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직장] 40마 3; 11-15 예수님을 소개하는 능력의 선지자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크게보기]
40마 3; 11-15 예수님을 소개하는 능력의 선지자_1
2019. 12. 8. 주. 주일오전.
*개요: 직장에서의 동행의 은혜, 3분석, 56동행, 5서신서 [마]3: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마]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3: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마]3: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마]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신앙인으로서 삶을 어떻게 사느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특히 직업 속에서 성령님의 동행의 은혜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장 내에서의 신앙의 의미를 생각한다든지 혹은 직업인으로서의 신앙인의 모습을 생각할 때 자주 언급되는 것은 골로새서의 말씀입니다. “[골]3: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물론 이 말씀도 좋은 말씀이고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예수님의 나심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이 달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영광을 따르는 직업을 가진 신앙인의 모습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직장에서 신앙인으로서 가져야 하는 행동이나 태도와 함께 더욱 근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직장에서 신앙인들이 가져야 하는 예수님께 대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직업을 가진 신앙인들이 예수님께 대해서 올려드릴 수 있는 경배와 찬양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말씀에 나오는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의 직업적인 일에 비추어 볼 때 분명하고 확실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마]3:11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기 위해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일을 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는데 예수님은 그에게 있어서 자신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고백을 모든 직업인에게 적용해 보면 예수님은 모든 직업인들보다 더욱 능력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모든 직장인보다 모든 기업인보다 모든 사무원보다 모든 학자보다 모든 기술자보다 그 어떤 직업인보다 더욱 능력이 많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전부 육체를 가지고 일을 하지만 예수님은 신성과 육체를 가지고 일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온전한 신이시자 온전한 사람으로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우월하신 분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이 능력이 더 많으시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자신의 일을 행할 때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지를 스스로 잘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능력을 의지하고 그 도우심과 그 인도하심을 따르고자 할 때에 자신의 모든 일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도우심을 간구하며 찾고자 할 때 예수님께서는 도우시며 인도하시고 응답하시며 역사하십니다. 취업이나 임용이나 승진이나 진급을 위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개업이나 창업을 위해서 신앙인들이 간절히 예수님께 도움을 간구합니다. 프로젝트나 일감의 계약과 진행을 위해서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의지하며 기도합니다. 심지어는 이사나 매매나 전세나 월세나 하숙이나 자취를 위해서도 예수님께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분야의 일들에 대해서 지혜와 능력으로 인도하시며 강건함과 평탄함을 허락하십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자신의 분야에서 능력이 많으신 분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그럴 때 자신이 능력자요 예수님은 능력이 없으신 분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생각도 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직 자신과 자신이 아는 그 어떤 사람의 존재 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니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신을 왜 들어야 하느냐고 거부해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외면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전하던 세례 요한이 이렇게 예수님을 섬기고 있었지만 그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한 태도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대해서 그 권위가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묻는 자들이었습니다. “[마]21:23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며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자가 나음을 받아도 계속해서 무슨 권위로 이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권위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예수님이 귀신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하다가 결국에는 예수님은 신성모독을 했다고 하면서 죽이고자 했습니다. 함께 하고 따르는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비방하면서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창조론을 가장 반대하고 진화론을 주장하던 사람이 사실은 어느 교회의 장로였더라는 말은 우리가 직장 속에서 쉽게 발견하는 안타까운 신앙과 직업의 모순적인 모습입니다. 예수님께 배우려고 하지 않으니 아무에게서도 배우지 못하고 나중에는 세상 사람들에게서 손가락질 받고 하나님도 대적하는 어리석은 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금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을 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가장 지혜로운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간음하여 붙잡힌 여인의 처벌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죽은지 사흘 된 나사로에 대해서는 ‘나사로야 나오라’하셔서 그를 살려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해서 그 누가 견줄 수 있겠습니까? 오직 그 능력을 따르고 인도하심을 받고자 할 때에 비로소 그분의 동행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동행이지 예수님이 우리를 따르게 하는 것이 동행이 아닙니다. 직장에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에 동행의 은혜를 알게 되는 것이지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고자 하면서 동행의 은혜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때에는 오히려 더 버림받고 외면받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될 것입니다. 비록 그런 어리석은 때에라도 주님은 은혜를 베풀고 계시지만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합니다. 마치 지하실에서는 건물 밖에서 얼마나 해가 비춰지고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밖으로 나오고자 할 때 비로소 해가 강렬하게 비추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자 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능력으로 돕고 계시는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함께 하시는가는 예수님을 따라갈 때 알 수 있습니다. 도망가고자 한다면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알 수 없지만 따라간다면 예수님이 앞에 계시기 때문에 계속해서 함께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능력과 권위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할 자임을 고백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는 어떻게 살아야만 합니까? 예수님이 보기에 너무나 부족하고 그분의 능력과 권세 앞에서 너무나 초라한 그는 이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는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시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마]3:13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마]3:14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는 예수님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할 자라고 고백하는 자인데 그분이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려고 하신다는 사실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에게 세례를 주셔야지 어떻게 그가 예수님께 세례를 주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었습니다. “[마]3: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님은 확실히 세례 요한보다 너무나 높으신 분이시고 세례 요한은 그보다 너무나 낮은 자임에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하셨고 그렇게 해서 모든 의를 이루고자 하셨습니다. 그 의는 세례 요한을 보내셔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시고 마침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풂으로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나타내시려고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의였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높은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로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고 예수님은 낮은 자가 아니라 의를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께서 비둘기같은 형상으로 나타나셨고 하늘에는 소리가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17절에 잘 나옵니다. “[마]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이러한 의를 이루는 일이 세례 요한에게는 중요하였고 그와 동일하게 이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있는 모든 신앙인들에게 중요합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나같이 부족한 자가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을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그 말씀을 생각하며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합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직장인의 일을 하고 부족하지만 사업가의 일을 하고 교사가 되고 학자가 되고 기술자가 되고 전문직의 일을 하며 사무직의 일을 하고 근로직의 일을 합니다. 그 일을 하면서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자신은 부족하지만 예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일을 허락해주셨으니 그 일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자 할 때 각 사람은 자기가 있는 그 위치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룹니다.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곳에서 맡고 있는 일을 잘 할 때에 그것이 서비스업이든 생산업이든 사무업이든 기술업이든 공무업이든 그 어떤 일이든지 간에 그가 있기에 되어져야 하는 일이 되어집니다.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집니다. 그러한 봉사와 섬김과 직무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직업을 가진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직업을 가진 자들이 언젠가는 은퇴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일을 할 수가 없게 될 때 비로소 그 일을 그만두게 될 것입니다. 그때 갖게 되는 하나의 생각은 영원히 하리라고 생각했던 일이 마침내 끝이 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지금까지의 일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 들었던 그 말씀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이 말씀에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하겠고 그럴 때 지난 날의 삶에 대한 의미로 과연 자신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의를 이루고자 했는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1951년 4월 19일 미국 워싱턴DC 국회의사당에서 퇴임연설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 이 노래에 나오는 노병처럼 나는 이제 군인생활을 그만두고 신의 계시를 따라 자기 임무를 완수하려고 노력하여 온 한 사람의 노병으로서 사라져 갑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임무를 완수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 받은 직업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어떤 직업을 가졌어야 더 좋았을까를 생각하지 말고 어떤 직업이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모든 일의 마지막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감사함으로 돌려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고백하고 그 속에서 겸손함으로 살았던 세례 요한처럼 우리도 각자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능력과 권세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의를 따라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1주제설교 관련글[더보기]16설교소감 관련글[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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