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를 내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 중에서 특별히 무거운 벌을 받는 죄가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10대 중과실 사고라고 합니다. 단순히 교통법규를 어기는 죄 보다도 10대 중과실에 해당하는 사고는 더 큰 처벌을 받게 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 신호위반 2. 중앙선침범 3. 속도위반 4. 앞지르기위반 5. 건널목통과방법위반보행자보호위반
6. 무면허운전 7. 음주운전 8. 보도침범 9. 승차/적재위반 10. 사망사고’
이런 사고를 내면 비용만 형사합의금, 벌금, 변호사선임비 등 1000~2000만원이 들게 되고 형사합의금을 내지 못하면 구속까지도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10대 중과실 사고를 일으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죄에 대한 판단에서도 이러한 구별이 존재합니다. 다른 죄보다도 더욱 무거운 범죄로 여겨지는 죄가 있습니다. 인간대 인간의 범죄보다도 더욱 심각한 범죄로 여겨지는 일은 바로 하나님께 대해서 짓는 죄입니다. 그래서 다른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리 선하고 의롭고 착하였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대해서 죄를 지었을 때에는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해서 엄하게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죄의 경중에 대해서 십계명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열번째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첫번째 계명인 ‘나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는 것보다도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을 더욱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갖는 두려움은 전혀 반대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은 별로 두렵지 않습니다. 오직 사람들에게 죄를 지을 때만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만을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십니까, 아니면 사람들을 두려워하십니까?
29절 말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덴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하는 바울사도의 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 새긴 것들처럼 여겨서는 안됩니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만든 것들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세 번째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살인하는 것보다 간음하는 것보다 도적질하는 것보다도 더 악한 것입니다. 아덴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러한 죄를 손쉽게 저질러 왔고 그것이 죄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이고 그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여전히 믿지 않는 것이 왜 죄이며 그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지난 세대 이방인들은 원해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던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내버려 두시고 구원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대에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을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시고 그들에 대해서 회개를 명하셨을 때에 그들은 우리가 그냥 살던대로 사는 것이 정상인데 왜 특별히 회개를 하라고 하시는 지에 대해서 의아하게 여깁니다. 오히려 이제서 회개를 하게 하시는 것에 대해서 내키지 않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제서 그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일까요? 왜 그들이 회개를 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예전 80년대 시골에는 아스팔트가 깔려있지 않았습니다. 길들은 전부 흙길이었고 잘해야 콘크리트가 깔려있는 정도였습니다. 저도 가끔씩 시골에 가보면 그곳에서의 길들에 난감해 할때가 있었습니다. 비가오면 질퍽질퍽해지고 걷기도 어렵게 되어버리곤 했습니다. 그 시절 일본의 시골길을 보여주는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잘 짜여지고 깨끗하며 정돈된 아스팔트 길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선진국의 저력이구나라고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시간은 흘러 흘러 어느덧 우리나라도 시골길에 아스팔트가 놓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도 충청도에 온천을 다녀오면서 국도길을 이리저리 가보게 되었는데 어디로 가나 다 아스팔트가 놓여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길이 잘 닦여있으니까 접근이 쉽고 여러가지 혜택을 더욱 더 누리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이 죄이고 그 죄를 깨달아야 하고 그래서 회개를 해야 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만들어진 신정도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전능하신 분께 경배를 드려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납득하기 어려운 말로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려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밭에 길을 내시려하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있는 길이 흙길이 아니고 진흙길이 아니고 깨끗한 아스팔트 길이 되어서 그분을 모실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주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입니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것이 좋은 것입니까? 아니면 죄를 회개할 필요도 없고 하나님도 섬길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 좋은 것입니까? 자유로움만 따지만 후자이겠지요. 그러나 구원을 생각해보면 전자일 것입니다. 회개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30절에서 모든 민족들에게 모든 백성들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길을 말씀하십니다.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구원이 존재하지 않던 때에는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죄로 여기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차피 구원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의 죄로 심판받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디에 있든지 어떤 민족이든지 모든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그 이유는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허락하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3. 심판자이신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확실한 구원의 증거입니다.
이제 그 구원이 임하려 할 때에 하나님은 정하신 한 사람에 대해서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잘 닦인 길로 오셔서 우리에게 그 사람을 소개해 주십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 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분에 관한 이야기와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지식과 그분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성경은 31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여기에 나오는 정하신 사람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분은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바로 예수님이 정하시고 바로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그런데 그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베푸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대신 갚아주심을 믿고 따르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었고 구원을 얻는 길이었습니다.
각 나라마다 죄용서에 대한 기준이 있습니다. 미국에는 ‘Plea bargaining’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범죄인이 죄를 고백하면 죄의 형량을 감해주는 법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이와는 다르지만 ‘양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판사가 피고인의 형량을 감해주는 법입니다. 최근 양형기준이 너무 제각각이라는 비판이 있어서 이를 법제화하는 법이 발안되었다고 합니다. 이 역시 죄의 형량을 여하튼 줄이기 위한 하나의 제도적인 장치입니다.
하나님께도 이러한 죄용서의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매우 파격적입니다. 그 기준은 만약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고백하면 우리의 죄가 사하여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다 하나님의 심판대앞에 서게 되는데 그 때 이러한 죄의 고백이 있으면 무죄가 되고 유죄가 되지 않습니다. 무죄가 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분의 자녀로 인정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 살 때에 잘하고 못한 것에 따라 상급이 주어집니다. 반대로 유죄가 되면 하나님을 거역한 사탄의 자녀로 인정이 되고 그가 세상에서 살 때 잘하고 못한 것에 따라서 형벌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고백할 때 정말 그로 인해서 죄사함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아무리 고백을 해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탄과 그 일당들은 그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진심으로 믿는 게 아니라고 우리가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고 기를 쓰고 부인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증인을 내세워야 합니다. 어떤 결정적인 증인만 제시할 수 있으면 우리의 주장이 진실임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 증인이 누굴까요? 그가 바로 죽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증인이 되실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31절에서도 이를 증거로 말하고 있습니다.
“31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요한1서 5장에서도 이러한 증거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요일5: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것이니라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우리는 이러한 증거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증거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그들도 그 증거를 갖게 됨으로써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4. 이제는 우리가 지은 죄를 깨달을 때이고 돌이킬 때이며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복음 안에 있습니다. 이 복음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우리가 받은 구원의 확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삶입니다. 여러분이 지식이라고 생각한다면 결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 삶에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야 합니다. 적당히 믿으면 안됩니다.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또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 구원의 확신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속에서 형성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구원의 증인으로 그리스도를 요청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 나를 위해서 증거해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 관계가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는지를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없으면 구원의 확신을 요청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가져야 합니다.
아직도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갖는 자가 되십시오. 공의로 심판할 날이 다가옵니다. 이번주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고 구원의 확신을 갖는 자가 되십시오. 이번 주에 그런 삶을 살아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개요 {4선지서}, <3분석>, [3감정-죄책감]~[0복음-죽음]
1.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경홀히 여기는 것은 죄를 짓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부르십니다.
3. 심판자이신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확실한 구원의 증거입니다.
4. 이제는 우리가 지은 죄를 깨달을 때이고 돌이킬 때이며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