회담에서 호킹박사의 말에 대해 언급하면서 ‘과학이 인간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라고 반박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과학이 종교를 부정하면 협소해지니까 그러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호킹박사나 교황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실 그들의 이야기는 둘 다 옳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호킹박사의 이야기도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교황의 이야기도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저 한 사람의 개인으로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나름대로 표현하는 것이었다면 별다른 반응이 없었겠지만 평범한 한 개인이 아니라 위대한 과학자와 세계 천주교의 수장으로서 하는 말이기 때문에 언론과 및 많은 대중들도 공감하거나 혹은 반대하거나 혹은 주목하면서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또한 많은 기독교 목사님들도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역시 그런 말은 그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그 중요도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 여기에 대해서 냉철하고 합리적으로 반박하는 것과 그냥 별로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 그 말에 대해서 한 마디로 거부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여하튼 우리가 이러한 논쟁을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견해입니다. 유명한 물리학자가 어떤 말을 하든지 유명한 교계의 총수가 어떤 말을 하든지 유명한 정치인이 어떤 말을 하든지 간에 세상 사람들은 이런 저런 말을 하나님에 대해서 합니다. 사회적으로 아주 평범하고 교회를 한번도 다녀본 적이 없는 분들도 역시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을 합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 하나님에 대해서 옳건 그르건 자기 나름의 생각대로 한 마디씩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런 모든 하나님에 대해서 하는 말과 논쟁에 대해서 하나님 자신은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2.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 사람들의 헛된 착각과 망상을 눈여겨 보고 계십니다.

욥기에 보면 욥과 세 친구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이 하나님에 대해서 서로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참을 떠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이렇게 행하신다 등등. 그것이 장장 3장부터 37장까지 34장이나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은 어쩌면 그렇게들 잘하는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나님은 직접 욥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들의 모든 말에 대해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욥42:7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

그러니까 말은 열심히 하였지만 그들의 말은 정당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말을 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잘못된 말, 정당하지 않은 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행히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면서 회개의 번제를 드림으로써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자신이 잘못 말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똑바로 말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에 대해서 바른 이해를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어리석게 말하지 않고 무지하게 말하지 않고 부정직하게 말하지 않고 올바르게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로마서 1장말씀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줍니다. 이 말씀을 하나씩 음미하다 보면 호킹 박사가 왜 틀렸고, 왜 교황의 말이 잘못되었으며, 그외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함께 2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냥 알면 되는 분이신가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냥 알면 그것으로 전부인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 분이며 감사해야 하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이 세계를 지으신 분이시고 우리는 그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만이 전부인 줄 알지만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는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부분이 있고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존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만드시고 다스리시며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전부 없애버리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놀라우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는 것은 지금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생각이 허망해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보는 것이 전부고 자기가 듣는 것이 전부고 자기가 느끼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우물안 개구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많은 호킹박사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날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식수준과 학력고하 및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다 박사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아는 세계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지만 하나님만 밀쳐내면 자기 세계 안에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필요도 없고 감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세계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 가득한 나름 체계잡힌 세계이지요. 하지만 그 세례를 둘러싸고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만 그분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또한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허망한 생각과 어두운 마음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에게도 역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감사를 돌려야 하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세우심과 도우심과 살피심을 입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의식을 하던 하지 못하던 간에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우리는 두 번째로 23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게 됩니다.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은 썩지 아니하고 퇴색하지 아니하고 바래지 않는 영원한 영광이지만 그 영광을 썩어질 사람의 형상으로 금수의 형상으로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이나 동물이나 새나 파충류의 형상으로 바뀌어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어떤 피조물의 형상으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존재를 여러분이 만드는 어떤 것으로 축소시킬 수 있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만드는 그 어떤 것 보다도 우월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사람과 새와 동물과 파충류를 만드셨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런 것들로 바뀔 수가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산과 바다와 태양과 우주를 만드셨고 그런 어마어마한 것들로도 바뀌지 않으시는 것처럼 작은 것들로도 바뀌실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교황이지요. 천주교, 정식으로는 로마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은 하나님의 형상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그런 교황과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처럼 만듭니다. 여기서 ‘우상’이라는 것은 영어로 ‘image’입니다. 이미지를 만들었다는 것은 단지 조각하거나 그리거나 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야기 속에서 담화 속에서 작품 속에서 하나님을 인간처럼, 하나님을 새나 동물처럼, 하나님을 파충류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그래야 하나님을 다루기가 쉬워지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무한한 하나님, 썩지 아니하는 영광의 하나님으로는 다루기가 어려우니까 조그맣고 불쌍하며 단순하게 하나님을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너무 볼품이 없어서 영광과 감사를 드릴 수가 없군요!’

그럴 때 하나님은 길거리에 걸려있는 십자가 정도입니다. 자동차에 붙어있는 십자가 정도입니다. 벽에 붙어있는 성화 정도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분께 영광을 돌리거나 그분께 감사를 해야 하는 건 아니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우신 분이며 늘 감사를 드려야 하는 분이며 결코 어떤 이미지로도 변화될 수 없는 무한하고 광대하시며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3.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의 더러움을 회개하지 않을 때 그 더러움 속에 내버려 두십니다.

아까 욥기에서도 보았지만 욥의 세친구들의 잘못된 하나님에 대한 설명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노하시면서 회개를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회개함으로써 진노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좀 다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자들에게 회개를 명하고 계시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잘못된 하나님께 대한 이해를 바로잡기를 원하시지만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그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즉시 심판을 하신다면 우 리 생각에는 좋겠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온유하심은 너무 커서 그런 자들에 대해서 즉각적인 하늘의 심판을 내리시기 보다는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게 더 무서운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그 죄악 중에 내어버려두시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 버려두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썩어질 우상의 모습으로 바꾸어버렸다는 것은, 그리고 그런 모습을 회개하지도 않고 돌이키지도 않는다는 것은 그 속의 마음의 정욕이 보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두려움을 상실하고 죄책감을 잃어버리고 수치심을 잊어버린지 오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그 스스로 그 죄악의 결과를 경험하게 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형벌인지 상상이 되지 않으십니까?

예를 들어, 치매에 걸린 나이든 노인이 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배설물을 내고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또한 치워주려고 해도 거부합니다. 그래서 보호자가 포기해 버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끔찍합니까? 배설물에 배설물에 배설물을 내면서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도움을 거부합니다. 혼자 힘으로는 결코 처리를 할 수 없으면서도 계속 고집을 피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내어 버려두신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그 가지고 있는 불경스러움에 그 나타내는 거만함에 그 보이고 있는 무례함에 대해서 경고하시며 회개하라고 하셨건만 그것을 끝까지 거부할 때 그를 그 모든 더러움에 내어 버리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계속해서 불경스럽습니다. 계속해서 거만합니다. 끝까지 무례합니다. 그 모든 죄악의 결과는 스스로 자기 몸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사람들끼리 만나게 하십니다. 불경스럽고 거만하며 무례한 사람은 자기처럼 불경스럽고 거만하며 무례한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자신의 모습을 마치 거울처럼 보는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보다 더 불경스럽고 거만하며 무례한 자를 만나게 하십니다. 그런 다음 서로 더욱 욕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그 영원하심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 사람들에게 행하시는 일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옥이 그림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거역한 자들이 받게 되는 형벌의 시작인 것입니다.


4.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며 감사하며 의지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큰 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받는 이러한 하나님의 엄위로운 심판을 보면서 우리는 옷깃을 여미며 그들과 우리가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흔히들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으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무엇을 믿느냐고 하면 대답이 궁색해집니다. 결국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정도였던 것 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압니다. 그건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하나님을 알되’로 시작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알지만 그것이 어쨌다는 것인가요?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께 영광을 돌리거나 그분께 감사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지 알기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은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도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잘 믿는 것은 아닙니다. 잘 못 믿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나요? 알기는 하지만 그대로 섬기지 않는 것이 왜 중요한 문제인가요? 하나님은 왜 진실로 섬기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기 때문입니다. 이미 더 섬기고 경배하는 것이 따로 있기 때문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뒷전으로 밀려가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로, 세상 사람들이 주일을 주님께 드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주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다른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 만으로는 안됩니다. 그들은 주님을 창조주로 믿어야 하며 영광을 돌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붙들어 주십니다. 마음의 정욕대로 살도록 내어버려두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을 그냥 내어버려 두십니다. 마음대로 살도록 말이지요.

방금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버려두시고 그로 인해 세상 사람들은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한다고 하였다는 것을 보았는데 여기에서 세상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차이가 생겨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제어하고 끌어 안으며 우리를 통제하십니다. 악착같이 끈질기게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몸이 욕되지 않는 것입니다.

배설물을 가리지 못하는 아기를 생각해보십시오. 부모는 악착같이 아기의 배설물을 치워줍니다. 하루에 세번 네번 다섯 번을 볼일을 봐도 그때마다 지체없이 깨끗하게 갈아줍니다. 그래서 아기는 늘 깨끗합니다. 늘 보송보송합니다. 부모가 아기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남편을 통해 아내를 통해 아버지를 통해 어머니를 통해 할아버지를 통해 할머니를 통해 선배를 통해 선생님을 통해 원장님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정욕을 씻어주십니다. 마음의 더러움으로 인해 생겨나는 육체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결코 포기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는 섬기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하나님을 여러분은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을 의지하면 여러분은 그렇게 변화되어집니다. 여러분을 귀찮게 하는 그 누군가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임을 믿으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믿으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가정에서 교회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으면 여러분이 변화되어집니다. 그렇게 변화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마음의 더러움을 버리게 되고 육체의 깨끗함을 얻게 됩니다. 그 깨끗함 속에서 여러분은 진심으로 하나님의 찬송이 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가 되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정말 제대로 한번 믿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의 찬송이 되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찬송이 되는 하나님의 자랑이 되고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복음을 전파합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심판하심을 믿는 복음을 전파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마음의 정욕대로 내어버려지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찬송이 되는 자들로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찬송이 되지 않는 자들이라면 하나님을 열심히 찬송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우리 모두 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진정한 찬송이 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개요 {4서신서}, <4이야기>, [1영역-사회]~[0복음-심판]
1. 세상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놓고 자신만의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 토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의 헛된 착각과 망상과는 다른 분이십니다.
3. 하나님은 그들이 자신의 더러움을 회개하지 않을 때 그 더러움 속에 내어버려두십니다.
4. 우리는 하나님만을 섬기며 감사하며 의지할 때 큰 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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