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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동행] 62요일 2; 7-13 새로운 계명을 실천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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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요일 2; 7-13 새로운 계명을 실천하는 방법_1

  

 

  

2019. 2. 24. . 주일오전.

  

 

  

*개요: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힘의 근원, 55동행-6결심, 2분석, 6서신서

  

[요일]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요일]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요일]2: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요일]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요일]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요일]2: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만약 여러분에게 누군가 자전거를 사준다고 해보십시오. 기분이 어떠시겠습니까? 또는 스쿠터를 사준다고 해보십시오. 기분이 어떠실까요? 누군가 자동차를 사주었다고 해보십시오. 역시 그럴 때 마음은 어떨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든 것을 받는 것은 좋겠지만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활용하는가 입니다. 자전거를 탈 줄 모르면 세워만 놓을 것입니다. 스쿠터를 타는 법을 모른다면 역시 고이 모셔 놓을 것입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시용으로나 쓸 수 있지 실제로는 별 소용이 없습니다. 사용할 줄 모르면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동행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해 준다고 하시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지 않으셨다면 그런 혜택을 우리가 요구할 수 없습니다. 어떤 종교나 어떤 신앙의 대상도 이러한 동행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그분의 사랑하시는 성도들에게 동행하심을 허락해 주시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것은 이제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 동행은 정말 내 힘으로는 절대로 갈 수 없는 곳에 이르게 합니다. 또한 내 능력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을 이루게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동행을 어떻게 따라가느냐 입니다. 자전거가 주어져도 오토바이가 있어도 자동차가 있어도 운전할 줄 모르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동행도 따라갈 줄을 알지 못하면 역시 소용이 없습니다. 그 동행은 무거운 짐이 되고 거추장스러운 부담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 동행하는 법이 바로 구체적인 삶의 모습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그렇게 동행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실제적으로 우리가 각자의 삶 속에서 어떻게 동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동행하는 사람은 무엇이 다를까요? 오늘 말씀은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2,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여기서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성도로서 부모님을 둔 모든 자녀들에게 해당됩니다. 나이가 많아도 부모님이 있으면 자녀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자녀가 된 자들은 하나의 관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과의 동행을 어떻게 이룰 수 있을지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자신들의 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자녀들로서 부모를 공경하며 살라는 구체적인 행위에 대해서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더욱 근본적인 삶의 적용은 자신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함을 받았음을 깨닫는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녀들은 더욱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동행은 구체적인 행동들을 몇 가지로 제한함으로써 선행을 적은 일들로 중단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본질적인 마음을 구체화함으로써 선행을 더욱 많은 일들로 확장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서 사함받은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그 사함으로 인해 자신은 무한한 것을 얻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감사와 기쁨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습니다. 그 기쁨 속에서 부모님을 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 자녀들이 가질 수 있는 놀라운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그 동행은 하나님의 손을 잡고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자전거를 타는 방법의 기본은 안장에 앉아서 핸들을 잡고 앞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안장에 앉지 않는다는지 땅을 바라본다든지 옆을 바라본다든지 하면 중심을 잡을 수 없습니다. 자전거 타기를 배울 때에는 항상 고개는 앞을 향하면서 자전거가 옆으로 넘어지지 않도록 몸을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움직이면서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그 과정을 반복할 때 비로소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면서 앞으로 바라보며 걷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나아갈 때 비로소 하나님을 붙드는 손도 의미가 있고 바라보는 대상도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이 죄사함을 받았음을 기억하면서 사람을 바라보아야지 죄사함만 생각한다든지 혹은 사람만 바라본다든지 하면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죄사함을 생각하면서 사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죄사하심에 대해서 계속 확인하고 확인해야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죄사함의 은혜로 바라볼 수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냥 믿고 확신을 갖고 따르면서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맹인을 인도하는 인도자를 생각해 보십시오인도자의 입장에서 맹인이 끊임없이 인도자를 의심하고 인도자의 두 손을 잡거나 뒤에 매달려 가려고 한다면 그를 인도하여 나가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인도자를 신뢰하고 한걸음 한걸음 걷고자 할 때에 비로소 길에 익숙해지고 세상에 익숙해지게 됩니다.

  

부모로서 저는 자녀들과 함께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함께 게임도 하고 함께 퍼즐도 맞추고 함께 식사도 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일들 속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교제하며 소통하는 것입니다. 함께 하기는 하지만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바엔 자녀들과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자녀들과 교제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동행하심을 삶 속에서 적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면서 살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점차 확장되어서 다른 사람에게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사는 삶이 바로 자녀들에게 주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입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부모님들에 대한 삶의 적용을 보십시오. 13절입니다.

  

“[요일]2: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아비들은 자녀를 둔 모든 부모님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동행을 적용하는 방법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가 무슨 일을 하셨겠습니까? 그분은 모든 존재를 다 만드셨습니다. 창세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신앙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삶에 적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초부터 스스로 존재하셨던 하나님을 바로 이 현재에 적용하는 삶이 바로 진정한 적용입니다. 그럴 때 모든 피조물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보십시오. 그 자녀가 어디서 왔겠습니까? 그 자녀의 모든 요소요소를 누가 만드셨겠습니까? 아버지 닮았다, 어머니 닮았다고 말하지만 그 닮은 자녀는 누가 만드셨습니까? 아버지의 유전자와 어머니의 유전을 가지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자녀 속에서 발견할 수 있고 또한 발견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세상을 바라보는 동행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부모님을 만드시고 그 부모님과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래서 그 부모님의 손을 붙잡으셔서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의 세계를 함께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정말 그 손을 붙들고 있다면 인도하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세상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의 세계 속에서 하나님께 경외와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그렇게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부모님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세상의 동물들에게 인도하시면서 하셨던 것도 바로 그런 일이었습니다.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에게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신 들짐승과 각종 새를 이끌어 가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그들의 이름을 짓게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들의 이름을 지으면서 아담은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아직 선악과를 먹기 전의 일입니다. 그래서 순수하고 온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이름을 짓던 대상 중에는 아담 자신의 배필이었던 하와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셨고 또한 그럴 때 그 모습을 기뻐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고 기억하면서 자녀들을 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자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의 삶을 자녀나 부모에게 적용하는 것 이외의 대상을 찾는다면 그 다음에는 청년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일]2:13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독립적인 한 사람의 청년으로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마음 속에서부터 악한 자를 이기어 내는 것입니다. 악한 자와 동행하려고 한다면 결코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전에는 어떠했을지 몰라도 악한 자와 어울려 다닐 때 어느 시점부터 하나님은 옆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의 친구가 아닙니다. 악인의 동류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악한 자와 즐겁게 어울려서 다닐 때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탕자처럼 언젠가 돈도 떨어지고 친구도 떨어집니다. 악한 자들이 함께 놀아주었던 이유는 뭔가 이용할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이용할 것이 없고 빼돌릴 것이 없다고 판단될 때에는 가차없이 버려집니다. 친구도 떠나고 이웃도 떠나고 지인들도 등을 돌립니다. 그 모든 것은 악한 자에게 졌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그들에게 패배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악한 자를 이깁니다. 악한 자들의 유혹과 도발과 공격을 마침내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은 악한 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놀라운 하나님과의 동행의 효력이 나타납니다.

  

자동차를 받았지만 운전도 못하고 세워 두기만 한다면 과연 그것을 어디에 어떻게 쓸 수 있을까요? 어쩌면 지혜를 짜내고 짜내어서 그 자동차를 집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전 봉고나 스타렉스 같은 승합차를 집처럼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자는 곳을 만들고 먹는 곳을 만들고 전원을 연결해서 TV나 영화를 보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동차의 용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효력은 그 차를 움직일 때 나타납니다. 그래서 먼 곳을 갈 수 있을 때 비로소 자동차가 있는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재밌게 지내기 위해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악을 이기고 하나님 나라의 선을 찾아 떠나는 자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동행하십니다. 그 길을 찾아 떠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인도자가 되십니다. 하지만 이 땅에 머물러 있기만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은 귀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동행을 하고 싶어도 방향이 틀리기 때문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차이 속에서 빛으로 나아가는가 아니면 어둠으로 나아가는가가 결정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요일]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어둠은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참빛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죄사하심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빛된 삶이고 태초부터 계신 이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 빛된 삶이며 악한 자를 이기며 사는 것이 빛된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 결과 형제를 사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요일]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빛 가운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의 결과로 나타나고 그것이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고 자랑스러움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새로운 계명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요한일서는 우리에게 옛 계명이지 이미 들은 말씀을 다시 반복하여 말하면서 그 의미를 이 시대에 다시 실천하게 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실천하는 새 계명입니다. 내용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대상이 새로운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새 계명을 실천할 대상을 찾아보십시오. 부모님에게 자녀들에게 악한 자들에 대해서 이 새 계명을 실천해 보십시오. 함께 하시며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들을 올바르게 바라보십시오. 그래서 그 모든 대상들에 대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고 실천하게 되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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