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우리는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너무 바쁘게 살면 외로움을 느낄 여유도 없겠지만 문득 정신이 들고 한가함이 찾아오면 우리는 외롭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의지했던 사람도 기대었던 사람도 함께 있으면 즐거웠던 사람도 어느 순간에는 다 떠나가고 모든 사람은 그렇게 홀로 서게 됩니다. 지금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더 나이가 들면 느끼게 됩니다. 언젠가 한번쯤은 반드시 그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아무도 함께 해주 주지 못하는 때가 있고 그럴 때 우리는 혼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지독하게 외로울 때 함께 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있을 때에는 몰랐지만 사람들이 다 떠나고 나면 그래서 외로움을 느끼게 될 때 그제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만이 우리의 근원적인 외로움을 채워주십니다. 하나님 만이 우리를 영원토록 떠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에 우리는 모든 결핍과 모든 외로움과 모든 연약함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했지만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만약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줄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의 피조물인 인간이 이 세상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 그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의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란 그분께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살피고 계십니다.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우리를 모를 래야 모르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시선 앞에서 피할 래야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동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동행하는 것은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합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그 순간 우리는 주님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 우리가 나아갈 때 주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것은 그냥 의식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생각만 하는 것과도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은 구체적으로 응답하시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의 수준에 따라서 그 응답의 수준도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2. 베드로는 지붕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자 하였다.
오늘 말씀 속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함께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행동으로 보여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조금 앞으로 거슬러 가보면 9절에서 그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베드로는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그 때가 제 육시였습니다. 이 육시는 오늘날의 정오에 해당합니다. 때는 식사시간이 되었지만 베드로는 식사보다도 기도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베드로가 기도하였고 그는 정오 식사시간 전에 기도를 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 새벽이든 정오이든 아니면 저녁이든 아니면 그 모두 다 이든 항상 따르는 것은 기도를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중요한 것을 할 것인가의 선택입니다. 새벽시간이 편하다고 새벽에 기도를 하든가 아니면 정오에 하든가 아니면 저녁에 한다 하더라도 항상 그에 경쟁하는 다른 선택이 존재합니다. 그것이 밥을 먹는 것이든 잠을 자는 것이든 일을 하는 것이든 언제나 기도를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을 할 것인가가 고민되는 법입니다.
베드로는 식사시간에 식사를 먼저 하지 않고 기도를 먼저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을 우선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생각하고 따르는 것이 동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려고 했을 때에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러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 환상에 대해서 설명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지도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의 기도에 온전히 응답해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응답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은 의구심을 품습니다. 이런 응답이 가능한가에 대해서 의문을 품기도 합니다. 혹은 성경시대에서는 가능하지만 지금시대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늘 존재해 왔습니다. 정확히 그런 형식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항상 존재합니다. 다만 인간의 신앙수준에 따라서 응답의 형식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주님의 응답은 모호하지만 느껴지는 것으로 다가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에게 그 응답은 좀더 구체적입니다.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에게는 그 응답이 훨씬 더 선명합니다. 듣거나 보기도 합니다. 사명감당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밝히 드러나며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믿음이 부족한 자들의 한계를 비웃으시고 언제나 주님을 사모하는 자에게 그 응답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한다면 기도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3.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실생활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단지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는 것으로만 국한된다면 많은 오해가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더 많은 설명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하나님과 함께 해 보니까 이렇더라고 하면서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너무나 지나친 개인주의적 해석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코끼리를 나름대로 정의하는 것처럼 우리도 크고 높으신 하나님과의 동행을 우리 식대로 제한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이러한 편협함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동행은 다른 식으로 계속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를 하고 그 응답을 받으면 뭐합니까? 삶에서 그 기도대로 살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내가 기도한 내용과 그 응답에 대해서는 너무나 하나님과의 동행이 구체적이었지만 기도가 끝난 뒤 삶 속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본적으로 말씀하신 것들을 행하지 못하고 산다면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역시 신앙수준에 따라서 경험하게 되는 죄이고 그 죄를 극복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갑자기 성인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살아오던 삶이 있습니다. 그 죄성의 영향력 속에서 살아갑니다. 믿은 지 얼마 안된 사람이 갑자기 모든 희생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자기 믿음의 분량대로 자기 신앙의 수준대로 삶 속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만큼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갖는 믿음만큼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각자의 신앙의 수준대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그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신앙수준보다 더 많은 순종은 어렵습니다. 또한 자기의 신앙수준보다 더 부족한 순종은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수준만큼 순종을 할 때 그 수준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4. 베드로는 고넬료의 하인들의 부름에 응하여 그들과 함께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떠났다.
이 두 번째 주님과 동행하는 의미에 대해서 베드로는 정말 주님과 동행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자신의 신앙수준에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을 올려 드릴 수 있었나요? 그렇습니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수준은 ‘사명감당’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순종의 분량은 ‘변화를 형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가 끝나서 집안으로 내려왔을 때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고넬료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고넬료는 특별히 집안의 하인 둘과 함께 군인 한명도 같이 보냈습니다. 어쩌면 그 군인이 위압적으로 보여질 지 모르겠습니다. 영화에서도 종종 보지만 로마군인이면 얼마나 위엄이 있습니까? 그리고 백부장이면 백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사람이지만 특별히 그는 이달리야대라고 하는 로마황제의 직할부대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경호부대장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보냈다는 사람들과 도착한 사람들의 모습은 어쩌면 베드로로 하여금 두려움에 빠지게 했을 지 모릅니다. 또는 의심을 하게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기도를 끝낸 베드로는 현실 속에서 정말 기도에 따라 순종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기도는 많이 했고 응답도 받았지만 현실은 그리 평탄하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도와주신다, 힘을 내라는 응답을 받고 마음의 위로는 얻었지만 막상 삶으로 돌아와 정말 그 기도대로 순종해야 하는 순간이 닥치면 우리는 쉽사리 순종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가 어떤 연속선상에서 삶과 연결되는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삶에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에서부터 출발한 것이 삶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로마군인과 귀로 듣는 한번도 보지 못한 백부장의 모습을 두려움과 의심으로 상상하지 말고 기도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동행하는 것입니다. 또한 동행해야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자신을 데리러 온 사람들과 어디로 갈 지 알지 못하는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욥바에 있었습니다. 그는 가이사랴로 오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베드로는 용감하게 그 길을 갔습니다. 하나님은 그길을 거부할 까봐 환상도 보여주시고 친히 성령을 통해 의심하지 말라고 미리 용기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대제사장의 부하들 앞에서 두려워하다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였지만 이번엔 더 이상 의심과 두려움에 순종하지 못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과 동행하면서 담대히 길을 떠났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동행하십니까? 또한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이 두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먼저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면서 응답을 기다리십시오.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그 신앙의 수준대로 반드시 응답을 내려주십니다. 자신의 신앙수준 이상의 응답을 요구하지는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자일뿐입니다. 자신의 신앙에 맞는 응답을 간구하십시오.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순종하십시오. 현실은 냉정합니다. 현실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으로 우리를 위협합니다. 그러나 기도중에서 만났던 주님을 붙드십시오. 그리고 현실을 이겨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순종을 감당함으로 주님과 동행하십시오. 하나님은 신앙수준에 맞지 않는 순종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은 항상 여러분의 신앙수준에 알맞은 것입니다. 그 때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주님과 함께 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 속에 충만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늘 외롭지 않고 늘 두렵지 않고 늘 절망하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개요 {4서신서}, , [5은혜-동행] 1.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응답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2. 베드로는 지붕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의 응답을 듣고자 하였다. 3.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실생활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4. 베드로는 고넬료의 하인들의 부름에 응하여 그들과 함께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