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28일에 일어난 천안함 사건은 이제 거의 넉달정도가 지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희미해져갈 무렵 그 사건과 관련해서 새로운 논쟁이 하나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천안함 사고로 순직한 고 신선준 상사의 어머니와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두살때 집을 나가서 이혼을 했다고 합니다. 그 뒤 28년 동안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남처럼 살다가 이번에 아들이 죽고 보상금을 받게 되자 그 정부 보상금을 타기 위해 나타났고 실제로 보상금을 타갔고 남은 국민성금 보상금까지 달라고 요구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사람들은 낳았지만 기르지 않았고 버린 어머니가 이제와서 친권행사를 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분개하였고 또 어떤 사람들은 낳은 어머니의 권리가 있으니 그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먼저, 그 생모의 요구를 비난하는 입장은 이런 것입니다. ‘도대체 어머니로서 한 일이 무엇이냐’라는 것입니다. 낳기만 했지 해준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어떻게 어머니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한 일이 없는데 권리만 누리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오히려 의무를 지키지 않은 것으로 욕을 먹어도 알맞을 판에 도리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겠다며 나서는 그 친모는 너무나 이상해 보입니다.
반대쪽에서는 이 문제를 권리와 의무의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의 문제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아들을 낳지 않았으면 어떻게 아들이 존재할 수 있는가, ‘낳아준 어머니로서 분명한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말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분명 친모인 것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기서 아버지가 재혼을 해서 새엄마라도 있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면 좀더 분명해지지 않았을까요? 아니 오히려 더욱 복잡해졌을까요? 부모에게 상속권을 준다고 했는데 어머니 몫의 상속권은 친모에게 있느냐 아니면 계모에게 있느냐를 따지는 것이 더 간단한 문제였을까요, 아니면 더 복잡한 문제였을까요? 이것은 가상적인 경우이니 더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것 같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는 계모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과연 가정을 버린 친모에게 상속의 권리를 주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의 문제인 것입니다.
2.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해주신 일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일이다.
저는 이 문제를 단순히 가족의 영역에서 벗어나 신앙의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성도 사이에서도 비슷한 갈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보는 것처럼 예수님은 2천년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으심으로 인해 하나의 유산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고백할 때 자기 죄가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그 죄가 사함을 받음과 동시에 우리는 신분상 하나님의 자녀들이 됩니다.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상속입니다. 유산인 셈입니다. 마치 고 신선준 상사가 사망함으로 정부보상금 1억원과 국민성금 보상금 5억원이 생겨난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고백함으로 그 예수님이 마련하신 죄사함의 유산을 받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단지 고백할 뿐입니다. 정말 그 고백은 입에만 있습니다. 그 고백이 거짓되거나 혹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것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고백을 학습예식으로, 세례예식으로, 입교예식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누가봐도 정말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습니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것은 그 고백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니까 예전의 고백은 점차 사라집니다. 어느 순간 그 고백을 떨쳐버립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릅니다. 1년, 5년, 10년, 20년, 30년 동안 사라지는 것입니다. 고 신선준 상사의 어머니도 그랬습니다. 그분이 아들을 낳은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분명하게 열달 배아파서 난 자식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낳은지 2년만에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아이도 버렸습니다. 그 아이는 아버지와 누나가 키웠고 그리고 시간이 점차 흐르고 흘렀습니다. 무려 28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이제 30세가 되었을 때, 그는 천안함 사고와 함께 순국했습니다. 그를 기리면서 보상금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족들은 아들을 잃고 동생을 잃은 슬픔 속에서 남겨진 유산, 남겨진 보상금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다시 나타납니다. 아들을 버렸던 그 어머니가 다시 나타납니다. 그리고 가족에게 가게될 보상금의 반을 가져가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없는 듯 살았던 어머니에게 가족들은 배신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마련해주신 이 놀라운 생명의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약속해주신 이 놀라운 신앙의 유산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기만 하면 얻게되는 이 구원은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인간의 죄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 예수님의 죽으심을 고백하는 자들은 자녀로 받아주시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지만 죽음 이후에 우리가 한 일을 심판받는 지옥으로 가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갈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죽으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의 유산입니다. 그런데 이 유산을 악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은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고 합니다. 나중에 늙어서 죽기 전에 교회에 나오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슬아슬하게 구원을 받겠다고 합니다. 그 때까지는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고 싶다고 합니다. 교회 다니면 하고 싶은 대로 살 수가 없으니까 당분간 교회 안다니면서 자유롭게 살다가 때가 되면 오겠다고 합니다. 또한 교회는 나가기는 하지만 딱 주일예배만 나가겠다고 합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하지 않겠다고 공언합니다. 절대 평일에 예배는 드릴 수 없습니다. 성경공부도 질색입니다. 교회봉사? 그건 교회에 푹 빠진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내가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은 믿지만 나는 절대로 주일대예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고 공언합니다.
여기서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은 못하는 것과 안하는 것은 다르다는 점입니다. 비록 부모와 함께 살아도 부모가 못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가 여력이 안되서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족에게 대놓고 그렇게는 못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섭섭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그렇습니다. 여력이 도저히 안되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 한계를 주님도 아십니다. 그러나 대놓고 하나님께 절대로 그렇게는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죄사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어떠한 구원인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죄사함을 받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죄를 사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예수님은 모욕과 침뱉음과 희롱함을 당했습니다. 누구의 죄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요? 바로 우리의 죄입니다. 우리 각자의 죄때문에 주님은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셨습니다.
“31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예수님은 홍포를 입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언덕까지 가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도와주어야 할 만큼 그 십자가는 무겁고 힘든 것이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 무거운 짐을 지셔야 했을까요?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 하시더라”
사람들은 고통을 덜게 하고자 마취제요 진통제인 쓸개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드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먹으면 고통을 잊어버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 때문에 그랬을까요? 바로 우리 때문에 고통을 자청하신 것입니다.
“35. 저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그리고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옷은 군병들이 제비 뽑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쓴 죄패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강도들도 함께 못박혔습니다. 악한 일을 한 강도들처럼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것도 못박혀서 스스로 죽을 수 없고 빨리 죽지도 않는 괴로운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때문이었습니까? 주님의 죄가 그 머리위에 기록되었습니다. 바로 ‘유대인의 왕 예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은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이 아니었으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의 왕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죽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이름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왕이었기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왕이었기 때문에 죽으신 것입니다. 진실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이 ‘우리의 왕’이라고 고백하면 그분의 죽으심이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 됩니다. 그냥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부족합니다. 그냥 우리를 위해 죽으신 위대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왕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왕이심을 고백할 때 우리는 그 왕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그 왕의 유산을 물려 받는 것이고 그 왕이 거하는 나라에 가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기 전에 예수님께 나오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예수님을 자신의 ‘무엇’으로 생각하는 것일까요? 어떤 천국으로 가게 할 수 있는 ‘해결사’나 혹은 ‘브로커’정도로 생각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무엇일까요? 또한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심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이렇게는 못해요 저렇게는 못해요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 것일까요? 모든 상황을 다 받아주는 친구? 아니면 그 정도는 다 용납해주시는 아주 인정과 사랑이 많으신 할아버지? 잘 모르겠습니다. 각자 나름대로 생각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누구로 생각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날 위해 죽으신 ‘나의 왕’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그분의 종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4. 우리는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받아들여서 그분의 유산을 받아 누리는 자들이 되자.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보상금과 관련된 문제는 가족들의 소송으로 법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민사재판이 전개될 테니까 법의 판결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다만 바라는 것은 담당재판부의 지혜로운 판결이 나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진짜 어머니가 누군지를 가려내었던 솔로몬의 재판처럼 생물학적인 권리만을 주장하고 부모로서의 의무는 저버린 그 어머니의 어리석음을 잘 드러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고 신선준 상사의 진정한 가족이 진짜 유가족이 자신들이 받을 수 있고 받아야만 하는 그 유산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만약 그 고 신선준 상사에게 유산이 아니라 채무가 있었다면 그 생모가 나타났겠느냐고도 합니다.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정 유산을 줄 것 같으면 잘 찾아서 채무도 함께 주는 것은 어떤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십자가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지를 잘 보아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에는 분명히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에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보십시오. ‘아무개의 왕 예수’그분이 바로 여러분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입니다. 그 희생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되었습니다. 왕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말고 단지 천국갈 것만 생각하지 말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은 여러분을 위해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셨는데 여러분은 주님께 무엇을 드릴 것입니까? 여러분의 시간을 드리고 여러분의 물질을 드리고 여러분의 재능을 드리십시오. 그것이 주님의 죽으심을 믿는 자들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가족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면서 더욱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 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개요 1.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주셨는가를 의심할 때가 있다. 2. 주님이 우리를 위해 해주신 일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일이다. 3. 예수님의 죽으심은 모욕당하며 고통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일이다. 4. 우리는 죽으신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받아들여서 그분의 유산을 받아 누리는 자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