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용서] 1창 18; 30-33 죄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크게보기]
1창 18; 30-33 죄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_1
2019. 9. 29. 주. 주일오전.
*개요: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 12가정-54용서, 3관점, 1오경, [창]18: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창]18:31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창]18: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18: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서 심판을 계획하고 계셨고 그 계획을 미리 아브라함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살고 있다면 함께 멸망시키지 마시기를 간구하면서 그들에 대한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바로 그렇게 용서를 구하면서 의인 얼마가 있으면 그 성을 용서하실 수 있는지에 대해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대화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18: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시옵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그는 최초 50명에서 시작하였고 이제 30명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죄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냥 아브라함의 무작정 애원하는 간청에 의해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용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용서에 대한 간절함을 가지고 간구하였고 하나님은 계속 그의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이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간구를 들으시고 용서해주겠다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왜 하나님의 용서를 간구하는지를 새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가정내 존재하는 죄 문제에 대한 우리의 용서의 기준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사실 알지도 못하는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용서를 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는 자기 조카 롯을 생각하면서 용서를 구한 것이었습니다. 이전에도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 살던 롯이 가나안의 네 왕들에게 다른 백성들과 함께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가나안의 네 왕들로부터 롯과 그 가족들과 다른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을 모두 구출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과거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 사는 롯을 깊이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롯은 사실 아브라함과 매우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나홀과 하란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하란이 롯을 낳은 후 일찍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롯을 마치 자기 아들처럼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데라였는데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났다가 하란이라는 곳에 머물러 살게 되었습니다. 그 여정에 동행한 사람은 아브라함과 사라와 그리고 하란의 아들인 롯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더욱 친밀하고 우애깊은 관계를 가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하심에 따라서 하란에 머물지 않고 다시 가나안땅으로 떠나고자 하였을 때에 조카 롯은 그와 함께 하였습니다. 롯도 아브라함을 아버지처럼 생각하며 따르고 함께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아브라함과 롯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과 같은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삼촌과 조카의 관계이기는 했지만 그 이상으로 아브라함은 롯을 깊이 위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가나안 땅에서 각자의 소유가 커져서 분가한 이후에 롯이 소돔과 고모라로 들어가 버린 것은 아브라함에게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가나안 네 왕들에게 큰 고초를 겪고서도 여전히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어리석고 잘못된 삶을 살고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이야기 속에서 조카 롯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롯을 위한 최대한의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용서의 모습은 가정 내의 죄 문제에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가정이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르게 진행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혹은 아들이나 딸이 혹은 친척관계에서 죄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죄가 나타났을 때에는 죄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를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심판은 그것을 끝내려고 하는 목적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죄를 지었을 때 중요한 것은 그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 잘못이 계속 지속되고 더 나아가서 더욱 악화되기까지 한다면 심판에 이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심판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부부관계의 파탄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남편에게나 아내에게나 모두 좋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아버지나 어머니로서의 죄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의 방탕함이나 무능력함은 가정 전체를 망가뜨립니다. 어머니의 불성실함이나 무관심함은 가정 모두를 좌절에 빠트립니다. 하지만 그럴 때 용서를 생각하지 않고 심판을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종종 대중매체의 기사로 나타나는 가정 내의 자살사건은 결국은 가정에 대한 파국적인 결과입니다. 결국은 생명을 유지하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붙들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집니다. 자녀들의 죄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이나 딸이, 형제가 형제에게, 자매가 자매에게 다양한 관계와 위치에서 죄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 죄 문제가 있을 때 최선의 해결책이 무조건 연을 끊어버리고 안보고 살고 모른 척 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큰 악순환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악순환의 가장 최종적인 결과는 심판을 통해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막아야 합니다. 물론 괴로움에 빠진 각 가정들이 취하는 다양한 잘못된 해결 방법의 이면에는 각자의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개별적인 사례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런 저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악순환과 파국을 향해 나아가는 다른 가정들에 대해서는 올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악순환 속에서 나아가는 길은 좋은 길이 결코 아니고 가장 어리석은 길이다. 하나님은 괴로움을 피할 다른 길을 보여주신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길을 가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그 용서의 가능성을 깨달을 때 용서를 간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그 용서하심을 간구하였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서 보는 것은 하나님이 용서하시라고 하는데 아브라함이 주저하고 망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간곡하게 용서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그 반대의 경우를 많이 접합니다. 용서하지 않으려는 가족들에게 하나님께서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어르고 달래서 죄 문제를 가지고 있는 어떤 가족을 다른 사람이 용서하게 하시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준엄하게 심판하시려는 하나님께 아브라함이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러한 구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 용서의 구도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이고 그것도 단순히 한번 용서를 구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여러 번 간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창]18:31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내가 감히 내 주께 아뢰나이다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이십 명으로 말미암아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은 또 하나님께 감히 아뢰고 있습니다. 아까 삼십 명으로 용서의 기준을 삼았고 그것으로 대화가 끝나는 줄 알았는데 아브라함은 그것을 다시 이십 명으로 더 내려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십 명을 찾으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그들을 죽이시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십 명이 있으면 그들을 심판하지 않겠다’ 하나님이 용서의 기준이 너무 유연한 것일까요? 이랬다 저랬다 하시니 말입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용서의 간구와 하나님의 용서의 허락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용서의 핵심은 소망입니다. 소망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가 용서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결정됩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위해서 소돔과 고모라에 소망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살고 있는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멸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서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용서를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의 용서의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께도 용서의 의미는 역시 소망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삼십 명에서 이십 명으로 기준을 낮춰주셨겠습니까? 30명의 의인이 있으면 그 성에 소망이 있기 때문이고 역시 20명의 의인이 있으면 그 성에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소망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지만 즉시 죽게 하지 않으셨고 가인이 아벨을 죽였지만 즉시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에게 소망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은 변화에 대한 소망입니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소망, 앞으로는 잘 할 수 있다는 소망, 그래서 심판을 피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이 있을 때 죄문제에 대해서 용서를 구할 수 있고 그 용서를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 가정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지은 남편과 아내에게, 범죄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죄악을 행한 아들과 딸에게, 형제와 자매에게 용서를 간구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돌이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이 세상을 죄악 중에 죽은 다음에는 그 소망이 사라집니다. 죽은 사람을 놓고 기도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미 그의 인생과 갈 길이 정해졌기 때문에 그것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아직 심판을 받지 않은 시간에 용서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용서의 대상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을 뉘우치고 돌이켜서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바램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의 가정은 하나님의 용서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용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가장 중요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말씀을 보십시오. “[마]7: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비판했던 그 비판으로 우리가 비판을 받고 우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는 말은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입니까? 우리가 가족에 대해서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그 엄중한 말로 인해서 우리 자신도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자신의 올무에 갇히고 맙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었는데 어떻게 내가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용서받지 못하는 자가 되어서 스스로 심판을 자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돈을 저렇게 허비하느냐고 길길이 뛰며 화를 내던 가룟 유다가 자신이 행한 악한 일을 자각했을 때 죄책감에 못이겨 자살을 했던 것은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였기 때문에 스스로도 용서받지 못했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용서는 우리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용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용서로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이유는 그럴 때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집니다. 그러면 우리의 가정이 용서받지 못하는 가정이 아니라 용서받을 수 있는 가정으로 변화됩니다. 죄 문제 속에서 용서를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면 앞으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의의 목표가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용서만이 그러한 의의 삶을 결심하게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20명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계속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창]18:32 아브라함이 또 이르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아뢰리이다 거기서 십 명을 찾으시면 어찌 하려 하시나이까 이르시되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 [창]18:3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소돔과 고모라에 관해서 아브라함은 의인 10명이 될 때까지 하나님께 용서를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10명이 있다면 용서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한 성을 변화시키는 최소한의 소망은 10명이 되었고 의인 50명에서 10명까지에 대한 용서의 간구는 변화와 회복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보여주는 아브라함의 진심이 되었습니다. 그가 이 진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애초에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셨던 목적을 온전히 이룰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심판을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그의 용서의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밀하게 대하셨고 아브라함은 그에 합당하게 용서를 구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진실로 세상의 복의 근원이 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록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당하였지만 이러한 아브라함의 간절함 때문에 그 속에 있던 롯과 그의 가족은 천사들에 의해서 구출되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대해서 하나님의 용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죄문제에 대한 하나님이 회개와 변화와 발전을 소망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정 내의 어려움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와 목적이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은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추구함으로 온전히 성취됩니다. 그 성취는 자기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며 또한 가족에게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부르심을 깨달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를 설득하시는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여지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이 되며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실 수 있는 그 가족이 긍휼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기억하고 이러한 용서 속에서 가정을 만들어가시는 귀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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