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연합] 11왕상19;3-8 신앙의 힘을 의지하여 도착하다2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크게보기]
11왕상19;3-8 신앙의 힘을 의지하여 도착하다2_2f
2019. 10. 27. 주. 주일오후.
*개요: 신앙비전, [왕상]19:3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왕상]19: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왕상]19: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왕상]19: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왕상]19: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왕상]19: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신앙수준에는 네 가지 구분이 있습니다.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가, 어떤 크기의 교회를 다녔는가, 교회에서 어떤 신앙교육을 받았는가에 상관없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네 가지 구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분을 통해서 그의 신앙수준이 어떠하며 앞으로의 신앙적 필요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연령별로 구분되는 것만큼이나 구체적인 이 신앙수준의 구분은 다음의 네 가지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을 믿는가, 두 번째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세 번째 성령충만을 받았는가, 네 번째 사명을 감당하는가 입니다. 첫 번째 단계인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과 이 세계를 심판하신다는 것을 믿는 수준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어떤 믿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기는 하지만 아무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불신앙에 더 가깝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철학사조를 ‘이신론’이라고 하고 허버트나 아이작 뉴톤, 벤자민 플랭클린, 토마스 제프슨 같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기는 하셨지만 그 이후로는 전혀 간섭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믿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창조 이후의 다스리심을 믿지 못하니 당연히 심판하심도 믿지 못합니다. 그러나 누군가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다스리심과 심판하심을 믿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앞서 보았던 하나님께서 인간을 심판하실 것인데 그 죄를 예수님이 사해 주셨다고 믿을 때 생겨납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고 그로 인해서 죄사함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예수님이 그렇게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지만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다시 부활하셨음을 믿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다시 부활하신 것을 믿는 자가 바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는 하늘에 시민권을 갖게 되고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습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성령충만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사하심에 대한 순수한 감사와 열정이 있을 때에 성령께서는 그 다음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게 하십니다. 성령의 충만을 통해서 성령님은 은사를 받게 하십니다. 은사가 생기면 하나님은 그 은사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인도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가라 하는 곳에 가고 하라 하는 일을 하면서 성령충만은 계속 유지됩니다. 은사는 인도함을 계속 따를 때에 더욱 더 많아 집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을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의 확신이 생기고, 성령충만도 받으면 하나님은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을 외면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면 사명에 대한 의무가 생깁니다. 때로는 사명을 위해 직분을 받게 되고 때로는 사명을 위해 책임을 지게 됩니다. 성령충만해서 인도함을 받을 때에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사명을 감당할 때에는 어려움과 고통이 따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잘 감당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십니다.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외롭고 힘들고 고달픈 일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상주시는 분이심을 바라보며 묵묵히 받은 사명에 충성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 모든 수고에 대해서 보상해주시고 행한 대로 상급을 내려주십니다. 이것이 성도의 최고의 수준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각 단계를 살펴보았지만 그 단계를 유지하고 또 다음 단계로 발전하게 되기는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잠깐 각 단계의 수준을 생각해 보면서 알게 된 것이지만 평생 동안 변화되는 단계은 딱 이 네 가지 단계 뿐이라서 아주 쉬워 보여도 삶의 여러가지 굴곡과 시련, 어려움과 고난 등을 생각해 보면 어떤 수준이든지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또한 상위 단계에 있다가도 하위 단계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개인별로 차이는 있지만 거의 한 단계에 십수년씩 걸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는 데 10년,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데 10년, 성령충만 받는데 10년, 사명감당하게 되는데 10년, 이렇게 따지면 끝까지 가는데 40년 정도가 걸린다고 볼 수 있고, 그나마도 건강이 안좋거나 여건이 안되거나 혹은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에는 할래야 할 수도 없습니다. 사명을 감당하고 상급을 받는 것은 애초에 포기할 수 밖에 없기도 하고, 성령충만을 받는 것도 그럴 수 있는 시간과 형편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면 은사를 받을 수도 없고 활용도 못하는 것이고, 구원의 확신도 정말로 굳건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무너져 버릴 수 있습니다. 그나마 구원의 확신은 있어야 천국을 들어갈 수 있는데 거기까지도 이르지 못한다면 구원의 확신이 없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도달했던 신앙의 수준을 유지하거나 혹은 더욱 발전시켜서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최소한 1단계는 넘어서서 2단계에 굳게 서고 천국을 보장받고, 더욱 나아가 3단계에서 은사를 받고 성령과 동행하며, 4단계에서 사명을 감당하고 상급까지 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어느 단계이든지 어떤 수준이든지 그 신앙수준을 유지하고 또한 발전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수준을 유지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해주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앙인들의 에너지입니다. 그 힘을 의지할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엘리야는 4단계 사명을 감당하는 수준에서 1단계 구주믿음으로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탈진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스스로 자살을 하려는 심정에 빠졌습니다. 조금만 더 나아가면 그는 정말 실족하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어떻게 할 지를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모르는 커다란 절망감과 커다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뎀 나무 옆에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절박한 심정이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으라고 어루만지며 말해주었습니다. 5절과 6절을 보십시오. “[왕상]19: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왕상]19: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죽고 싶어하는 엘리야에게 왜 천사가 나타나서 떡과 물을 주었을까요? 여기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다음 절에 나타납니다. “[왕상]19:7 여호와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여호와의 사자가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하노라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엘리야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나아가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로뎀나무 밑에서 죽기를 간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는 그에게 그가 어디로 가야 하는 지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길을 떠나 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떡과 물을 주면서 천사는 엘리야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엘리야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절을 보십시오. “[왕상]19: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그는 일어나서 또 먹고 마셨습니다. 그것은 길을 떠나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그가 나아가야하는 곳을 향한 준비였습니다. 그리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해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자신이 원하던 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식물의 섭취하고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고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 수준에서 뒤로 뒤쳐져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서 수준을 유지하고 또한 더욱 발전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어떤 수준에 있든지 여러분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돌이켜 보면 여러분이 각 단계에서 정말로 간절히 하나님의 영적인 양식을 사모했을 때에 하나님은 그 양식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또한 반대로 여러분은 사모하지 않았지만 직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양식을 충분히 공급받았을 때 여러분은 성장했습니다. 잘 먹으면 크고 잘 먹지 못하면 잘 크지 못하는 것처럼 영적으로도 말씀의 양식을 잘 공급받을 때 여러분은 성장하고 그렇지 못하면 여러분은 퇴보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바람 빠진 공과 같습니다. 공에 바람이 꽉 차 있었을 때에는 힘차게 튀어 오르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지만 공에 바람이 싹 빠져있으면 여기저기에서 버림받고 걷어 채이고 외면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든든하게 서 있으면 우리를 둘러싼 삶도 같이 충만해지지만 우리가 신앙에서 퇴보하고 있으면 우리의 삶도 같이 퇴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장과 퇴보의 주기 속에서 여러분에게는 개인의 삶과 가정의 삶과 교회의 삶, 학교, 직장, 사회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영적으로 강하고 든든할 때 여러분의 삶이 복되고 활기가 넘쳤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여러분이 영적으로 약하고 퇴보하고 있었을 때 여러분의 삶이 힘이 없고 나약해지며 초라해졌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늘 기회를 주십니다.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을 마련해주십니다. 영적인 양식을 마련해 주십니다. 각 시기마다 필요한 것으로 공급해주시는 것이고 지금 여러분이 받는 것이 가장 여러분에게 맞는 것입니다. 더 많아도 소용없고 더 적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의 양식을 공급해 주실 때에 받아 먹으십시오. 여호와의 사자는 엘리야가 먹으니까 또 갖다 주고 먹으니까 또 갖다 주었습니다. 먹지 않고 그냥 내버리면 더이상 갖다 주지 않습니다. 은혜의 양식을 먹으면 또 주시고 먹으면 또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계속 은혜의 양식을 말씀을 양식을 먹으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을 살립니다. 그것이 여러분을 로뎀나무 밑이 아니라 호렙산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결코 저절로 어떤 신앙적 행동을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의식적으로 노력하며 의지적으로 결심해서 해야 할 신앙적 행동을 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 자신도 그 영광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신앙을 발전시키고 키워나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신앙이라는 양식을 먹고 마심으로 우리는 계속 로뎀나무 밑이 있지 않고 예전의 기억을 떠올려 호렙산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은혜의 산 호렙산 하나님을 만나는 곳으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이전의 은혜가 있던 분에게는 향수를 가져다 주고 이전의 은혜가 없던 분에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욱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수준은 더욱 발전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놀랍게 은혜를 더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주제설교 관련글[더보기]16설교소감 관련글[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