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희생] 43요 18; 10-14 희생하는 사람과 희생시키는 사람Loading the player... <="" a=""> [크게보기]
43요 18; 10-14 희생하는 사람과 희생시키는 사람_1
2020. 6. 14. 주. 주일오전.
*개요: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마음, 1적용, 55동행, 5복음서 [요]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요]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18: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요]18: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요]18: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의 모습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보여주는 길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길이 열리면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그 나라를 어떻게 나타내면서 살아가는가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배운 자들이 그 희생을 나타낸다면 그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 모습을 살았는지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그 후대의 반응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면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처음부터 그 희생의 모습을 온전히 따랐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희생적으로 자신은 잡히시고 제자들은 풀어주게 하실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신이 바로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풀려날 수 있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쉽게 풀려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지 않도록 저항하고 반격하였습니다. 그것이 그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을 내리친 사건이었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요]18: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그는 예수님을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잡아가려는 자들에게 저항을 해야 했고 그래서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었습니다. 그 종의 이름은 말고였습니다. 구체적인 사람의 정황과 그의 고통스러운 상황이 생겼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서 말고의 귀를 쳐서 베었습니다. 어쩌면 귀를 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더 큰 상처를 입히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빗나가면서 귀를 베었던 것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칼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것은 평소에도 칼을 소지하면서 불의의 위협에 대처하려고 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면 베드로는 상당히 적극적이고 과격한 모습이었음을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이 주셨던 말씀은 그의 생각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반대로 예수님의 뜻대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18:11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미 휘두른 칼을 더 이상 쓰지 말고 다시 칼집에 꽂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가 칼을 휘두르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잡혀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을 받아들이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은 사람들에게 잡혀가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그들의 죄를 대신 감당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하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 사람을 해치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시고자 하셨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 길로 가시도록 저항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칼을 더욱 휘두르고 싶고 잡히지 않고 싶고 예수님을 지키고 싶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칼을 다시 칼집에 꽂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잡혀가는 것을 그냥 봐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때 그의 모습은 예수님의 뜻대로 희생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고 예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어쩌면 부질없는 일이라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희생을 하였기 때문에 정말 큰 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뜻은 아무 의미없는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 속에서 베드로는 고작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을 뿐입니다. 또한 자신의 뜻을 따를 때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에 따라갔다가 예수님을 세번 부인했을 뿐입니다. 그 이후에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희생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별다른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을 따르고자 했고 그렇게 희생했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가치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뜻을 따르는 것은 별다른 가치가 없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도 내 뜻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에 커다란 희생을 할 수 있고 그 희생의 가치를 누릴 수 있습니다. 각 사람이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뜻을 위해서 움직이고 자신을 희생할 때 그렇게 사는 사람이 예수님의 희생을 따르는 사람이 되고 그럴 때 놀라운 결실을 누리게 됩니다. 칼을 칼집에 꽂는 아버지, 어머니가 될 때 가정이 편안합니다. 칼을 칼집에 꽂는 아들 딸들이 될 때 부모님과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칼을 칼집에 꽂는 친구들과 동료들과 선후배와 사회생활을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희생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지만 반대로 그 희생을 거부하고 부인하며 오히려 희생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그러한 자들의 존재가 등장합니다. 그는 바로 예수님을 붙잡았던 대제사장 가야바였습니다. “[요]18:12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요]18:13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요]18:14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예수님께서 잡히시기로 했을 때 군대와 대제사장들의 종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안나스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 안나스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으로 안나스 역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가야바 이전의 10년 동안 대제사장이었고 그 다음에는 사위인 가야바가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미 그 당시 제사장직은 세속화되어서 가문 속에서 대물림을 하는 직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의 목표와 가치는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개인적인 목표를 이루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자기 뜻을 따르고 추구하며 실현하기를 바라고 그렇게 살다 보니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뜻에 따라서 처리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가야바가 정말 백성을 위하는 자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사실은 자신을 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위치와 권위와 세력을 약화시키기를 원하지 않았던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희생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희생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희생을 반길 것입니다. 자신의 희생이 아닌 예수님의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희생하지 않고 타인의 희생만을 반긴다면 그것은 결국 가야바와 같은 삶입니다. 동일한 예수님의 희생 앞에서 나타내는 모습의 차이가 이렇게 완전히 다릅니다. 지금도 우리 삶 속에서 베드로와 가야바와 같은 자들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어쩌면 우리 마음 속에도 베드로의 마음과 가야바의 마음이 함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무엇을 따르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그 본질이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희생해야 하는 어떤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희생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내가 잠을 줄여야 하고 내가 TV를 보지 말아야 하며 내가 쉴 수 없고 내가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모든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럴 때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과 그 희생을 자처하는 사람이 완전히 다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과 그 희생을 피해가는 사람이 전혀 다릅니다. 아빠나 남편이 돈벌어 오는 것은 당연하고 엄마나 아내가 집안일하는 것은 당연하고 아들이 딸이 공부를 잘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누군가 그 일을 하는 것은 그로 인해서 무엇인가를 받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희생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희생에 동참하면서 애써 일하고 온 아빠에게 남편에 감사하고 집안일 해주시는 엄마에게 아내에게 고마움을 갖는다면 함께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자녀의 나름의 고충과 어려움을 이해하며 그 어려움에 함께 하려고 한다면 함께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함께 밤을 새며 등하교에 동행하며 과제와 숙제를 도와줄 때 우리는 희생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희생은 함께 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예수님이 희생하신 이유도 우리와 함께 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함께 하나님 나라에 데려 가시려고 하기 때문에 희생하셨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아빠와 엄마가 아들과 딸이 서로 희생할 때 그들은 서로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욕심을 주장한다면 희생을 요구할 수 밖에 없고 그럴 때 그들은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 어려운 형편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되면 그 나라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면서 그 나라에 도착하게 하셨습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희생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또한 희생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희생하신 성령님을 만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희생하심이 빛나는 곳이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지만 그 신앙고백이 진실함을 보이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갔을 때 우리의 신앙고백이 진실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을 요구했던 가야바가 아니라 그 희생을 따랐던 베드로가 되어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희생으로 이루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번 주 예수님의 희생의 모습을 마음에 새기며 칼을 칼집에 꽂고 자신의 희생을 추구하며 살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셨던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삶 속에서 추구하며 바라고 사모하여 이루어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성 1. 베드로는 자신의 뜻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자였다. 2. 가야바는 예수님을 희생시키면서 예수님을 대적하였다. 3. 진정한 희생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지 타인을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4.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11주제설교 관련글[더보기]16설교소감 관련글[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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