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연합] 23사28; 1-8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필요한 사람들2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크게보기]
23사28; 1-8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필요한 사람들2_2f
2019. 10. 13. 주. 주일오후.
*개요: 신앙비전, [사]28:1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사]28:2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사]28:3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사]28:4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의 영화가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 [사]28:5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사]28:6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영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 [사]28:7 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사]28:8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신앙의 비전으로 신앙의 의미를 생각할 때 신앙은 비신앙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비신앙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비신앙을 버리고 오직 신앙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에만 나타납니다. 그렇지 않고 신앙을 비신앙, 불신앙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신앙의 의미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신앙의 의미를 가장 변질시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단입니다. 이단은 기독교의 정통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게 만드는 악한 길입니다. 그것은 분명 기독교 안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기독교를 위협하는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몸속의 암세포처럼 몸 전체를 망가뜨리고 죽이고 있는 존재입니다. 때가 이렇게 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중요성을 간과할 때가 많습니다. 이단을 이겨낼 힘은 오직 정통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뿐입니다. 과거 초대교회시절에도 이단이 득세할 때에 정통을 더욱 세우고 지켜 냄으로써 신학이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단이 판을 치고 있을 때에 정통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수호정신을 갖는다면 자신을 지켜낼 수 있고 더 나아가 신앙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정통신앙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고 말씀에 대한 이해보다는 자기 생각 속에서만 하나님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교리를 살피고 말씀을 실천하기 보다는 얄팍한 신앙적 이해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더욱 이단에 취약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한 취약함은 이단에 대해서 뿐만이 아닙니다. 일반 생활 속에서도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가 성경 속에서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지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기 보다는 세상적인 지혜 속에서 문제해결을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 뜻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가 더 헛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이단이나 세상적인 가치관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할 때 비로소 온전한 의미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원리에 대해서 우리는 이사야 28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합니다. 오늘 성경말씀 1절을 보십시오. “[사]28:1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은 마치 종교적인 지식에만 물들어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는 것은 많은 것 같고 교회생활도 많이 해본 것 같지만 진정한 능력은 없는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진정한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의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오해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대적함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이단에 쉽게 빠지는 것이고 불신앙의 모습을 갖게 됩니다.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즐거워하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삶 속에서는 계속해서 악순환이 일어나고 정통이 아닌 이단을 따르면서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게 됩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왜 자기들이 믿는 것이 이단이냐고 항변합니다. 이미 이단을 떠나기에는 늦어버린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단이 빠지지는 않은 상황이지만 중립적인 상태에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이단이 왜 이단이냐고 자꾸만 묻는다면 반드시 이단에 들어가게 됩니다. 반대로 정통에 대해서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아야만 정통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죄악에 대해서 자꾸만 자극을 받으면 언젠가는 그 죄악에 들어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이 이단을 바라보고 있는지 정통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아십니다. 또한 하나님을 찾는지 혹은 인간적인 즐거움을 찾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러한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 길을 알지 못하고 이러 저리 흔들리게 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사]28:13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 그들은 아무리 경계를 받아도 의미가 없습니다. 경계를 받고 받아도 교훈을 배우고 배워도 늘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원하는 것을 찾고자 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들이 그러한 자신의 부족한 인내와 순종하는 마음 때문에 진리를 얻지 못하게 하십니다. 지혜를 구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일어나는 일은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십니다. 결국 이단을 바라보는 자들이 이단에 걸려 넘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버릴 자들은 하나님을 버리게 됩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끊임없이 예수님을 거역하였고 속였으며 불순종하였습니다. 결국 그에게 예수님께서 해주신 말은 ‘가서 네가 하려고 하는 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 옳고 그렇게 하려고 하는 마음을 그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끝내 자기가 하려던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나아가는 그에게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라는 말은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이야기였을 뿐입니다. 다만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습니다. 지금도 이단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은 그러한 무지함이 결국은 자기 자신이 넘어지고 부러지고 걸리고 잡히게 됩니다. 가룟 유다처럼 넘어지고 쓰러져 결국 자기 죄책감에 발목이 잡혀서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개별적으로 이단에 빠진 자들과 세상의 지혜를 쫓는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이단의 무리와 세상의 어리석은 악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그 심판은 언제든지 멀지 않았습니다. 그 날은 결코 오랜 시간 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사]28:22 그러므로 너희는 오만한 자가 되지 말라 너희 결박이 단단해질까 하노라 대저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내가 만군의 주 여호와께로부터 들었느니라 [사]28:23 너희는 귀를 기울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자세히 내 말을 들으라”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그것이 모든 신앙생활의 의미를 결정짓습니다. 그럴 때 신앙생활이 작던 크던 모두 하나님의 뜻으로 나아가게 되면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이루게 됩니다. 그 반대인 이단이 판을 치는 모습을 보면 그들이 대단해보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종류도 많고 숫자도 대단합니다. 결코 정통에 밀리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단들의 활동상황은 정통을 오히려 무색케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단의 수도 많지만 불신자의 수도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이 심판 받을 때 이단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이 함께 하나님의 나라에 갈까요? 정통과 함께 이단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환영 받을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발견합니다. 패역한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심판을 예비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단이 무서운 것은 분명 그리스도의 몸에서 나왔지만 그리스도의 몸을 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존재가 그리스도 안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 밖에 있거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신앙의 모습에서 절대 흔들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어딜 가더라도 이단에 들어가지 말고 세속적인 가치관에 휩쓸리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올바른 신앙의 전도를 걸어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세상의 문화와 교훈에 빠지지 말고 신앙 안에서 굳세게 서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가르치심 속에서 잘 따르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삶 속에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주제설교 관련글[더보기]16설교소감 관련글[더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