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동행] 43요 20; 11-16 부활하셔서 가까이 계신 예수님Loading the player...
43요 20; 11-16 부활하셔서 가까이 계신 예수님_1
2023. 4. 9. 주. 주일오전예배.
*개요: 부활감사예배, #55동행
[요]20:1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요]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요]20: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요]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요]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올해 부활절은 예년보다 일찍 다가온 것 같습니다. 매년 부활절을 결정하는 조건은 춘분이 지난 뒤 만월이 지난 안식일 다음에 오는 주일입니다. 이 부활절 절기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이후에 모든 기독교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절이 언제인가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절기는 잠깐이지만 부활의 의미는 지속됩니다. 그래서 오늘 부활절에 우리가 묵상하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부활신앙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종교에는 없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한번 존재하고 사라지는 사건이 아닙니다. 한번 존재하고 계속 이어지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뒤 계속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을 때에 삶 속에서 살아 계신 예수님을 계속 깨달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신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현실 속에서 깨달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육체적인 감각으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성적인 깨달음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체적 감각으로 알려고 하지 말고 이성적인 이해로 알고자 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이성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20:11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요]20: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요]20: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는데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왜 우는가를 물어보았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져서 울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리아가 원했던 것은 시신에 향품을 바르는 것이었는데 향품을 바를 시신이 없어졌기 때문에 슬퍼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물론 그 말은 마리아가 향품이 아까워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누군가 훔쳐갔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슬퍼서 울었다는 뜻입니다.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다시는 못 보게 되었지만 그 뿐만이 아니라 시신도 사라져서 영영 기억도 못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울고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정반대로 부활하셨습니다. 뭔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십시오. 부활의 반대가 상태의 의미로 죽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생명의 반대가 죽음일 뿐입니다. 부활의 반대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을 계시록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부활, 둘째 사망’입니다. “[계]20: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이 말은 영생을 위한 부활이 첫째 부활이라는 뜻입니다. 영벌을 위한 부활은 둘째 사망입니다. 육으로도 죽고 영으로도 죽기 위해서 부활하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심판입니다. 상태의 의미가 아니라 활동의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서 같은 부활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활의 활동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찾았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그와 함께 하셨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몰라 뵈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몰랐습니다. 물론 외모로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너무 거룩하셔서 그럴 수 있겠지만 그 예수님을 자기가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찾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만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순간이 있습니다. 다음 장면을 보십시오. “[요]20: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요]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눈 앞에 예수님이 있었지만 그녀는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라고 물으실 때에 그녀는 동산지기인 줄 알고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그녀는 가져갈 예수님을 찾았지 만날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은 그녀 앞에 있었습니다. 그녀 앞에서 가져갈 예수님을 찾으니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지순례에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방문한 다음에 간 곳은 사데 교회였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책망을 들었던 교회입니다. 그런 내용을 유적지를 통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드넓은 사데 도시유적에서 아무리 찾아도 교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기둥과 거대한 건물이 교회가 아닌가 했는데 그건 정말 신전 그 자체였지 교회로 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참을 돌아 들어가야 비로소 교회가 있었는데 작은 문으로 들어가서 볼 수 있었던 작은 공간이 교회 유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었지만 죽은 자였던 것이 이런 이유였는가 생각이 되었습니다. 사데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이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가능성이자 소망이었고 그럴 때 그들은 주님과 함께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에 비해 너무나 다를 때 발견할 수 없고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처럼 육체로 나타나시는 분이 아닙니다. 계신지 안 계신지를 경험해 보고 믿을지 말지를 결정하려고 할 때에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경우처럼 자신도 그렇게 해주기를 원한다면 그 역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발견해서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섬기며 따라가야 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서 괴로워하며 슬퍼할 때가 있지만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생각하자. 우리는 삶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해 힘들 때가 있지만 그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본 것도 바로 그럴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야’라고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그때 그녀는 그분이 바로 살아나신 예수님이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랍오니여’라고 불렀습니다. 시신으로의 증거를 생각했지만 살아계심의 은혜를 경험한 것입니다. 부르시는 예수님과 그분을 따라가고자 했던 마음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랍오니여’라고 고백하게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가고자 할 때 예수님의 함께 하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초자연적으로 주시는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것이고 일반적으로는 방향을 맞춰서 자신을 바꾸고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따라가고자 할 때 주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밤 하늘에 별을 보려고 할 때 밝은 도시의 밤하늘에서는 볼 수 없고 시골의 한적한 곳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그 별을 따라가려고 하는 의도에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나에게 내가 원하는 방식을 나타나 주세요’라는 식의 요구는 하나님께는 온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따라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우리 삶에 이미 함께 하심을 생각하고 우리에게 이미 구원을 주셨음을 생각하고 우리에게 이미 부활을 설명해 주셨음을 생각하고 그 부활의 주님을 따라가려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해마다 부활절을 지키면서 우리가 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가 누리게 될 하나님의 생명과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의 은혜를 항상 기뻐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성: 6통찰적해석 1.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신다. 2.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찾았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그와 함께 하셨다. 3. 삶 속에서 괴로워하며 슬퍼할 때가 있지만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생각하자. 4. 그럴 때 주님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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